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435화 [「서유기 리메이크」의 마지막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허공의 패널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정희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도 저곳에 있고 싶었다. 일행들과 함께 싸우고 싶었다. “······현성 씨.” 하지만 그녀가 갈 수 없었던 이유는, 지금 침대에 누운 채 잠들어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전신이 강철로 덮인 채, 심장 박동이 사라진 이현성. 그는 ‘성마대전’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곁에 놓인 거울에 반쯤 은빛으로 덮인 정희원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성마대전’의 후유증이었다. ―넌 그냥 여기서 쉬어. 어차피 줄 배역도 없다고. 그것이 한수영과 일행들의 배려라는 것을 정희원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정희원은 ‘성마대전’에서 너무 큰 상처를 입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폐허였다. 김독자를 또 구하지 못했고, 그녀를 지키려던 사내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김독자 컴퍼니>의 가장 날카로운 검은 그렇게 무디어졌다. 침상 한쪽 구석에 놓인 [심판자의 검]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근처에 ‘악’이 있을 때만 떨리는 검. 김독자가 선물해준 검이었다. 검의 칼날은 정확히 패널의 화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면 검도 아는 것이다. 지금 그녀가 있을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정희원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달래듯 검의 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안타까운 눈으로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성마대전의 결과로 <에덴>과 <마계>는 붕괴했다. 많은 대천사들과 마왕들이 죽었고, 정희원이 믿었던 어떤 정의도 그곳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검을 휘둘러야 했다. 침대에서 가벼운 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현성 씨!”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이현성이 눈을 뜨고 패널 화면을 보고 있었다. 달싹이는 이현성의 입술이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네?” 가까이 다가갔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움직이는 이현성의 입술. 정희원은 그 입술의 모양을 알아들었다. 또 잃어버릴 수는 불끈 쥔 주먹이 떨렸다. 화가 난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자기 몸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서까지도.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정희원이 이현성의 손을 붙드는 순간, 갑자기 이현성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눈부신 은빛을 내뿜은 이현성은 순식간에 쪼그라들더니, 이내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 “이게 무슨······!” 너무 놀란 정희원이 엉겁결에 이현성을 놓쳤다. 침대 위에서, 검이 된 이현성이 울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는 듯이. 망연히 주저앉은 정희원은 푹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당신은 대체······.” 병실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돌아보자, 분명 ‘시나리오 마스터’를 플레이하고 있었을 한수영이 그곳에 있었다. “정희원.”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희원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서 부르르 떨리고 있는 강철의 검. 그 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정희원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세계를 견뎌내는 방식이 있다. 천천히 손을 뻗은 정희원이 강철검의 손잡이를 굳게 쥐며 말했다. “아직 남은 배역 있어?” * 대도깨비의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 시나리오 창이 떠올랐다. [연계된 메인 시나리오가 발동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95 ― 『서유기』의 주인>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불가 클리어 조건 : 요괴의 무리를 뚫고 통천하의 건너편에 있는 「경전」을 손에 넣으십시오. 제한시간 : 2시간 보상 : ‘서유기’와 관련된 거대 설화, 5,000,000코인, ??? 실패시 : ― * 해당 시나리오에는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습니다. + 그와 동시에, 통천하의 수위가 급격하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쓰나미처럼 넘어온 물살들은 순식간에 우리 주변을 채워버렸다. 이어서 하늘을 까마득히 덮는 요괴들의 울음이 뒤따랐다.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금껏 우리를 따라온 요괴의 총량보다도 더 많은 숫자였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5.872%입니다.] 혹부리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은 ‘이계의 신격’ 지분은 14.128%. 즉, 나는 이번 이벤트에서 남은 지분을 모두 채워야 했다. 【우우우우우······.】 뒤를 돌아보자, 우리와 함께 ‘순례의 길’을 만들어 온 요괴들이 하늘을 향해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럼, 멋진 시나리오의 피날레를 기대하지요.] 대도깨비가 사라지고, 빛줄기와 함께 다른 서유기 주인공들이 대거 등장했다. “가자!” “경전은 우리가 갖는다!” 통합된 설화방에 참가한 인파들이 통천하의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고 있었다. “진짜 손오공은 나다!” 어떤 이들은 근두운에 탑승했고, 어떤 이들은 술법으로 통천하의 물길 위를 날았다. 아무래도 활공으로 강을 건너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서유기’가 맞다면, 저건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다. [해당 시나리오에서는 ‘비행’ 관련 스킬 및 성흔들이 제한됩니다.] 허공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더니, 날아가던 이들이 비명과 함께 강으로 추락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물에 빠진 다른 서유기의 팀원들이 허공의 대도깨비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허공의 대도깨비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던 내가 말했다. “날아서 가도 된다면, 처음부터 이 여정은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자 곁의 유중혁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이 모든 것이 설화가 되는 거로군.” “맞습니다.” 결국 『서유기』란 힘든 길을 어렵게 가는 이야기이다. 똑같은 길을 가더라도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근두운을 타면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14년에 걸쳐 여행하며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는 것. 그러한 ‘설화’가 존재했기에, 이 모든 여정의 끝에 있을 경전도 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 관문이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레이션을 들은 이길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나 수영 잘 못하는데.” 통천하의 강물은 드넓었다. 삼장법사의 용마에 모두가 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모두 수영으로 강을 건너야 할 판이었다. 실제로 몇몇 팀들은 이미 물속에 뛰어들어 열심히 자맥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허름한 나룻배를 젓거나, 통나무 따위에 탑승해 바람의 술법을 사용하는 이들도 보였다. 그 광경을 보던 이지혜가 이길영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나섰다. “걱정 마. 우린 안 저래도 돼.” 그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관객 하나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 “와라, 거북선!”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허공을 향해 높이 솟은 이지혜의 쌍룡검. 눈앞의 물살이 갈라지며, 거대한 전함의 선체가 웅장한 빛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여파에 휩쓸린 몇몇 화신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미친, 저게 뭐야!” 거북의 등에 용의 머리를 가진 전함, [터틀 드래곤]. 이지혜와 아이들이 ‘넥스트 시티’를 클리어하고 얻은 성유물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저걸 타고 가도 될까 싶었다. 왜냐하면 서유기에는······. [성유물, ‘터틀 드래곤’이 「서유기 리메이크」에 조응합니다!] (위기에 빠진 일행들이 전전긍긍하자, 거대한 흰 자라 요괴가 나타나 그들을 태워주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깨알 같은 원작의 반영에 만족합니다.] [가산점 2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서유기에 그런 내용도 있었다니, 그것 참 절묘하군. 우리는 곧바로 전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출항!” 이지혜의 외침과 함께 전함이 물살을 가르고 쾌속 전진을 시작했다. 앞서서 자맥질을 하던 팀들이 허망한 얼굴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저들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저······ 언니, 최대한 요괴들은 건드리지 말고 가요.” “걱정 마.”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는 신출귀몰한 운전솜씨로 달려드는 요괴들의 무리를 요령 좋게 피해냈다. 뿐만 아니라 적의를 가지고 공격하던 요괴들도, 우리 배에 탑승한 다른 요괴들을 보며 멈칫했다, 【너 흰 뭐 지?】 ‘순례의 길’에 동참했던 요괴들 중 일부는 전함에 매달려 있었고, 나머지는 전함의 꽁무니를 따라 강물을 건너오고 있었다. 그런 요괴들이 방해됐는지, 다른 설화방의 손오공들이 여의봉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저 새끼가······!” 분노한 이지혜가 주먹을 쥐었지만, 모두를 구해줄 수는 없었다. 요괴들의 죽음은 이미 통천하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악!】 다른 설화방의 팀원들은 앞을 가리는 요괴들을 마구잡이로 때려잡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요괴들의 피가 튀었고, 살점이 터져 나갔다. [상당수의 관객들이 학살의 정경에 환호합니다!] 요괴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갔다. 설화를 쌓지 못했기에 의미를 얻지 못한 괴물들. 그들은 이 『서유기』를 완성하기 위한 제물이었다. 서유기. 인간의 초탈을 위한 긴 여정. 그 설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요괴들은 이곳 통천하에 수장되어야 했다. “죽여, 다 죽여 버려!” 깨달음의 길을 걷는 ‘서유기’의 주인공들이 죽은 요괴들을 교두보 삼아 통천하를 건너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요괴들이 발판이 되었고, 간혹 죽어 나간 다른 설화방의 주인공들도, 역시나 함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발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 리 의 이 야 기 는】 【계 속 하 고 싶 었 지 만】 그러나 살아만 있다면. 그래서 이 ‘거대 설화’의 주역이 될 수 있다면. “명오 아저씨. 가만히 좀 붙어 있어! 여긴 안전하다니까.” “안전하긴 쥐뿔! 내가 한두 번 속는 줄 아냐?” [성흔, ‘외발 준족 Lv.???’이 발동 준비 중입니다.] 다리가 잘리든, 팔이 떨어지든······ 그 존재는 이 세계에 기억된다. [7133번 설화방의 모든 등장인물이 전멸했습니다.] [487번 설화방의 모든 등장인물이 전멸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하는 설화방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에 비례하듯, 추락하는 요괴들의 숫자도 급증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구해줘구해줘구해줘구해줘】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5.773%입니다.] 힘들게 쌓아 올린 ‘이계의 신격’의 지분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저렇게나 많은 요괴들이 남아 있는데도······.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4.973%입니다.] ‘이계의 신격’들이 차지하는 지분은, 급속도로 떨어져 갔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4.473%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결국 저들은 이 세계에서 퇴치되어야 할 악당이고, 주인공이 아니니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유중혁이 말했다. “······네놈도 알겠지만,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 말이 더 아프게 느껴진 것은 그것이 유중혁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네놈 말처럼, 이것은 ‘설화’이기 때문이다.” 유중혁의 두 눈이 수면 아래에서 죽어가는 요괴들을 응시했다. 이것이 설화이기 때문에,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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