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434화 [어험, 나는 하영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주변을 지나가던······ 젠장, 거기 손 행자. 이리 와서 영약이나 가져가게.] 연기를 포기한 금발 신선이 불평과 함께 나를 불렀다. 서유기엔 이딴 설정이 많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뭐 이런 것까지 반영하냐며 불평합니다.] [가산점 1점이 추가되었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난 신령이 일행들을 도와주고,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 몰개연성과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지나칠 정도여서, 어쩌면 서유기야말로 최초의 ‘기연 몰아주기 소설’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매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라니까 할뿐.] 장하영은 누굴 생각하는지 원망스런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넌 진짜 운 좋은 줄 알거라. ······진짜 내가 늦게 오지만 않았어도 ‘구원의 마왕’ 역은 내가······.]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인데, 아무래도 이 자리는 본래 장하영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왜 그런 게 되고 싶으셨습니까?” 장하영은 아련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피식 고개를 저었다. [뭐, 너 같은 건 당연히 모르겠지. ‘구원의 마왕’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이렇게 말해보았다. “저도 구원의 마왕이 참 좋습니다.” [오, 그래? 뭐 들은 설화 있어?] “예를 들면 마계에서 얻은 ‘공단의 해방자’라든지.” [오옷?] 그게 스위치가 되었는지, 장하영은 갑자기 장광설을 떠들기 시작했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죽어가던 ‘구원의 마왕’을 구해냈거덩? 그러니까 따지면 난 구원의 마왕의 구원자라는 거지. 어때, 재밌지? 재미없어? ······아무튼, 우리는 어둠 뿌리 밑에서 의기투합하여 형제의 맹세를 했지. 함께 힘을 모아서 저 악마 공작으로부터 [공단]을 해방시키자고······!] ······대충 내용은 맞는데 왜 소설을 듣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군. [그때 ‘구원의 마왕’이 우수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지. “그대여, 기꺼이 나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되어라.”]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마구 떠들어도 괜찮은 건가 싶었는데, 허공에 메시지가 잔뜩 떠올라 있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신선의 헛소리를 비난합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마계에서 제일 활약한 것은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긴고아의 죄수’를 비웃습니다.] [다수의 관객들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쯤 되니 이게 『서유기』인지 『김독자 컴퍼니의 얼렁뚱땅 대모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한수영이 노리는 것도 그것일지 모른다.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들이 강해질수록, 「서유기 리메이크」를 통해 얻게 되는 우리의 ‘거대 설화’도 더욱 강고해질 테니까.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들이 <스타 스트림>에 입소문을 타고 번집니다.] 뭐, 그게 올바른 판단일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지혜가 지루한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 그만하고 빨리 영약 줘요.” [······여기.] * 그렇게 일주일이 더 흘렀다. 우리는 무수한 요괴들을 물리쳤고, 다시 그 요괴들을 회수하기 위해 나타난 <황제>의 성좌들과 마주쳤다. [방금 그대들이 해치운 요괴들은 내가 뒤뜰에서 키우던······.] “꺼져라.” 유중혁은 나를 대신해 그들을 퇴치했다. 패왕 저팔계와 맞서고 싶지는 않았는지, <황제>의 성좌들은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순순히 돌아갔다. 왜 유중혁이 저 역할을 자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이계의 신격화 진행률 : 95%] [현재 이계의 신격화 속도가 둔화된 상태입니다.] 그동안 내 이계의 신격화 진척은 크지 않았다. 반면, 일행들의 서유기 진행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현재 서유기 진행도 : 94%] 마침내 90%대를 돌파한 진행도. 이지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와, 진짜 힘드네.” “오늘은 특히 그렇군요.” “뭔 소리야, 넌 버스만 탔잖아.” 나는 이지혜의 핀잔을 무시하고 설화방 랭킹을 확인했다.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4위입니다.] [득표수 : 21912] [다수의 관객들이 해당 설화방의 놀라운 성장력에 경탄합니다.] 열흘도 채 안 되어 그 쟁쟁한 방들을 제치고 무려 4위에 랭크되다니. 인정하기는 싫지만 한수영의 재능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 랭킹 1위는 『진(眞) 서유기』입니다.] [득표수 : 30408] 이런 속도라면 압도적인 1위로 달리고 있는 페이후를 따라잡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듯했다. 하지만 김칫국을 마시기엔 일렀다. 만약 우리가 페이후의 방을 제치고 1등을 한다고 해도, 승부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최종 우승은 총 득표수와 심사위원들의 판단이 맞물리며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익명의 ‘관객’으로 표시될 뿐인 성좌들. [일부 관객들이 당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습니다.] 분명 <황제>는 우리의 랭킹 상승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황제>는 자신들의 거대 설화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대 설화’를 약소 성운이 계승하는 일을 절대 용납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녀석들에겐 우리에게 불만을 가질 이유가 충분했다. 예를 들면. “엄청 많네요.” 지금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저 ‘요괴’의 무리들. 산의 오솔길을 가득히 메운 ‘요괴’의 대열은, 이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모두, 우리가 살려준 요괴들이었다. [혹부리 왕과의 약속이 진행 중입니다.]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을 30% 이상 늘려야 합니다.] [현재 해당 설화에서 ‘이계의 신격’의 지분은 15.772%입니다.] 서유기가 끝나가는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이계의 신격’들의 지분은 낮았다. 저렇게 많은 요괴들을 구했는데도 15%대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들은 숫자만 많지, 우리 이야기에서 큰 비중은 없었다. 아직 ‘서유기’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로 무대에 참가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나마 저들의 지분이 15%까지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은 다수의 관객들이 저 기현상에 관심을 기울여준 덕분이었다. [다수의 관객들이 ‘순례의 길’을 감탄하며 바라봅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새로운 서유기의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소수의 심사위원들이 원작의 왜곡을 우려하며······.] 심지어 저 긴 요괴의 행렬에는 별명까지 붙었다. 순례의 길. 무수한 요괴들이 존재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나선 천축으로의 여정. [일부 관객들이 ‘순례의 길’을 관람하기 위해 해당 시나리오에 참가합니다!] 심지어 ‘서유기’의 추천 게시판에는 우리 설화방의 추천글도 등장했다. [멋진 저팔계와 사오정, 귀여운 삼장법사, 연약한 손오공] 작성자 : uri9158 ―추천평 : 저팔계는 멋있고 삼장들이 귀여움. [은퇴한 SSSSS급이 되었다, 양산형 설화인 줄 알았던 수작] 작성자 : 비양산형 제작자 ―추천평 : 사실 서유기의 진짜 주인공은 ‘요괴’다. 손오공도, 저팔계도, 사오정도 모두 ‘요괴’다. 그럼에도 서유기의 테마는 인본주의에 가까운데, 그것은 원작의 모든 요괴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화(人間化)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기존 서유기의 요괴들은 요괴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인간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뭔가 작성자들의 이름들이 익숙한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아무튼 영문 모를 추천도 많이 받았다. “쟤들, 계속 따라오네요······.” 나와 함께 일행의 후미에서 걷던 신유승은 요괴들이 신경 쓰이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망설이던 신유승이 발치에서 강아지처럼 쫄랑거리는 요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녕?” 혹시나 요괴가 신유승을 공격할까봐 조금 긴장했는데,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웅크린 요괴가 신유승의 손끝에 코를 비볐다. 녀석은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무시무시한 ‘이계의 신격’이 아니었다. 【따뜻해따뜻해따뜻해따뜻해따뜻해】 그들은 신유승이 테이밍할 수 있는 ‘괴수종’이 아니었다. ‘이계의 신격’에겐 그런 친절한 생물 계통이 지정되지 않으니까. 그들은 그저 시나리오의 바깥에서, 쓸모를 잃어버린 무엇이었다. 그럼에도 신유승은 그들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유승유승유승유승유승유승】 【나도이름나도이름나도이름나도이름】 이 아이는 저 말들을 들을까. 저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저들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계속 보니까 귀여운 거 같기도 해요. 그리고······.” 문어처럼 작은 촉수들이 신유승의 손등을 강아지풀처럼 간지럽혔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도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적이 있거든요.” 순간 찡, 하고 짧은 두통과 현기증이 동시에 몰려왔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강제로 발동합니다!] 「어쩌면, 혹시 이번에도 있을지 모르니까.」 결연한 눈으로 요괴들의 대열을 보는 신유승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나리오를 진행 중이신 성좌님들께 알립니다.] 갑작스런 방송이 흘러나왔다. 주변의 대기가 흔들리고, 요괴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온다온다온다온다온다】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곳곳에서 끓어 오르는 ‘이계의 신격’의 비명들. 허공에 투명한 형태로 강림한 대도깨비의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슬슬 「서유기 리메이크」 시나리오도 종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상위권과 중위권의 점수 차이가 많이 벌어진 상태라, 많은 성좌님들께서 시나리오를 반쯤 포기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불길한 서두였다. [<스타 스트림>의 기회는 공평합니다. 노력하는 미꾸라지는 용이 될 수 있고, 창공을 지배하던 드래곤도 추락할 수 있습니다.] 잠깐이지만, 대도깨비의 시선이 우리를 향한 것도 같았다. [그러니 이대로 끝내기엔, 역시 조금 아쉽죠.] “어? 뭐야!” 이지혜의 외침과 함께, 주변의 정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환한 빛살과 함께, 일행들과 요괴들은 어느새 거대한 강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설화방이 통합됩니다!] [『은퇴한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가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손오공은 이 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통천하(通天河)의 서쪽 기슭. 이곳은 천축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대도깨비가 웃었다. [단순히 득표수만으로 1등을 결정하는 것은 재미가 없지요. 어떤 ‘설화’가 더 강한지를 가리는 것은, <스타 스트림>의 당연한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다수의 관객들이 환호하며 동의합니다!] [소수의 관객들이 입맛을 다십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도깨비의 개입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메시지와 함께 강변의 곳곳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번쩍였다. [421번 설화방이 통합되었습니다!] [『내 손오공은 어디서부터인지 잘못되었음』이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그곳에, 우리와 같은 일행들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이길영이 외쳤다. “뭐야 저것들은!” 손오공, 삼장법사, 저팔계, 사오정, 그리고 용마로 구성된 일행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설화방에서 온 서유기 원정대였다. [7133번 설화방이 통합되었습니다!] [『손오공인 줄 알았는데 평범한 원숭이였다』가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6523번 설화방이 통합되었습니다!] [『전지적 손오공 여의봉 시점』이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쏟아지는 빛줄기와 함께 무수한 ‘손오공’들이 강변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격이 약한 이들도 있었고, 강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1번 설화방이 통합되었습니다!] [『진(眞) 서유기』가 ‘거대 설화’에 포함됩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격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초정예 성좌들로 구성된 설화방. 눈에서 새파란 귀화(鬼火)를 흩뿌리는 랭킹 1위의 손오공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페이후 쪽은 우리에게 득표수에서 밀리게 될 테니까. [일부 심사위원들이 당신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전개에 분개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시나리오의 결말을 궁금해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다 쓸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심지어는 주요 심사위원들도 우리 측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상황. 저쪽에서도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수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메인 시나리오의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대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유기 리메이크」의 마지막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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