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437화
아직 싸울 수 있다.
그 말을 한 정희원이 고요한 격을 발산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성운 채팅]의 메시지.
―독자 형이 살아 있어.
이길영의 말이었다.
―여긴 없지만, 어딘가에서 우릴 보고 있다고.
신유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내 머릿속에서는 경고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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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6.3%]
진행률의 퍼센트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혹부리 왕이 당신과의 약속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바로 ‘이계의 신격’으로 변모하지 않은 것은, 일행들이 ‘구원의 마왕’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은 알아도, 손오공인 내가 ‘구원의 마왕’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부리 왕과 한 약속은 어디까지나 <김독자 컴퍼니>에게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7.1%]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희원은 그런 유중혁의 어깨에 손을 툭 얹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유중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혼자선 무리다.”
“아니, 충분해.”
빙긋 웃는 정희원의 미소가 믿음직스러웠다.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이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를 받습니다.]
더 이상 <에덴>과 절대선 계통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심판의 시간].
오직 <김독자 컴퍼니>의 개연성만을 빌려서 사용하는 정희원의 칼날이, 심판의 대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운, <황제>가 해당 배역의 난입에 분개합니다!]
갑작스런 정희원의 난입에, <황제>의 일원들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페이후가 고개를 갸웃하며 정희원을 바라보았다.
“너는 누구지?”
“너냐?”
“······?”
“한국 최강의 화신을 찾던 거.”
그 말과 함께, 정희원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당황한 페이후가 여의봉을 들어 정희원의 검격을 막아냈다. 콰드득, 하고 울려 퍼지는 파찰음이 묵직했다.
인상을 찌푸린 페이후가 뒤쪽으로 쭉 밀려나며 물었다.
“무거운 검이군. 그건 ‘우마왕’의 병기가 아닐 텐데?”
“맞아.”
정희원의 손에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던 강철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우마왕의 병기도, 정희원의 [심판자의 검]도 아니었다.
[플레이어 10님께서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에 ‘엑스트라’ 배역으로 참가하셨습니다!]
······응?
[플레이어 10님의 배역은 ‘여의금고봉’입니다.]
그런 배역이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찰나, 정희원의 검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마치 1만 3천 5백근의 여의금고봉이 자라나는 듯했다.
“무슨······!”
정희원의 검은 계속해서 길어졌다. 십 미터, 이십 미터, 삼십 미터, 사십 미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크기로 길어진 그 검을, 정희원은 양손으로 쥐었다.
[전용 스킬, ‘신살(神殺) Lv.3’이 발동합니다!]
신살. 정희원이 ‘멸망의 심판자’로 진화하며 얻은 ‘귀살’의 상위 스킬.
거친 혼돈의 힘이 수백여 미터에 이르는 강철검을 타고 흘렀다. 세계가 느릿하게 진동하더니, 정희원의 손이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낀 페이후와 성좌들이 외쳤다.
“모두 달아나라!”
반사적으로 몸을 피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드넓은 강의 수평에 은빛의 실선이 그어졌고, 인근의 전함들이 굉음을 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성운, <황제>가 ‘우마왕’의 힘에 경악합니다!]
일대의 수면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가공할 위력.
그것은 정희원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정희원의 손에서 진동하는 강철검. 나는 그 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강철화]의 무기화 상태에 돌입해 소통은 불가능했지만, 그는 틀림없는 이현성이었다.
불타는 강 위를 내달리며 정희원이 외쳤다.
“가! 여긴 나한테 맡기고!”
정희원은 페이후뿐만 아니라 이랑진군과 나타 태자의 길목까지 막아섰다. 그녀의 전신에서 범람하는 어마어마한 투기를 느끼며,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갑시다.”
확실히 지금의 정희원이라면, 이 전장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부탁해, 누나!”
“여차하면 도망치세요!”
이지혜의 유령함선이 출발했다.
뒤쪽에 정희원과 함께 남겨진 페이후가 분노의 사자후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통천하의 안개 속을 나아갔다. 멀리서 조급하게 달아나는 페이후 측의 삼장법사가 보였다.
[경전의 위치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는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있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당신들의 설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조금만 힘을 내 보라고 말합니다.]
[심사위원, ‘정단사자’가 자신의 삼겹살을 출렁이며 응원합니다.]
[가산점 10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지혜와 정희원의 활약 덕분인지, 이제 페이후 방과의 점수 격차도 거의 없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경전’을 얻기만 한다면, 「서유기 리메이크」의 승자는 우리가 될 것이다.
동서남북의 하늘이 일그러진 것은 그때였다.
[성운, <황제>의 이십팔수(二十八宿) 별자리들이 강림합니다!]
새카맣게 물든 하늘의 모든 방위에서, 스물여덟 개의 별들이 유성처럼 우리를 향해 낙하했다.
“피해라!”
유중혁과 나는 이길영과 신유승을 안은 채 동시에 강으로 몸을 날렸다. 통천하 전체가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반파된 유령함선이 뒤집혔다.
우리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부유물 중 하나를 간신히 붙잡았다.
“우웩! 나 혼자 살 수 있으니까 이거 놔!”
발버둥 치는 이길영의 목소리.
우리는 각자 부유물 위에 올라섰다.
앞길을 막은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가 그곳에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로군.]
[어찌 위대한 이야기를 요괴들의 피로 더럽히는가?]
[그대들은 이 ‘거대 설화’를 완성할 자격이 없다.]
대놓고 우리를 방해하겠다고 외치는 녀석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황제>가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오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일부 관객들이 <황제>의 성좌들에게 불공평함을 호소합니다!]
호소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어쨌든 ‘서유기’는 <황제>의 거대 설화였고, 그들은 이 설화를 다른 성운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을 테니까.
처음부터 이 이벤트는 <황제>의 화신인 페이후를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다른 화신과 성좌들을 참가하게 해준 것은 설화 전체의 격을 높이고 이벤트를 시나리오화 하기 위한 명분일 뿐.
어차피 우승은 페이후로 정해진 게임이었다.
이에 뒤따르는 다른 성좌 및 성운들의 다량의 불만은 코인과 적당한 수준의 설화 제공으로 잠재우는 것. 그것이 <황제>가 계획한 「서유기 리메이크」의 실체였고, 다른 성좌들 역시 말은 안 해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차피 참가해도 너희가 우승은 못 한다. 하지만 적당한 수준의 보상은 주겠다.
[어째서 그대들은 시나리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가? 이미 2등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그 득표수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황제>가 그어놓은 암묵적인 선을 넘어버린 셈이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라. 그렇게 한다면 그대들이 쌓은 설화는 거둬가지 않을 것이다.]
이십팔수 별자리의 한 축인 ‘동방 청룡 7수’인 각수(角宿), 항수(亢宿), 저수(氐宿), 방수(房宿), 심수(心宿), 미수(尾宿), 기수(箕宿)가 제각기 앞으로 나오며 격을 발출했다.
개별적인 성좌의 힘은 하위격의 설화급이나 위인급 정도였지만, 문제는 저들이 모두 모였을 때였다.
동방청룡 7수.
북방현무 7수.
서방백호 7수.
남방주작 7수.
<황제>의 방위를 담당하는 수호성들이자, 옥황의 토벌군들.
그들은 『서유기』의 본편에서 제천대성과도 맞서 싸운 전례가 있었다.
[‘이십팔수 별자리’들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스물여덟 개의 별들이 동시에 광휘를 발산하자, 그야말로 눈부신 격의 파동이 전해져왔다.
아무리 저들이 위인급이라도, 이 정도 기세라면······.
스르릉.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선 것은 유중혁이었다.
녀석은 나를 일별하며 앞으로 나섰다.
“아이들을 데리고 경전을 얻어라.”
그러자 이길영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누가 누굴 데려 가! 내가―”
뒤이어 흘러나온 유중혁의 격에, 이길영이 입을 다물었다.
유중혁의 새카만 코트가 흔들렸다. 작은 블랙홀이라도 된 것처럼, 이십팔수 별자리 전원의 빛을 받아내며 선 등. 줄곧 누군가를 지켜온 사람의 등이었다.
그 모습에 압도된 듯 주춤하던 이길영이 중얼거렸다.
“······가자.”
상대가 이십팔수 별자리 전원이라면, 아무리 유중혁이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유중혁은 저 <로카팔라>의 최강자인 인드라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탁합니다.”
“가라!”
강과 하늘이 만나는 접경에서,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길을 뚫었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오의(奧義).
암해참(暗海斬).
밤의 바다를 베어내는 일격. 모세의 기적처럼 강물들이 비산하며, 전방의 길목이 모조리 갈라져 나갔다.
미처 검격을 피하지 못한 몇몇 별자리가 강물로 추락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격이······!]
[네놈!]
경악한 이십팔수 별자리들이 고성을 토하며 흩어졌다.
그사이에도 유중혁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파천검뢰(破天劒雷).
유중혁의 전격이 만든 그 길을, 부유물들을 모아 임시로 만든 뗏목이 달렸다.
“키메라 드래곤!”
용마가 뗏목 뒤쪽으로 힘찬 날갯짓을 했다. 가공할 강풍과 함께 나와 이길영, 그리고 신유승을 태운 뗏목이 급항을 시작했다. 인원은 줄었지만 키메라 드래곤의 격이 소모되는 만큼 쾌속한 항행. 페이후 측 삼장법사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어느덧 그들을 추월하는 우리를 발견한 삼장법사가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이길영은 그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이거나 먹어라!”
[성운, <황제>의 구요성관(九曜星官)들이 강림합니다!]
“젠장! 또 뭐야 치사하게!”
<황제>가 괜히 거대 성운이 아니다.
단순히 ‘성좌’의 숫자만을 놓고 본다면, <황제>는 <스타 스트림> 최강의 성운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눈앞의 천공이 빛과 함께 쪼개지더니, 뚜렷한 디테일이 없는 아홉 개의 인형이 나타났다. 단지 각기 다른 색깔로만 구별할 수 있는 인형체들.
구요성관.
<황제>의 무인 전략 병기인 그들은, 농축된 설화들로 빚어진 존재들이었다. 제각기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에 황번성과 표미성을 포함한 아홉 천체들을 의인화한, 말 그대로 ‘성좌급’의 전투력을 가진 병기들.
콰콰콰콰콰콰콰!
병기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입자포가 통천하의 한쪽을 불태우고, 다른 한쪽은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아차 싶었던 순간, 짙은 수증기 사이로 한줄기 섬광이 날아들었다.
“신유승!”
용마를 컨트롤하느라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신유승의 신형이 하늘을 날았다. 이길영과 내가 동시에 손을 뻗어 신유승을 붙잡아 용마에 태웠다. 급소를 맞았는지 신유승의 의식이 없었다.
“저 개자식들이······!”
용마의 통제권을 넘겨받은 이길영이 자신의 격을 발출했다. 하지만 구요성관은 여전히 건재했고, 심지어 저것이 전부도 아니었다.
[성운 <황제>의 열두 원신(元辰)이 강림을 준비합니다!]
[성운 <황제>의 사해 용왕(龍王)이 강림을 준비합니다!]
그로서 나는 깨달았다.
<황제>는 이번 ‘거대 설화’에 진심이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8.1%]
다시 우리를 앞질러 나가는 적의 전함.
[다수의 관객들이 심장을 졸이며 당신을 지켜봅니다!]
[현재 랭킹 1위와의 득표수 격차가 미미합니다!]
만약 여기서 패한다면, 거대 설화는 페이후의 것이 된다.
나는 이길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현 법사님.”
“바쁘니까 말 시키지마!”
“여기서 장 법사님을 지키십시오. 제가 저들을 뚫고 경전을 가져 오겠습니다.”
“뭐? 너 무슨―”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길영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나는 아이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알았지? 길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