439화
439화
Episode 83. 독자의 화신
들끓는 혼돈의 힘이 전신의 모세혈관을 잠식하고 있었다.
파고드는 혼돈의 힘에 맞서 설화들이 연이어 반발을 일으켰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기적을 꿈꿉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당신의 변화에 저항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흐려지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은 채, 나는 경전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
이계의 신격화의 부작용일까. 어디선가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의식이 분절되며 멋대로 [전지적 독자 시점]이 발동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한꺼번에 여러 사람의 시점을 감각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동시에 들려왔다.
「······알고 있었다.」
유중혁.
「애초에 너무 티나잖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이지혜.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
신유승.
「사, 사실 나도 예상했거든? 독자형! 독자형!」
이길영.
「······독자 씨?」
정희원.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척 강한 손오공이군······ 대체 누구지?」
······이현성.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현성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
슬슬 기억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계의 신격화가 끝나면, 내 기억은 우주의 먼지로 흩어질 것이다.
「김독자는 두려웠다.」
[제4의 벽]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 호언은 모두 겁쟁이의 선언이다.
「기억을 모두 잃은 후의 내가, 정말 ‘나’일까.」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었지만, 기억을 통째로 잃은 적은 없었다.
지금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정말로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다시 읽는다고, 이 모든 감정을 그대로 가질 수 있을까.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설화, ‘거신의 해방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소중한 이야기들을 쌓으며 겪었던 것을, 정말로 다시 감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김독자의 눈앞에 경전이 있었다.」
『서유기 리메이크』.
저 경전은 ‘거대 설화’ 그 자체였다.
내가 저것을 쥐는 순간, 이번 ‘거대 설화’는 <김독자 컴퍼니>와 이계의 신격의 것으로 돌아갈 것이다.
「김독자는 경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것으로, 우리의 『서유기』는 완성될 것이다.
츠츠츠츠츠······.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시나리오 이변으로 인해 이계의 신격화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지연된다고?
주변의 스파크가 급격하게 짙어지며, 성좌들의 고함이 멀어지고 있었다. 시공간의 흐름이 기묘하게 꺾이고 있었다. 등줄기를 적시는 소름에 오한이 들 정도로 강력한 개연성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스타 스트림> 전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
왜곡된 공간을 뚫고, 누군가가 시나리오에 개입하고 있었다.
[대도깨비, ‘허주’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허체’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하롱’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하람’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 ‘해솔’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대도깨비들의 현현.
츠츠츠츠츠츳!
경전을 향해 다가가는 내 손끝이 석화된 것처럼 굳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는 그 이야기를 가질 수 없다.]
도깨비들은 메인 시나리오에 개입할 수 없다.
아니, 지금까지도 간접적으로 시비를 걸어오긴 했지만 무려 대도깨비씩이나 되는 존재가 직접적으로 시나리오를 틀어버린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 자신의 개연성까지 내걸고 시나리오에 개입했다.
[<스타 스트림>이 격동하고 있습니다!]
대도깨비들 또한 <스타 스트림>의 일부.
시스템을 관장하는 그들이라고 해도, 비정상적인 개연성의 운용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 때문인지 대도깨비들의 몸에서도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잊힌 것들은 잊힌 대로 두어야 한다.]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나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이 경전을 손에 넣고, ‘거대 설화’를 얻게 된다면.
【아아아아아아아아】
【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들이 줄곧 이야기에서 배제해온 ‘이계의 신격’들이, 정식으로 ‘거대 설화’에 편입되게 된다.
이계의 신격은 그들의 시스템만으로는 온전한 통제가 불가능한 힘. 중하급의 [옛 존재]도 아닌 외신 급의 이계의 신격이 마구잡이로 시나리오에 합류하기 시작한다면, <스타 스트림>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
[그만 두어라.]
대도깨비들의 격이 내 전신을 사슬처럼 옥죄어 왔고, 경전을 향해 뻗어지던 손은 한 뼘을 남기고 멈춰 섰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도깨비들이 개연성을 어기고 나타났으니, 어그러진 개연성의 저울눈을 맞출 다른 존재도 나타날 것이다.
쿠구구구구구구!
생각하기가 무섭게 하늘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레이트 홀]. 그 너머로 나타난 존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전을 쥐어라, ■■의 사도여.]
그는 은가이의 숲에서 만났던 혹부리 왕이었다.
혹부리를 발견한 대도깨비들이 대경하며 외쳤다.
[감히······!]
[지평선의 악마여, 이곳이 어디라고 온 것인가!]
[이 시나리오에 네가 나타날 개연성은 없다.]
혹부리 왕이 비웃었다.
[그건 네놈들도 마찬가지지.]
대도깨비와 혹부리 왕의 격이 충돌하며, 구속되었던 내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한 뼘이 움직였다.
[이계의 신격화가 재개됩니다.]
혹부리 왕이 환하게 웃었다.
[<스타 스트림>이여, 너희가 지운 세계들이 도래할 것이다.]
손끝이 경전에 닿는 순간, 환한 전류 속에 내 의식도 사라져 갔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뒤쪽을 돌아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믿을 것은······.」
*
먼 창공에서 벌어지는 빛의 산란.
구요성관도, 이십팔수 별자리들도, 그 순간만큼은 그 폭발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운, <황제>의 모든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구요성관들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던 이길영이 용마를 멈춰 세웠다.
“······신유승?”
말의 안장에서 깨어난 신유승이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신유승은 이길영과 함께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뭔가가 잘못 됐다. 잔챙이들은 빨리 해치우고 어서―]
잠시 주춤하던 구요성관들과 <황제>의 위인급 성좌들이 다시금 이길영과 신유승을 향해 쇄도했다.
여전히 서쪽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이길영이 말했다.
“내가 뚫을 테니까. 가.”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저곳에 그들이 찾던 이야기가 있다.
“가서 독자 형을 구하라고!”
저곳에, 김독자가 있다.
신유승 또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의 그 누구보다도 더.
용마에서 뛰어내린 이길영이 자신의 격을 개방하는 순간, 신유승이 용마를 달음박질했다. 청룡으로 화한 용마가 고속정처럼 강 위를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멀리서, 그리운 설화의 냄새가 났다.
오래도록 자신을 지켜준 배후성의 별빛이 보였다.
저토록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왜, 확신하지 못했던 걸까.
무수한 의문들이 머릿속을 소용돌이치며 흘러갔다.
왜 김독자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어째서,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인가.
신유승은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곳에서 김독자를 잃어버리면.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콰콰콰콰콰!
구요성관들이 쏘아 보낸 섬광포에 용마가 맞았다. 신유승은 비명과 함께 강물에 빠졌다.
그런 신유승을 끌어 올려준 존재들이 있었다.
【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김독자】
【우리우리우리우리우리우리】
언제부터였을까. 강 위를 떠 다니던 요괴들이 무리를 이루어 강을 건너고 있었다.
신유승은 얼떨결에 그 무리 위에 올라탔다. 요괴들은 징검다리처럼 떠올라 길을 만들고 있었다.
【구해줘구해줘구해줘구해줘구해줘구해줘】
그런 요괴들의 위를 달리며, 신유승은 깨달았다.
「아저씨가 지금 저기에 있는 것은, 이들을 위해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울컥하고 뭔가가 치솟았다.
눈부신 빛 속에서 흐트러지는 김독자의 설화가 보였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지금의 김독자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명백했다.
「왜, 아저씨는 늘 혼자서.」
가장 먼저 치솟은 감정은 원망이었다.
어째서 김독자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가.
「청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겠지.」
알고 있지만.
「저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거야.」
그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암흑성에서도 그랬고, 마계에서도 그랬다. 거기다 성마대전까지.
그들의 긴 시나리오는, 줄곧 김독자가 희생해 온 역사였다.
「그렇기에 이 원망은, 사실 김독자가 아니라 신유승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독자의 화신이었기에 알 수 있는 슬픔.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은, 김독자의 결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 김독자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유승아, 슬픔에 경중은 없어.”」
신유승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슬픔에 경중은 있다.
목숨을 걸어 누군가를 구하는 사람의 절망과, 그걸 지켜보는 무력감에 절망해야 하는 사람의 비탄이 같을 리가 없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이 제일 소중하다.
그리고 김독자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왔다.
눈앞에서 강물이 폭발한 것은 그때였다.
<황제>의 성좌들이 설화를 토하며 낙하하고 있었다.
[오너라, 사라진 이야기들이여!]
세계가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와 함께, 세계의 정경이 변화하고 있었다.
하늘 곳곳에서 [그레이트 홀]이 열렸고, 상상도 못할 격을 가진 존재들이 넘어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이계의 신격’들이 아니었다.
[■?■?■■이 ‘엑스트라’ 배역으로 참여합니다!]
[■■?■이 ‘엑스트라’ 배역으로 참여합니다!]
그것들은, 서유기의 요괴들이었다.
(경전의 주인을 놓고 벌어지는 최후의 전쟁.)
(긴 이야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할 음마(陰魔)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세계가 멸망하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 멸망의 중심에서, 두 눈이 풀린 김독자가 요괴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착각일까. 그 순간 김독자는 더 이상 김독자가 아니라 요괴들의 일부처럼 보였다.
‘내가 막아야 해.’
끊어진 요괴의 길 위에서, 신유승은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른들보다도 더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래왔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신유승은 자신의 손이 그저 아이의 것처럼 느껴졌다.
【■■■■■■■■■■■■■■······!】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으깨졌다. 통천하의 강물이 통째로 뒤집히며 강 위의 산 것들이 피와 설화를 쏟으며 죽어갔다.
[심사위원, ‘석가의 후예’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시선과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유승아, 네가 해야 해.]
신유승이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상아 언니?”
[이대로면 독자 씨는 돌이킬 수 없게 돼. 막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던질 시간이 없었다. 신유승은 필요한 질문부터 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해요?”
유상아는 곧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화두를 던지는 부처처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배역을 잊지 마.]
신유승은 잠시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김독자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손오공의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금테.
신유승은 다시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것은 아이의 주먹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삼장법사’의 주먹이었다.
“······할 수 있을까요?”
말끝이 떨렸다.
멀리서 흔들리는 김독자의 신형.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기어코,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저게 아저씨가 원하는 일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아이에게, 유상아가 말했다.
[아주 오래도록 혼자였던 사람이야.]
김독자(金獨子).
[그런 사람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한두 번 말해준다고 갑자기 바뀌지는 않아.]
자신은 그런 김독자의 화신이었다.
[말해주고, 곁에 있어 주고, 확신을 줘야 해.]
신유승은 울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사람이 정말로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신유승은 자신의 모든 격을 끌어모아 도움닫기를 했다. [바람의 길]을 사용하는 김독자처럼, 신유승은 전력을 다해 강 위를 달렸다.
조금씩 가라앉는 수면을 디디며, 신유승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아저씨!”
김독자는 듣고 있지 않았다. 요괴들과 성좌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 요괴가 되어가는 김독자가 텅 빈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변해가고 있었다. 김독자가, 흩어지고 있었다.
“가지마요! 제발! 가지 말라고요!”
자신의 배후성이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신유승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차라리 비명처럼 들렸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로운 설화가 당신에게서 발아합니다!]
모두가 특별한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고, 그렇기에 비로소 설화가 존재한다.
전해지지 못한 말들은, 이야기가 된다.
긴고주(緊箍咒)의 금빛 활자들이 설화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아저씨가 날 몇 번이고 구해냈듯이―」
쏟아지는 유성 속에서, 신유승은 자신의 별을 정확히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나도, 당신을 구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