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436화 엑스트라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계의 신격’들은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했기에 ‘설화’ 밖으로 떠밀려 났다. 죽어가는 요괴들이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할수있어나도할수있어】 【대장대장대장대장대장대장】 【나누구나누구나누구나누구나누구】 유중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다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저들도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하는 게 전부다.” 안개 낀 통천하 너머를 응시하는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네놈은 해야 할 일을 모두 한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 우리의 이야기에 반응하듯, 내레이션이 말을 시작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그곳에 요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아마 한수영도, 내가 느끼는 비감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통천하의 강물에 요괴들의 사체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의 테마에 동요합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비통한 마음을 갖습니다.] 엑스트라는 엑스트라고,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야기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알고 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머리털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요괴들의 삶에 관해 고찰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잘 모르겠지만 모두 살릴 수는 없는 거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이 급속도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3.473%입니다.] 정말로, 여기서 만족하고 모든 것을 끝낼 수는 없었다. [시나리오 마스터가 당신을 응시합니다.] 아마 한수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라다! 자라를 빼앗아!” [터틀 드래곤]의 선측을 타고 올라온 불청객들이 외쳤다. 우리의 전함을 부러워한 다른 팀원들이었다. “해치워! 이놈들만 죽이면―” 하지만 그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스가각! 이지혜의 쌍룡검이 갑판을 타고 올라오던 손오공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서늘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집니다.] 비명도 없이 머리가 떨어진 손오공이 강물 속으로 추락했다. 경악한 사오정과 저팔계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갑판 위로 올라왔다. “건방진 놈들이······!” “대사 읊는 거 보니까 너넨 우승하기 틀렸어.” 사정없이 휘몰아친 이지혜의 [검도]가 허공을 가르고, 그 옆으로 달려나간 이길영과 신유승이 노련한 권각으로 다른 화신들을 갑판 아래로 떨어트렸다. 용마로 화한 키메라 드래곤은 날갯짓을 하며 강풍을 만들었다. “네까짓 놈들이―” 어느새 유중혁은 선체의 가장 높은 곳으로 도약해 있었다. 냉막한 표정으로 검을 뽑은 유중혁. [흑천마도]의 표면에 거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파천검뢰(破天劒雷). 하늘을 부수는 유중혁의 검이, 낙뢰처럼 통천하의 강물에 꽂혔다. “크아아아악!” 새파란 파천의 검격에 통구이가 된 화신체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화신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외쳤다. “무슨 저팔계가 저렇게 강해!” “서, 설마 저 저팔계는······?” “이놈들이다! 이놈들이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의 등장인물들이야!” ······아무래도 우리 정체가 드러난 것 같았다. [시나리오의 숨겨진 정보가 공개됩니다!] [랭킹 순위가 높은 팀의 인물들을 쓰러트리면, 설화방의 순위가 상승합니다!] “경전을 못 얻어도 저놈들을 죽이면 순위권에 오를 수 있어!” 그리고 순위권에만 오르면, 우승은 못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죽여! 저팔계부터 사냥해!” 몰려든 수십 명의 배역들이 요괴들의 시체 더미를 밟고 전함을 향해 도약했다. 개중에는 강력한 화신도 있었고, 성좌들도 있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일행들을 돌아보았지만, 일행들은 그다지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제 좀 재밌겠네.” “손오공, 뒤로 빠져 있어.” 싱긋 웃은 이지혜가 자신의 격을 발출했다.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이길영과 신유승의 통제에, 용마가 청룡의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쿠오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일행들의 화신체에서 강렬한 설화의 힘이 폭발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허공에서 불을 뿜는 키메라 드래곤이 통천하의 강물을 녹였고, 기화하는 강물의 수증기 사이를 유중혁이 달렸다. 스가각! 스가각! 흑빛 섬광이 움직일 때마다 이름 모를 손오공과 저팔계들이 죽어 나갔다. 전율이 일었다. 우리 일행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지금껏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소화해 온 결과였다. “크아아아악!” 같은 95번 시나리오라고 해서, 모두의 수준이 같은 것은 아니다. 마치 『서유기』와 같았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식은 모두가 다르다. 누군가는 편하게 날아서, 또 누군가는 편한 길만을 골라서 가기도 하겠지. 하지만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장 어려운 방식으로 이곳까지 도착했다.) 그들은 날지도 못했고, 편한 길을 골라 걷지도 못했다. 자기 자신의 다리로,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불합리한 역경과 고난을 헤치며, 불행을 견뎌내고 비탄을 삼켜내면서.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눈부신 ‘거대 설화’의 가호를 받는 저들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들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1863회차의 그곳도, 95번 시나리오였다.」 1863회차의 한수영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그곳에서 증명한 것처럼, 이곳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이것이, 네가 모르는 3회차의 이야기라고.」 내 어깨에 앉은 유중혁 [999] 또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회차를 잃고 이 세계선에 온 999회차의 유중혁은, 이 광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설화방 랭킹이 상승했습니다!] [득표수 : 25912]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3위입니다.] [다수의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이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설화방 랭킹은 빠르게 올랐다. 우리를 습격한 인물들 중에는, 우리보다 높은 랭킹의 설화방 배역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설화방 랭킹이 상승했습니다!] [득표수 : 26412]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2위입니다.] 드디어 2위. 수천 개의 방을 제치고, 마침내 우리는 우승의 목전까지 도달했다. 그쯤 되자 나 역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3.142%입니다.]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동안에도, 엑스트라로 전락한 이들의 죽음은 그치지 않는다.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혹부리 왕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30%가 넘어야 한다. 설령 이 ‘거대 설화’ 이벤트에서 우리가 우승하더라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콰아아앙! 전함의 선체가 갸우뚱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강력한 마력포가 전방의 안개 너머에서 이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뭐야! 어떤 새끼들이······!” 이지혜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성흔을 발동했다. [등장인물, ‘이지혜’가 ‘유령함대 Lv.10’을 발동합니다!] [터틀 드래곤]의 좌우로 솟아난 열두 척의 유령함대가 발포를 개시했다. 아득한 포화의 교환 속에 주변의 화신들과 요괴들은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산화했다. 발포가 멈추고, 뿌연 포연 사이로 수십 척의 전함들이 나타났다. [성좌, ‘해상전신’이 침음합니다.] 쿠구구구구구. 학익진처럼 우리의 전함을 포위한 배들. 아무리 ‘해상전신’이 해상전에 뛰어난 성좌라고 해도,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페이후.” 유중혁의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건너편의 뱃전에 선 인물이 보였다. 설화방 랭킹 1위, 『진 서유기』의 주인공이 그곳에 있었다. 저쪽 녀석들도 미리 전함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 게다가 그 숫자는 우리보다 훨씬 더 많았다. “쟤들 설화급 성좌들 아냐?” 『진 서유기』의 다른 멤버들도 보였다. 저팔계와 사오정은, 예상대로 모두 <황제>의 성좌들이었다. 저팔계 역은 ‘삼첨창의 주인’인 이랑진군. 그리고 사오정은 비사문천(毘沙門天)의 셋째 아들, ‘나타 태자’인가. 그들은 서유기 원작의 등장인물들이자, 손오공의 숙적들이었다. 괜히 원작에서 ‘어차피 우승은 페이후’라는 말이 돌았던 게 아니다. 서유기의 실제 성좌들이 페이후의 멤버로 등장했으니, 다른 방의 성좌들이 싸워 이길 수 없었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일부 관객들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성운 <황제>의 성좌들이 ‘페이후’의 전장을 응시합니다.] 게다가 그들의 뒤쪽에서 일렁이는 <황제>의 이십팔수 별자리들까지. 언제든 전장에 개입하겠다는 듯 이쪽을 보는 시선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 커다란 압박이었다. 전장을 살피던 유중혁이 말했다. “삼장이 없군.” 그러고 보니 저쪽의 ‘삼장법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서유기에서 경전을 얻는 존재는 삼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삼장을 하구에 두고 왔을 리가······ 잠깐, 경전을 얻는 게 삼장이라면. “저기 뭐가 도망가는데?” 이길영이 가리킨 곳에서 부리나케 멀어지는 전함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일부는 이곳에서 뒤를 막고, 남은 이들은 ‘경전’을 향해 움직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저 전함들 사이에 페이후 측의 삼장법사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끄는 사이 ‘경전’을 획득할 속셈이다.” 이지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먼저 가요!” 이지혜의 외침과 함께, [터틀 드래곤]의 장전이 시작되었다. 곁으로 붙어선 [유령 함대] 하나가 나와 유중혁, 그리고 이길영과 신유승을 태운 후 질주를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이지혜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어엿한 ‘해상제독’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전장이 물 위인 한, 이지혜는 설령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저쪽이다. 멀리서 움직인 전함 한 대가, 정확히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붙어서고 있었다. 페이후와 동료들이 탄 전함이었다. “너희들이 <김독자 컴퍼니>로군.” 새파란 눈동자의 손오공. 페이후가 마치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흑천마도]를 뽑아든 유중혁이 경계하듯 앞을 막고 섰다. [성좌, ‘삼첨창의 주인’이 자신의 격을 방출합니다!] [성좌, ‘비사문천의 셋째 아들’이 자신의 격을 방출합니다!] 이미 배역 본연의 모습은 포기한 모양인지, 이랑진군과 나타는 처음부터 위협적인 경고성을 보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운, <황제>의 이십팔수(二十八宿) 별자리들이 강림을 준비합니다.] [성운, <황제>의 구요성관(九曜星官)이 강림을 준비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비꼬듯 말했다. “성운의 도움이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모양이지?” “<황제>는 나고, 나는 곧 <황제>다. 가진 것을 활용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일이지.” 제아무리 유중혁이라고 해도, ‘이십팔수의 별자리’와 붙박이 아홉별인 ‘구요성관’마저 모조리 강림하면 당해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본래 ‘서유기’의 등장인물들이니 강림 개연성을 크게 소모하지도 않는다. 빌어먹게도, 이곳은 저 <황제>의 앞마당 놀이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여의봉을 뽑아든 페이후가 이쪽을 향해 본연의 격을 방출했다. ‘멸살법’ 최강의 화신 후보 페이후. 지금껏 몇 번인가 페이후를 본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그와 대결한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황제>가 제일 감싸고 도는 금수저 화신이셨으니까. [거대 설화, ‘천궁의 계승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정사대전의 생존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페이후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착실하게 거대 설화를 쌓아왔다. 그것도,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지원을 받으면서. [거대 설화, ‘치우의 후예’가 이야기를······!] 그 설화들을 보던 신유승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치우는 한국 설화 아니에요?” 그 말이 거슬렸는지, 인상을 찌푸린 페이후가 이쪽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그것을 막아낸 것은 유중혁이었다. 쩌저정,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의 [흑천마도]에 난 금이 짙어졌다. 페이후의 눈동자에 흥미로운 빛이 스쳤다. “제법이군. 네가 저팔계인가?” 페이후는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놈이 강해도, 지금의 유중혁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문제는 [흑천마도]였다. 검이 부러진 유중혁은, 평소 기량의 칠십 퍼센트도 내기 힘들 것이다. “한국 최강의 화신이 <김독자 컴퍼니>에 있다고 들었지. 그게 네놈이로군?” 기다렸다는 듯 유중혁이 앞으로 나섰다. 유중혁 대 페이후. 세기의 대결이 성사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스 타며 구경이나 할 수는 없었다. 저쪽에는 아직 이랑진군과 나타 태자도 있으니까. [현재 화신체 회복률 : 71%]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6%] [현재 이계의 신격화 속도가 둔화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몸 상태로는, 결코 저 둘을 상대할 수 없었다. 스르릉. 먼저 움직인 것은 페이후 측이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나타 태자의 보패들이 빛을 뿜었고, 페이후의 전신에서 강력한 격이 발출되었다. 허공에서 빛이 일렁인 것은 그때였다. [플레이어 9님께서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에 ‘엑스트라’ 배역으로 참가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새로운 배역이라고? 쿠구구구구! 내리치는 천둥과 함께, 유령함대의 선실 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둑한 하늘 사이로, 벼락의 빛이 긴 그림자를 드러냈다. 호리호리한 인형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인형의 머리 위로 솟아오른 커다란 두 개의 뿔. [플레이어 9님의 배역은 ‘우마왕’입니다.] ······우마왕. 그러고 보니 그런 배역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제천대성 손오공의 전우이자 의형제. 원작에서는 적으로 싸운 적도 있었지만, 우리 설화방인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에서는 아직까지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저 배역으로······. [<김독자 컴퍼니>의 인원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됩니다.] [일부 인원은 현재 투표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투표 가능한 인원만이 투표에 참가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화신 ‘이지혜’가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신유승’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이길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정희원’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한수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유중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연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보며,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눈앞의 창만을 바라보았다. [‘심판의 시간’의 투표권을 행사하시겠습니까?] 내리는 빗속에 선 일행들의 표정이 보인다. 너무나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순간, 일행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득한 침묵이 통천하의 강 위를 흘렀다. 다시 한번 벼락이 쳤고, 선실 위쪽에서 정희원이 뛰어내렸다. 갑판에 착지한 정희원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는 듯하더니,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 [현재 투표 가능한 모든 인원이 심판에 찬성하였습니다.]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이윽고 고개를 든 정희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싸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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