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431화
이후의 시나리오는 무난하게 전개되었다.
아무래도 저팔계의 공이 컸다.
[현재 서유기 진행도 : 24%]
본래 『서유기』는 총 81개의 역경을 물리치는 14년에 달하는 여정이지만, 원작 자체가 구전으로 보태진 설정 위에 쌓아 올린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정도 변용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직 사오정도 안 만났는데 이야기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고 보니 사오정은 누굴까.
“크아악!”
마침 눈앞에서는 막간 이벤트로 나타난 산적들이 유중혁의 [흑천마도]에 목이 달아나고 있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저팔계’의 잔학함에 불만을 갖습니다!]
[관객들이 서유기의 사이다에 맛을 들입니다!]
[가산점 10점이 추가됩니다.]
본래 ‘서유기’에서도 저팔계와 손오공은 인간형 악당들을 자주 죽인다. 그것 때문에 ‘삼장법사’에게 훈계를 듣기도 하고, 심하게는 파계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삼장법사의 꼬장꼬장함을 발암으로 여기는 독자들도 무척 많았다.
“중혁 아저씨. 저 사람들은 살려 주는 게······.”
[일부 심사위원들이 원작의 반영에 만족합니다.]
[다수의 관객들이 삼장의 귀여움에 취합니다.]
[가산점 20점이 추가됩니다.]
역시 같은 역할도 누가 맡느냐에 따라 다른 모양이었다.
유중혁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산적 대장이 분한 듯 소리쳤다.
“크으윽! 저팔계 따위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놀랍게도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곁에서 아이들이 소곤거렸다.
“명오 아저씨 불쌍하다.”
[외발 준족]을 발동하며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나는 한명오 부장이 이쪽을 보며 찡긋 윙크를 했다.
설마 그 ‘한명오’가 이곳에 참가한 플레이어 중 하나였을 줄이야.
아마도 한명오는 멀티맨 역할로 참가하여 잡졸 대장들의 역할로 출연하는 모양이었다. 멀어지는 한명오를 보며 신유승이 작게 중얼거렸다.
“희원 언니가 괜찮댔어.”
가볍게 [흑천마도]를 닦으며 돌아오는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유독 칼의 중심부를 신경 써서 닦았다. 자세히 보니 그 위치에 실금이 가 있었다.
유중혁의 [흑천마도]는 지난 ‘성마대전’의 전장에서 부러졌다.
[진천패도]에 이어 벌써 두 번째로 부러진 검.
내색은 하지 않아도 속이 무척 쓰릴 것이다.
‘서유기’에서 새로운 무기를 얻어가면 좋을 텐데······.
녀석에게 적합한 무기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손오공의 여의금고봉은 유중혁에게 익숙한 무기가 아니고, 저팔계의 상보심금파도 녀석의 취향이 아니다. 사오정의 항요보장은 말할 것도 없고······.
생각에 잠긴 내가 의심스러웠는지, 유중혁이 툭 던지듯 말했다.
“다행히 나대지는 않는군.”
(해석 : 사형!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나는 허공의 내레이션을 노려보았다.
저건 또 뭐지?
“앞으로도 그렇게 가만히만 있어라. 그럼 죽이지는 않겠다.”
(해석 : 후후, 사형. 걱정 마십시오. 이 한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당신을 지키고 말 테니까.)
나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니, 진짜로 저딴 의미일 리가 없잖아.
그리고 유중혁은 ‘후후’하고 웃지 않는다고.
한수영 이 자식······
[상당수의 관객들이 저팔계의 속마음에 크게 감동합니다!]
[상당수의 관객들이 저팔계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관객 하나가 코인을 후원하고 싶어합니다.]
[심사위원, ‘정단사자’가 크게 만족합니다!]
[가산점 5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훌륭한 작가 같으니라고.
(여정은 제법 평화로웠다. 손오공은 생각했다. 이것이 ‘은퇴한 삶’이라는 것인가.)
아무튼 유중혁과의 신경전을 제외하면 여정은 순탄했다.
간혹 나오는 요괴들이나 산적들은 내 눈에 띄기도 전에 아이들이나 유중혁이 해치워버렸다.
“어이, 구원의 마왕. 편하지?”
“예, 사부님들 덕분입니다.”
내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구원의 마왕’ 타령을 듣는 것은 전부 한수영 때문이었다.
[SSSSS급 손오공이 되었다]에는 손오공이 과거에 ‘구원의 마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는 괴이한 설정이 있다. 대체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관객들이 ‘구원의 마왕’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가산점 10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아니, 알 것도 같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시비걸지 마, 멍청아.”
“그게 아니라, 쟤도 밥값은 해야지. 몸은 놀아도 머리는 열심히 굴려야 한다고 독자 형이 그랬어.”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몸이 놀 때는 머리도 놀아야 한다.
이길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쓸 만한 정보 좀 뱉어 봐. 넌 설정상 인생 2회차 손오공이잖아. 숨겨진 영약 같은 거 아는 거 없어?”
“······음, 몇 가지 알고는 있습니다.”
실제로 ‘서유기’에는 제법 쓸 만한 영약이 몇 가지 등장한다.
손오공이 먹은 [반도(蟠桃)]라든가, 여정 도중에 얻게 되는 [인삼과(人蔘果)] 또한 그중 하나다.
“가장 좋은 영약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뭐? 어디?”
나는 말없이 이길영을 바라보았다.
“어디! 빨리 말해!”
내가 채 설명하기도 전에 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본래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는 요괴들에게 수십 번이나 납치를 당하는데, 그것은 삼장법사를 먹으면 천계로 승천할 수 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장법사는 무려 10번의 환생을 거친 부처님의 제자, 즉 금선자(金蟬子)의 환생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입이 점차 벌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 사부님이 ‘서유기’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영약일 겁니다.”
이길영과 신유승이 흠칫하며 서로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그러더니 서로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야 신유승, 넌 손가락 하나쯤 없어도······.”
“넌 목 위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으르렁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어깨 위의 만두가 말을 걸었다.
―얼빠진 웃음이나 지을 때가 아니다. 영약이 필요한 건 저들이 아니라 네놈이니까.
그 말과 함께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이계의신격화 진행률 : 48%]
······소름 돋을 정도로 동화 속도가 빨랐다.
서유기의 진행 속도보다 이쪽이 더 빠를 줄이야.
―네놈의 화신체 회복률이 낮아 동화 속도가 빠른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네놈이 몰래 <김독자 컴퍼니>와 협업하는 것도 예정에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혹부리 왕이 무섭긴 무섭다. 하긴, 평생을 도깨비 왕과 싸워온 녀석이니까. 어쩌면 놈은 여기까지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화신체를 눈여겨 보던 [999]가 말했다.
―남은 시간은 사흘 정도다. 너는 그 안에 약속을 완수해야 해.
‘무리야. 약속을 지키려면 이 시나리오를 끝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고.’
혹부리 왕과의 약속은 ‘이계의 신격’이 포함된 거대 설화를 만드는 것.
나는 이번 거대 설화를 통해 그걸 완수할 계획이지만, 사흘이란 시간은 너무 촉박했다.
적어도, 이주일 이상은 필요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군. 네놈의 허약한 화신체를 보강하는 수밖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화신체의 상태를 점검했다.
[현재 화신체 회복률 : 45%]
[현재 근원 설화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새로운 영약의 섭취를 통해 회복을 가속할 수 있습니다.]
이계의 신격화가 빨라지고 있는 것은 내 화신체가 아직 ‘성마대전’에서의 타격을 회복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설화 파편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현재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설화 모으기에 급급하여 화신체의 내구력 향상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워낙 잘 죽어 나가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것도 있고······.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만 해도 구한 지 한참이나 된 설화 파편이었다.
하지만 일권무적 유호성이 말한 것처럼, 설화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신체의 단련이 필요했다.
설화가 ‘글자’라면, 화신체는 그 글자가 펼쳐질 수 있는 ‘종이’니까.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약들은 아마 레플리카 버전일 것이다.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득표수 : 2963]
[현재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해당 설화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현재 다수의 관객들이 설화방의 성장세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해당 설화방의 랭킹은 31위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한수영이 만든 시나리오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함께 ‘개연성’을 감당하는 이야기에는, 그만큼 강력한 힘이 발생한다.
[설화방의 랭킹이 상승할수록, 해당 설화방에서 얻을 수 있는 성유물 및 아이템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이 방의 랭킹이 상승할수록 이 방에서 나오는 모든 아이템들은 한없이 원작의 그것에 가까워지며, 우승을 한다면 원작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즉, 이 설화방에서 얻은 모든 것은 ‘진짜’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대로 순조롭게 방의 랭킹이 올라간다면, 그리고 내가 무사히 영약들을 모으는데 성공한다면······.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잠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 해당 설화를 사용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나는, 기껏 얻은 후 한 번도 개방하지 못했던 이 ‘거대 설화’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빛과 어둠의 계절’을 두려워합니다.]
무려 「신화를 삼킨 성화」조차 두려워할 정도의 설화. 대체 이 설화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지금의 나로서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멈춰라.”
앞서가던 유중혁의 걸음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방금 전까지 맑게 개어 있던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샛노란 안개가 전방의 땅과 하늘을 모조리 뒤덮고 있었다.
[황풍령(黃風嶺) 황풍동(黃風洞)에 도착했습니다.]
황풍령이라.
이곳은 서유기의 빌런 중 하나인 ‘황풍마왕’의 거처일 것이다.
내 예상대로라면, 이 인근에 내가 찾던 영약 중 하나가 있었다.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상당수의 플레이어들이 ‘설화방’에 참가합니다!]
본래 이 설화방의 플레이어 숫자는 8명이다. 그런데, 갑자기 추가 플레이어들이 유입된 것이었다.
이길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 이제 와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마감된 설화방에 추가적으로 유입된 플레이어들은, 모두 ‘엑스트라’의 역할을 맡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엑스트라 배역들은 그 설화방이 성공적으로 완수되더라도, 제대로 된 보상을 얻기 힘들다.
하물며 탑 10급의 설화방도 그럴진대, 31위의 설화방에 참가할 이유가······ 있다.
[소수의 관객들이 6731번 설화방의 순위 상승을 경계합니다.]
[일부 관객들이 당신들의 파멸을 기대합니다.]
[다수의 관객들이 설화방의 격변에 주목합니다!]
지금 우리 설화방은 최하위권에서 단숨에 상위권으로 도약한 상황.
표정이 굳어진 유중혁이 말했다.
“시나리오를 망치려는 놈들이다.”
누구의 사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상이 가는 쪽은 있었다.
아마 이번 ‘서유기 리메이크’에 참가한 거대 성운들, 그리고 최상위권 설화방의 세작(細作)들일 것이다.
이번에도 <김독자 컴퍼니>가 ‘거대 설화’를 차지하게 된다면, 스타 스트림에 벌어질 일이 두려운 거겠지.
쿠구구구구!
순식간에 덮쳐온 안개가 일행들을 삼켰다.
뒤쪽을 돌아보며 경고성을 발한 유중혁의 신형이 먼저 안개에 덮였고, 놀란 신유승과 이길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자님! 내 뒤로 숨어요!”
“뒤로 물러서서 다가오지 마! 알겠―”
대답할 틈도 없이, 아이들 역시 사라져버렸다.
안개는 아슬아슬하게 내 코앞에서 멈춰 섰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병장기 소리.
어깨 위의 만두가 물었다.
―안 들어갈 건가?
“들어가고 싶지만······.”
나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며 말했다.
“······아무래도 목적은 나인 것 같은데.”
돌아보자, 황풍령의 비탈길을 넘어오는 엑스트라들이 보였다.
황풍마왕의 수하로 분장한 성좌들이 이쪽을 향해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접근하고 있었다.
“저놈이 그 ‘손오공’인가?”
“느껴지는 격만 봐도 약골이로군.”
“약골을 섭외해 놓고 ‘구원의 마왕’의 별명을 붙여 놓으면 무서워할 줄 알았던 모양이지?”
그제야 나는 이 녀석들의 진짜 목적을 알 것 같았다.
결국 「서유기」의 주인공은 ‘손오공’.
‘손오공’이 죽으면, 서유기는 끝난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당신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일부 관객들이 당신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다가오는 성좌들을 보며 나는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은퇴한 손오공은 싸우기가 싫었다. 왜냐하면 귀찮았으니까.)
[‘은퇴 패널티’로 당신의 전의가 급감합니다.]
모두 저 빌어먹을 ‘은퇴’ 설정 때문이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귀찮은 듯 귀를 후빕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고상한 얼굴로 책을 펼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따분한 듯 하품을 시작합니다.]
『서유기』의 본편에서 하드 캐리에 지쳐버린 저 손오공들이, 이런 전개를 달가워할 턱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자비한 병장기를 빼든 엑스트라 성좌들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죽어라!”
(해석 : 하핫, 탈모 원숭이 죽어라)
“죽어라!”
(해석 : Fuc■! 천계의 똥이나 치우는 새■가)
“죽어라!”
(해석 : 돌■가리 원숭이)
저게 어떻게 저렇게 해석되냐고 태클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채널의 메시지가 폭발했다.
[심사위원,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머리털을 쥔 채 분개합니다!]
[심사위원, ‘필마온’이 불결한 이야기에 진저리를 칩니다.]
[심사위원, ‘미후왕’이 저놈들의 목을 모두 따버리길 원합니다.]
[일부 심사위원들이 설화방의 전개에 강력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만약 이 이야기의 향방이 바뀐다면 대량의 가산점이 제공될 것입니다.]
······엥?
[시나리오 마스터의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너 싸움 좀 한댔지?”]
내가 대답할 틈도 없이, 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몰려오는 요괴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분명 그는 ‘은퇴한 손오공’이다. 하지만.)
(그는, 힘을 숨기지 않는 손오공이다.)
밀려오는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 새로운 에피소드의 제목이 떠올랐다.
~ Episode 3. 구원의 마왕은 힘을 안 숨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