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438화
순간 이길영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에 급격하게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너, 너―”
나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가까이 있는 부유물들을 끌어왔다.
(손오공은 뒤쪽을 향해 바람의 술법을 사용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0’이 발동합니다!]
돌풍과 함께, 나를 태운 부유물 뗏목이 쾌속 항진을 시작했다.
뒤쪽에서 이길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바람 소리에 묻혀 스러졌다.
[<김독자 컴퍼니>의 누군가가 당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혹부리 왕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구요성관들이 내 움직임을 눈치채고 집요하게 쫓아오고 있었다.
몇몇 구요성관은 나를 쫓는 대신 나를 앞질러 날아갔다.
멀리서 ‘경전’의 위치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신비한 안개로 둘러싸인 작은 섬 위에, 아름다운 광채를 뿜어내는 단 하나의 책.
그리고 어느새 구요성관과 <황제>의 성좌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8.3%]
[당신의 화신체 손상도가 심각합니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이다.
순간, 내 어깨 위에서 줄곧 침묵하던 유중혁 [999]가 말했다.
―멍청한 짓이다. ‘이계의 신격’이 되고 싶은 것인가?
나는 씩 웃었다.
‘겁나냐?’
―여기서 더 무리하면 너는 정말로 ‘이계의 신격’이 된다. 그러면 시나리오도 실패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시나리오 창을 열어 목표를 확인했다.
+
<히든 시나리오 ― 약속 증명>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스타 스트림>의 주요 거대 설화에 ‘이계의 신격’들을 등장시키시오. 단, 기존처럼 ‘이계의 신격’ 역할로 등장해서는 안 됩니다.
제한시간 : 100일
보상 : ‘이계의 신격’의 신뢰, ???
실패시 : 당신은 모든 기억을 잃고 ‘이계의 신격’으로 변화합니다.
* 해당 시나리오의 수행 도중 당신은 <김독자 컴퍼니>에게 접촉하여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 조건을 어길 시, ‘이계의 신격’으로의 변이가 가속됩니다.
* 경고! 현재 당신의 정체가 노출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 현재 화신체의 상태 악화로 이계의 신격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
역시, 다시 읽어 봐도 내 짐작이 맞다.
‘이계의 신격이 된다고 해서 시나리오에 실패하는 건 아냐. 이계의 신격이 되는 것은 시나리오의 ‘실패 대가’지 ‘실패 조건’은 아니거든.’
―그거나 그거나 다를 게 없는······.
‘달라. 이건 내가 시나리오에 실패하기 전에 먼저 ‘이계의 신격’이 되는 거니까.’
내가 혹부리 왕에게 받은 ‘히든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은 100일.
즉, 나는 그 안에 임무만 완수하면 된다.
문제는 ‘이계의 신격화’에 관련된 부분.
‘내가 이계의 신격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는 건 시나리오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화신체의 상태가 나쁘기 때문이야. 즉······.’
―네놈이 ‘이계의 신격’이 되어도 시나리오에 실패하진 않는다는 거로군.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을 응시했다.
이제 [999]도 내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2.171%입니다.]
[시나리오를 완수하기 위해선 ‘이계의 신격’의 지분을 30% 이상 확보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경전을 획득해 거대 설화를 손에 넣더라도,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채울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이계의 신격’이 된다면.
[해당 설화에서 당신의 배역은 ‘손오공’입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당신의 지분은 22.51%입니다.]
최강의 요괴인 ‘손오공’의 역할을 ‘이계의 신격’이 담당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저 남은 지분을 채울 수 있다면.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왜라니?’
―‘은밀한 모략가’와 ‘이계의 신격’들을 내버려 두어도, 너에겐 아무것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손해라······.’
―설마 ‘은밀한 모략가’를 동정하는 것인가? 그는 네놈의 동정 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겠지. 그놈도 유중혁이니까.’
―유중혁? 웃기지 마라. 그는 네가 아는 ‘유중혁’이 아니다. 이미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무엇이란 말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달려오는 <황제>의 성좌들을 보며, [999]가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이계의 신격’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 ‘이계의 신격’이 되면 살아온 기억들을 급격하게 상실하게 된다. 저 ‘은밀한 모략가’조차도 우리와 같은 단말을 만들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
역시, 그 많은 ‘꼬마 유중혁’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가는 알고 있어.’
―그걸 아는 놈이 대체 왜······!
‘이렇게 해야만 하니까.’
나는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짧은 어둠 속에서 ‘이계의 신격’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아아아아아아】
【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
【기억이기억이기억이기억이기억이】
이계의 신격.
유중혁이 실패한 무수한 세계선에서 만들어진 존재들.
지금껏 나를 살게 했던.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세계의 흔적들.
‘그런 걸 보고, 어떻게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겠어.’
심지어 지금도, 내 귓가에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고 있는데.
콰아아아아아!
쏟아지는 포화에 내가 타고 있던 뗏목이 부서졌다.
나는 흩어진 부유물들을 짓밟고 강 위를 달렸다.
[‘바람의 길’이 더욱 가속합니다.]
[극한에 이른 속도에 ‘바람의 길’이 진화합니다.]
다리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서, 나는 이윽고 부유물들 없이도 강 위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경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과한 격의 사용에 화신체의 손상이 심화됩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8.6%]
심장이 불길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8.7%]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소리였다.
[999]가 뭐라고 말을 걸어왔으나, 폭발하는 강의 정경 속에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들려온 것은, 내 안의 목소리였다.
「김독 자」
[제4의 벽]이 말하고 있었다.
「미 친짓 이 야」
역시, 녀석도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겠지.
「전 부다 잊 게될 거 야」
「김 독자 더이 상 김독 자 아 니게 된 다」
[제4의 벽]의 말은 맞았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1%]
‘이계의 신격’이 되면, 나는 지금껏 쌓아온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김독자는 무서웠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지금껏 쌓아온 모든 기억들이, 사라진다는 게.」
나는 벽 위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네가 모두 기억하고 있잖아.’
「뭐 ?」
‘네가 나를 모두 기록하고 있으니까, 난 절대로 잊지 않아.’
본래의 나였다면, 이런 모험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니, 그런 일은 절대 겪고 싶지 않으니까.
[‘제4의 벽’이 크게 동요합니다!]
하지만 내겐 [제4의 벽]이 있다. 어떻게 습득한 스킬인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이 이야기가 시작되던 첫 순간부터 모든 것을 기록해 온 벽.
나는 벽 안의 정경을 떠올렸다. 고적하고 아늑한 어둠이 들어찬 도서관과, 그 도서관을 아끼는 사서들.
그곳에는 유중혁의 모든 회차를 담은, ‘멸살법’의 숭고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고······.
하찮은 ‘김독자’의 삶도 적혀 있다.
「그 도서관은 지금도 김독자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김독자의 숨소리부터, 김독자의 생김새, 김독자의 웃음과, 김독자의 말투.」
「김독자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종종 흥얼거리던 노래. 김독자가 슬플 때와 기쁠 때 짓는 표정. 자신이 없을 때 괜히 중얼거리는 말버릇과 뒤따라오는 자조.」
「아이들을 생각할 때 고개를 기울이는 버릇.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을 감을 때 생기는 떨림. 유상아와 이야기할 때 짓는 미소. 한수영을 놀릴 때 휘어지는 눈썹과 입가의 짓궂은 주름. 이현성을 생각할 때의 죄책감.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를 떠올릴 때의 눈빛까지.」
그렇기에 나는 말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으면 돼.’
「하 지 만」
‘지하철이 도착했던 그 순간부터, 서유기에 온 지금까지. 모두 다시 읽으면 되는 거야.’
멀리서 쏘아진 섬광의 탄환이 내 발치에 떨어졌다.
나는 빛의 폭발에 휩쓸려 강에 빠졌다. 허우적거리며, 주변의 부유물을 붙잡았다.
[화신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3%]
나는 다시 일어나서 달렸다.
이제, 정말 조금 남았다.
‘나는 세상에서 읽는 걸 제일 좋아하니까.’
차오른 숨이 버거웠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4%]
벌써 기억이 조금씩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구요성관 중 하나가 쏘아 보낸 창에 어깻죽지가 스쳤다. 그 고통조차 내 것이 아닌 느낌.
문득, 오래전 커뮤니티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아직 멸살법 안 읽은 눈 삽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완결에 다가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서,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실웃음이 났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까먹고 다시 읽을 수 있다니, 내겐 오히려 행운이라고.’
「김독 자는 멍 청 이」
분하다는 듯, [제4의 벽]이 소리쳤다.
「난 아 무것 도안 들려 줄 거 야」
말은 저렇게 해도, 도와줄 것을 알고 있다.
「잊 어버 리는 거용서 못 한 다」
쏟아지는 포화 속에 피부가 벗겨지고,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발생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그런 통증을, [제4의 벽]이 막아주고 있었다.
달려드는 구요성관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단단한 강철을 두드린 것처럼 주먹이 쓰라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의 설정이 발동합니다.]
[‘은퇴 패널티’로 당신의 전의가 감소합니다.]
[‘은퇴 패널티’로 당신은 전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망할 설정을 잊고 있었군.
전신에 감돌던 설화의 힘이 급격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막아라!]
[놈이 경전에 도착하게 해선 안 돼!]
‘경전’이 보관된 유적이 코앞에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섬.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보물.
삼장과 일행들이 14년에 걸친 여정으로 얻은 해답.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의 설화를 지켜봅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당신의 해답을 기대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당신의 설화를 응시합니다.]
[심사위원, ‘석가의 후예’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와 함께한 모든 존재들이, 이 순간을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7%]
구요성관들은 필사적으로 나를 막아섰다. 페이후 측의 삼장이 허겁지겁 경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황제> 측의 성좌들이 더 몰려올 것이고 나는 경전을 얻지 못할 것이다.
[득표수 : 50412]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1위입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상하게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 녀석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일행들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모두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시나리오 마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발.)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씩 웃었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성좌들과 함께 내레이션이 시작되고 있었다.
(손오공은 자신의 적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전생에도 싸운 적이 있는 적들이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8%]
(지긋지긋한 전쟁.)
(그는 은퇴한 몸이었고, 이제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나는 정성스레 쓴 편지처럼 들려오는 그 내레이션을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 너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어.
이 이야기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천천히 그러쥔 주먹에서 오래된 힘이 솟구쳤다.)
[당신의 ‘은퇴 페널티’가 완전히 해제됩니다.]
(제천(齊天). 천공의 먹구름과 전격을 조종하는 힘.)
[5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당신의 ‘격’이 육체 조건의 페널티를 극복합니다.]
백청의 강기.
[전인화]의 전격이 창공을 찢으며, 구요성관의 별들을 파괴했다.
(그는 그 주먹으로 많은 이들을 구했기에 ‘구원’이라 불리었고, 많은 산 것들을 죽였기에 ‘마왕’이라 불리었다.)
어깨를 찢고 자라난 흑빛 날개.
(그렇기에, 그는 ‘구원의 마왕’이었다.)
(모두 오래전의 기억이었다.)
시선을 돌리자, 통천하의 강을 물들인 ‘이계의 신격’의 시신들이 보였다.
(‘요괴’들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시절.)
(그는 요괴들을 통치했고, 싸웠고, 패했다.)
(오랜 여행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고, 그는 깨달음을 얻어 보살이 되었다.)
모두, 이 시나리오의 소모품으로 죽어간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깨달음의 결과였다.)
머리에 쓴 긴고아가 아팠다. 그 통증 속에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강림한 <황제>의 성좌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막아라!]
[절대로 놈이 경전을 획득해서는―!]
(죽어간 모든 요괴들을 위해)
(그는, 다시 한번 ‘구원의 마왕’이 되기로 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눈부신 폭발과 함께 눈앞의 성좌들이 흩어졌다.
그 빛을 넘어서자, 눈앞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나는 경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9.9%]
[당신의 존재가 ‘이계의 신격’으로 진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