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화

430화 날끝을 손오공에게 겨눈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마기를 풀풀 날리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 거라 생각한 거지? [전음]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전하는 말이다. 하지만 손오공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손오공의 어깨 위에 있던 무림 만두였다. ―[흑천마도]는 좋은 칼이지. 목소리에 묻어나는 세월의 깊이에, 유중혁의 칼날에 희미한 강기가 더해졌다. 눈을 뜬 무림 만두가 초월의 힘이 어린 [흑천마도]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그런 부러진 칼로 나를 벨 수 있을까? 실제로 [흑천마도]의 중심에는 희미한 실금이 가 있었다. [도깨비 보따리]에서 판매하는 수리 도구로 때워 놓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임시 조치에 불과한 수준. 한 번 부러졌던 [흑천마도]는 이제 본래 기량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유중혁이 말했다. ―지금 당장 확인해 볼 수도 있겠지. ―그런 식이니 ‘은밀한 모략가’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라는 말에 유중혁의 짙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어둠 속에서 무림 만두의 형상이 조금씩 뭉개지며, 유중혁 [999]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작은 미니어쳐처럼 생긴 유중혁 [999]. 유중혁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너는 그놈의 권속인가? 무슨 목적으로 온 거지? ―지금의 너는 결코 ‘은밀한 모략가’를 꺾을 수 없다. ―그딴 헛소리를 전하러 온 거라면······. ―몇백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다. 마치 네놈의 한심한 회귀와 같지. 알고 있을 텐데? [흑천마도]의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한수영과 정희원의 힘을 이어받고도 꺾지 못했던 적. 다시 만난다고 해서,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마치 그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유중혁 [999]가 말했다. ―3회차의 유중혁. 네놈은 ‘은밀한 모략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 오래된 잠. 그것은 아직 그가 유중혁(劉衆赫)이라 불리던 시절의 꿈이었다. 0회차부터 1863회차까지.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로서, 수없는 목숨을 반복하며 싸우고 또 싸웠던 시절의 이야기. [······어리석은 꼭두각시여. 네놈은,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마침내 도달한 1863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동료를 잃었다. 해상전신 이지혜. 비스트 로드 신유승. 강철검제 이현성. 의선 이설화. 망상악귀 김남운.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 파천검성 남궁민영. ······여동생, 유미아. 많은 동료만큼이나 많은 적들이 있었다. 십악 공필두, 안나 크로프트, 란비르 칸, 페이후······. “말했잖아. 네놈 편은 안 한다고. 그렇지만······.” 어떤 적들은 끝까지 그와 대적했고. “어쩌면 이번 회차가 그대의 마지막이 되겠군요.” 어떤 적들은, 그의 성공을 깨닫고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최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철혈의 패왕’이여.] 그의 맹우로 싸워주었던 ‘긴고아의 죄수’ 제천대성. [내가 그대를 돕는 것은 <스타 스트림>이 더 큰 악이기 때문이다.] 마지막만큼은 그의 동맹이 되어주었던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우리엘. [······본좌는 화신의 복수를 하는 것뿐이다.] 김남운의 복수를 위해 그의 편에 서 주었던 ‘심연의 흑염룡’. 【어 리 석 은 성 좌 들 아······.】 몰아치는 이계의 신격들의 파도를 꿰뚫으며,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달려드는 촉수의 무리를 베고, 외신들이 내뿜는 어마어마한 격에 맞섰다. 하늘의 별들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위대한 성운의 빛무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올림포스>, <베다>, <아스가르드>······. 하나의 시대가 끝나가는 소리와 함께, <스타 스트림>의 하늘은 추락하는 유성우로 뒤덮였다. 한반도의 성좌들도 죽어갔다. 고려제일검과 해상전신이 마지막까지 분투했으나, 그들 역시 죽음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유중혁의 전우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스운 삶이구나.] 가장 먼저 ‘심연의 흑염룡’의 목이 잘렸고. [······가브리엘······ 미안하다.] 이어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날개가 꺾였다. 하지만 그즈음에 이르러서는 ‘이계의 신격’ 또한 다수가 절멸한 상태였다. 마지막 결정타를 날린 것은 제천대성이었다. [저곳이 모든 이야기의 끝이로군.] 거대한 여의봉. 수만 개의 분신으로 화한 제천대성은 자신의 모든 설화를 걸어 길을 뚫었다. 황금빛 설화로 흩어지며 제천대성이 말했다. [너의 이야기를 완성해라, 패왕 유중혁.] 그 길을 달리던 순간을 유중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0회차부터 쉴 새 없이 달려왔던 자신의 삶이 완성되는 순간. 스걱. 외신의 머리가 허망히 떨어졌고. 【후 회 만 이 너 를 살 게 할 것 이 다.】 그 저주가, 유중혁의 ‘결’을 완성했다.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가 본연의 의미를 완성합니다!] [당신의 마지막 거대 설화가 ‘결(結)’을 완성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의 마지막 조건이 완수되었습니다!] 모든 존재가 사멸한 전장 위에, 남은 것은 유중혁뿐이었다. 모든 죽음을 거름삼아 도달한 결. 그 오랜 싸움 끝에 유중혁이 원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이 빌어먹을 회귀의 끝을 보는 것.’ 오직 그것을 위해 그는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 ‘너머’로 가는 것을 막아선 벽이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란 사실이다.」 벽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유중혁은 ‘도깨비 왕’을 만났다. [불행한 꼭두각시여. 그대는 너무 빨리 왔습니다. 미안하지만 이 너머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중혁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도깨비 왕을 협박해보기도 했지만, 도깨비 왕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 말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당신은 이 우주를 완성할 수 없습니다.] 유중혁이 가진 어떤 힘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 유중혁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너머에, 내가 알고 싶었던 해답이 있다.’ 하지만 하늘을 부수고 별을 부순 그의 [파천검도]로도, 그 벽을 부술 수 없었다. 마치 그 벽에는 ‘부서짐’이라는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유중혁은 절망했다. 모든 것을 잃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 벽 너머로 갈 수 없다고? [당신의 ‘결’이 당신을 새로운 존재로 인도합니다.] 더 강해져야 했다. 더 많은 설화가 필요했다. 이 ‘벽’을 부수고, 그 너머로 나아갈 동력이 필요했다. [당신은 ‘이계의 신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중혁은 ‘이계의 신격’이 되었다. 자신이 살아온 무수한 세계선들을 부유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유중혁이 아니게 되었다. 외신들은 이야기의 우주를 떠도는 그를 경외했고, 다른 세계선의 도깨비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혹부리들은 그를 좋아했다. 공포의 기록자들 중 하나가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벽을 넘어선 여정을 꿈꾸는 위대한 모략······. ‘은밀한 모략가’시여. 0회차, 1회차, 2회차······ 1863회차. 셀 수 없이 많은 세계선들을 떠돌며, 그는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들을 되새겼다. 많은 설화들을 얻었지만, 세계선 여행에 지불한 개연성으로 인해 결국 힘은 원점이었다. 대신 그는 지금까지의 회귀만으로는 알지 못했던 무수한 정보들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회귀의 원흉인 그의 배후성. ‘가장 오래된 꿈’. ‘은밀한 모략가’는 그 존재를 찾아 세계선을 헤매고 또 헤맸다. 한때는 <에덴>에서 그의 흔적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했고, 또 <베다>에서 그 기록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실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은밀한 모략가’는 확신했다. 그가 최종 시나리오에서 보았던 ‘최후의 벽’. 그 벽 너머에, 분명 모든 것의 해답이 있다고. 하지만 그 많은 세계선을 뒤져도 벽을 넘어갈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희망은 조금씩 메말라 갔다. 1863회차의 회귀도 꺾지 못했던 그의 의지도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잠들기를 수도 없이 꿈꾸었다.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그토록 찾아왔던 안식을······ 구할 수만 있다면. 눈부시게 빛나는 하나의 행성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은밀한 모략가’도 알고 있는 행성이었다. 제 8612 행성계, 지구. 이 모든 시나리오가 시작된 비극의 장소.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세계선을 감싼 낯선 감각이 그의 뇌리를 찔러왔다. ‘······이런 회차가 있었던가?’ 그리고 그곳에서, ‘은밀한 모략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존재를 목격했다. . . . ‘은밀한 모략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서늘한 어둠으로 뒤덮인 ‘은가이의 숲’. 차갑게 식은 공기 사이로 ‘은밀한 모략가’의 새카만 호흡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그의 곁에는 꼬마 유중혁 [41]이 있었다. “악몽을 꾸었군. 이미 결을 본 그대조차 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 【······나 역시 여전히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으니까.】 츠츳, 츠츠츳. 과도한 개연성 소모로 인한 후유증일까.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에 옅은 스파크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던 [41]이 말했다. “역시 1863회차의 이야기가 바뀐 것이 컸던 모양이군.” 【······용건은?】 “[999]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그 말에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뭔가를 읽고 있는 듯 심오한 빛이 그의 망막을 스쳐 가더니, 이내 입이 열렸다. 【[999]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연락이 끊겼다는 것은······.” ‘은밀한 모략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41]이 희미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을 보낸 게 잘못이었군. 차라리 나를 보내라. [999]는 너무 유약해.” 【그는 약하지 않다.】 999회차의 일을 복기하는 듯, ‘은밀한 모략가’의 눈동자에 희미한 설화의 잔재가 스쳐 갔다. 【운이라곤 해도, [999]는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결’의 언저리까지 다가갔었다. 그의 경험이 있었기에 나 또한 ‘결’을 볼 수 있었다.】 그러자 [41]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스스로 ‘결’을 포기했던 유중혁이기도 하지. 잘 생각해라. 놈이 이번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상관없다. 그 또한 유중혁이니까.】 ‘은밀한 모략가’의 심원한 눈동자가 ‘은가이의 숲’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 【그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41]은 ‘은밀한 모략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은밀한 모략가. 이 모든 우주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온 유중혁. <스타 스트림>의 그 누구도 그의 슬픔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대가 원하는 바라면.” 설령, 그것이 같은 유중혁이라 해도. * [5분 뒤 시나리오 점검이 종료됩니다.] [곧 채널이 재개방됩니다.]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메시지를 들으며, 두 명의 유중혁이 대치하고 있었다. 먼저 씁쓸한 미소를 지은 것은 [999] 쪽이었다. ―보아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당연한 일인가. 아무것도 모른다. 그 말이 유중혁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놈도, 저놈도 모두 하는 말이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중혁’. 대체 그가 뭘 모른단 말인가. 분노를 삼키듯, [흑천마도]의 칼날이 손오공 쪽을 향해 미미하게 움직였다. ―꿍꿍이나 말해라. 여긴 왜 온거지? 저 손오공도 네놈과 한패인가? 그 위협에 손오공 쪽을 돌아보던 [999]가 말했다. ―이놈은 ‘이계의 신격’이 아냐. 그냥 서로 이용하는 관계일 뿐이다. ―그럼 둘 다 죽여도 상관없겠군. 그러자 슬그머니 손오공을 가리듯 선 [999]가 말했다. ―이번 회차를 포기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겠지. ―무슨 헛소리지? ―이 녀석과 함께 ‘서유기 리메이크’를 완성해라. 그러면 네게 ‘은밀한 모략가’를 이길 방법을 알려주마. ―그 말을 어떻게 믿고······. 그와 거의 동시에 [999]의 몸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존재 맹세]. 유중혁의 눈동자가 동요로 흔들렸다. ―내가 수백 번을 회귀해도 이길 수 없을 거라 말한 건 네놈이다. ―수백 번을 ‘회귀’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가볍게 뛰어오른 [999]가 [흑천마도]의 칼등에 올라섰다. 유중혁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999]가 한 걸음을 더 다가갔다. ―넌 지금까지의 네 삶이 지옥 같다 여기고 있겠지. 늘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했을 테니까. 흉흉한 설화가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유중혁은 흠칫 몸을 떨며 그 설화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한 사람이 살아온 영원의 악몽.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설화에 반응하듯, 광기를 머금은 [흑천마도]가 흔들렸다. 999번의 회귀를 거친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이 우주에 그런 지옥이 몇 개나 있을 거라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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