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433화
홍삼을 달인 것 같은 깊은 씁쓸함이 입안 가득히 퍼졌다.
나도 모르게 냠냠 입맛을 다시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정신 차릴 것 같은데? 이것도 좀 넣어 봐요.”
누군가가 내 눈꺼풀을 강제로 벌리더니 안약 같은 것을 넣었다.
싸아한 느낌이 안구 가득히 번지며, 갑자기 정신이 번쩍 깨었다.
[새로운 영약의 섭취로 화신체의 회복이 빨라집니다.]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나는 말의 배 위에 누워 있었다.
푸르릉, 하고 거친 숨을 뱉어내는 삼장 법사의 백마― 키메라 드래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 일어났다!”
걱정스럽던 이길영과 신유승의 얼굴이 밝게 펴지는 것이 보였다. 내 눈꺼풀을 강제로 벌리고 있던 이지혜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버스도 못 탈 만큼 허약하면 어떡해?”
“흠흠, 스승을 보필해야 할 녀석이 이렇게 약골이어서야 되겠느냐?”
이길영이 허리춤에 손을 척 얹은 채 헛기침을 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상체를 일으키는데, 신유승이 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갑자기 쓰러지셔서······.”
“덕분에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영약들은······.”
나는 주변에 놓인 영약의 잔재들을 바라보았다.
몇 개는 낯설었지만, 내가 아는 것도 있었다.
붉은 병에 든 안약. 그것은 삼화구자고(三花九子膏)라는 안약으로, 황풍마왕과의 격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서유기의 보물이었다.
나는 조금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이걸 제게 쓰신 겁니까?”
생긋 웃는 신유승의 표정에서 한순간 유상아가 보였다.
삼화구자고. 그저 눈에 넣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활력을 돋구고 안력을 확장시키는 영약.
[일부 심사위원들이 원작의 반영에 만족합니다!]
[가산점 1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이 ‘삼화구자고’를 사용하는 것은 손오공이다.
하지만······ 본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나에게 주다니. 어쩐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문득 오른쪽 손목이 저려와서 돌아보니 그곳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약해 빠진 건 그놈과 똑같군. 화신체가 왜 이 모양인 거지?”
유중혁이 내 오른 손목을 터트려버릴 듯 쥔 채 맥을 짚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설화를 제외하면 이 녀석이 제일 의술에 뛰어나긴 하다.
유중혁은 인상을 잔뜩 쓴 채 나를 진단했다.
“오장육부의 혈도가 멀쩡한 게 하나도 없군. 시나리오에 참가한 게 용한 상태다.”
“······그렇습니까.”
“성좌가 이런 꼴이 되는 것은 드물 텐데. 네놈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건가?”
나는 놀라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내가 걱정되어서 이런 질문을 할 턱은 없고······ 아까부터 한쪽 손으로 [흑천마도]의 손잡이를 꾹 쥐고 있는 걸 보니 목적은 명백해 보였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이번 ‘거대 설화’가 급해서 미처 화신체를 돌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일행들에게 짐이 되면 그 자리에서 참할 것이다.”
유중혁이 내 손목을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운 영약만 버렸군.”
성큼성큼 멀어진 유중혁은 인근의 바위에 앉아 다시 [흑천마도]를 닦기 시작했다. 한 번 부러진 칼이다 보니 금세 내구도 손상이 상당히 진행된 듯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지혜가 말했다.
“우리 사부 아니, 사형 멋있지? 말은 저렇게 해도 당신한테 영약 주자고 한 사람이 저 사람이야.”
······저 유중혁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놈은 내가 ‘빛과 어둠의 감시자’가 아니라 ‘김독자’였다고 해도······.
―저놈도 네놈 생각만큼 냉혈한은 아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만두 [999]의 목소리.
「“아직도 몇 편의 글줄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또한 [999]의 말이었다.
그 말이 맞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그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은 언제나 그의 이야기보다 크다는 것을.
「유중혁은 언제나 동료들의 뒤에 있었다.」
‘멸살법’엔 수많은 문장들이 있지만, 그것이 유중혁이 보낸 시간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3회차, 4회차, 5회차······ 유중혁은 언제나 저만큼 떨어진 자리에서 동료들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을 보호했고, 적들과 맞섰다.
「“유중혁,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지켰나?”」
언제나,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그의 다짐이 어떤 것인지, 아마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칼을 가는 유중혁에게 신유승이 다가갔다.
“중혁 아저씨.”
유중혁이 특유의 무심한 눈길로 고개를 들자, 아이의 작은 손이 유중혁의 뺨에 닿았다. 자세히 보니, 유중혁의 볼에 투명한 크림 제형의 연고가 발려 있었다.
“······무슨 짓이지.”
“덧나니까 가만히 있어요. 아, 고개 돌리지 마세요!”
“이런 것 따위 바르지 않아도······.”
간지럽힘이라도 당하는 맹수처럼 유중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녀석을 제지한 것은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설화 언니가 꼭 부탁했어요. 아저씬 이런 거 신경 안 쓰니까 옆에서 챙겨 줘야 된다고.”
이설화의 이름에 유중혁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유중혁은 어정쩡한 자세로 다시 엉덩이를 바위에 붙이더니,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10초 안에 끝내라.”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신유승은 신나서 연고를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입술을 열심히 움찔거리면서도 딱히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신유승의 손이 스친 곳마다 유중혁의 상처들이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역시 이설화의 연고가 대단하긴 하다. 원작에서는 [양산형 제작자]가 저 연고를 수입해 아예 화장품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순백 설화 크림이었나.
“이글이글.”
오랜만에 의태어가 곁에서 들려오길래 돌아보니, 말 그대로 이글거리는 눈빛의 이길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길영의 눈동자가 사시라도 생긴 것처럼 유중혁과 신유승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오호라.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듯, 이길영이 거친 걸음걸이로 유중혁과 신유승을 향해 다가갔다.
“야, 신유승!”
그 외침에 유중혁과 신유승이 동시에 이길영을 올려다보았다.
내 곁에 붙어선 이지혜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래, 길영아. 드디어 각성했구나.”
[심사위원, ‘석가의 후계’가 어린 삼장들을 좋아합니다.]
[일부 관객들이 귀여운 삼장들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가산점 20점이 추가되었습니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이길영은 쏟아지는 시선 앞에서 입술만 뻐끔거렸다. 막상 저지르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이길영이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독자 형 연고는 내가 발라줄 거다!”
그제야 자신이 할 말을 깨달았다는 듯, 이길영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지금 넌 저 시커먼 놈 줄 잡은 거야!”
어느새 달려간 이지혜가 이길영의 뒤통수를 갈겼고, 이길영은 그대로 바닥에 코를 박고 엎어졌다.
“거기서 김독자가 왜 나와 멍청아!”
이지혜가 이길영의 귀를 잡아끌고 훈계를 시작했다.
그런 이길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연고를 바르는 신유승.
그리고 뺨에 묻은 연고가 어색한 듯 몇 번이나 뺨을 문지르는 유중혁······.
「김독자는 그 모든 풍경을 가만히 웃으며 바라보았다.」
[‘제4의 벽’이 조금씩 두꺼워집니다.]
「마치, 먼 곳의 정경을 바라보듯이.」
품속에서 꺼낸 스마트폰이 멋대로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위로 떠오르는 문장들, 그리고 일행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어쩌면 그 순간, 김독자는 처음으로 뭔가를 결심했다.」
*
이계의 신격화는 점점 더 빨라졌다. 71%였던 것이 어느덧 75%가 되었고, 다시 80%를 넘어서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런데 85%를 넘어설 즈음에 이르러, 상승 속도는 갑자기 정체되기 시작했다.
모두, 일행들이 챙겨준 영약 덕분이었다.
“자, 이것도 먹고. 그리고 이것도.”
내 감염 속도에 반비례하듯, 일행들의 클리어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과연, 역시 94번 시나리오의 유중혁과 이지혜 콤비는 대단했다.
“사형 저쪽!”
“아래다.”
[파천검도]의 사제 관계 답게,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대부분의 적들은 채 접근하거나 흉계를 꾸미기도 전에 아작이 났고, 심지어는 원작의 상성을 뛰어넘는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릴 때도 있었다.
[현재 서유기 진행도 : 43%]
[설화방 랭킹이 상승했습니다!]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21위입니다.]
[다수의 관객들이 ‘패왕 저팔계’를 연호합니다!]
[심사위원 ‘금신나한’이 미소녀 검객이 된 자신의 모습을 흐뭇해합니다.]
졸지에 나처럼 할 일이 없어진 신유승이 중얼거렸다.
“희원 언니랑 현성 아저씨도 같이 왔음 좋았을 텐데.”
정희원과 이현성은 함께 오지 못한 듯했다.
아직 이현성은 깨어나지 못했겠지. [강철화]의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으니 꽤 오래 잠들어 있을 법도 했다. 하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깨어난 다음부터니까.
여하튼, 이 기세라면 열흘도 안 돼서 시나리오가 끝날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현재 서유기 진행도 : 64%]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15위입니다.]
[상당수의 경쟁자들이 해당 설화방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내가 한 일은 버스를 타고, 늘어지게 잠을 자고, 일행들과 잡담을 나누고, 영약을 엄청나게 처먹은 것이 전부였다.
[당신의 화신체가 눈에 띄게 회복되었습니다!]
[당신의 화신체에 조금씩 활력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볼에 살이 좀 오른 것 같았다.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내 모습을, 이지혜와 신유승 그리고 이길영이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포동포동하게 자라난 돼지를 보며 기뻐하는 농부들처럼.
“이것도! 이것도 먹어!”
“여기 더 드세요.”
······대체 내가 먹는 걸 왜 저렇게 기뻐하는 걸까.
곁에서 이지혜가 푸념하며 웃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잘 먹는 거 보니까 보기는 좋네. 그 인간도 당신처럼 잘 먹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간은 또다시 흘러갔다.
“크윽! 두고 보자 저팔계!”
몇 번인가 다른 배역으로 등장한 한명오를 만나기도 했고.
신선처럼 수염을 기른 정체불명의 조력자를 만나기도 했다.
[흠흠, 나는 이 산의 신령이다. 그대들이 천축을 향한 숭고한 여정에 올랐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그대들을 기다렸다가 약간의 도움을 주기 위해······.]
환한 금발 머리에 덕지덕지 수염을 붙인 녀석을 향해, 아이들이 외쳤다.
“하영 언니!”
“하영이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