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420화
“······마지막 시나리오?”
정희원은 허공에서 깜빡이는 메시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마지막 시나리오’가 열린다고?
묵시룡의 시나리오는 89번 시나리오였다.
그럼 90번 시나리오가 마지막인가?
혼란스러운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방주’에 타고 있었던 다른 성좌들도 서로를 돌아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벌써 99번 시나리오가 열렸단 말인가?]
개중에는 도깨비 비형에게 항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무슨 수작이지? 아직 마지막 시나리오가 열릴 시간이 되지도 않았―]
[<김독자 컴퍼니>만 따로 데려가겠다는 거냐?]
비형은 그런 성좌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지막 시나리오 초청은 얼마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확히는 여러분들이 ‘묵시룡’을 깨운 그 시점부터 말이지요.]
그 발언에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몇몇 성좌들은 뭔가를 눈치챈 듯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외쳤다.
[그, 그럼 우리도 마지막 시나리오에 보내줘!]
[맞아! 우리에게도 자격이 있다!]
비형은 그런 성좌들을 달래듯 말했다.
[여러분은 제 관할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자격이 있다면, 곧 여러분을 모시고 떠날 도깨비가 찾아올 것이니 걱정 마세요.]
그러나, 전처럼 친절한 말투는 아니었다.
[물론, 여러분들에게 자격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죠.]
성좌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곧이어 방주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음 역은 8612 행성계입니다.
8612 행성계. <김독자 컴퍼니>의 고향인 지구가 있는 곳.
비형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듯,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자, <김독자 컴퍼니> 여러분은 모여주시죠.]
그 말에 한수영이 나섰다.
“아니 잠깐만. 우리 지난 시나리오 끝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거든?”
“우릴 지구로 보내줘요. 아직 다음 시나리오로 떠날 준비가 안 됐다고요.”
정희원도 가세했다. 하나둘 일행들이 모이고 있었다. 신유승도, 이길영도, 이지혜도······ 혼란스러운 얼굴인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비형이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김독자가 없으니 불편하군. 그놈이 있어야 한 번에 말귀를 알아듣는데.]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뭔데?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비형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입장권이 몇 장 안 남았어. 빨리 가서 선점해야 한다고.
그 말은 ‘도깨비 통신’을 통해 전달되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 도깨비가 비밀스레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은, 다른 성좌들에게 이 이야기를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입장권’이라니?
다음 시나리오엔 그런 게 필요하단 말인가?
머뭇거리는 일행들의 뒤에서 유중혁이 불쑥 나타났다.
“출발하지.”
“잠깐만요!”
정희원의 제지에도 유중혁은 완강했다.
“마지막 시나리오는 지역에 진입한다고 곧바로 시작되는 게 아냐. 지금은 저 녀석 말을 듣는 게 맞다.”
“그럼 현성 씨는······.”
“스승님께 맡겨 두었다.”
정희원이 다급히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한수영이 정희원의 어깨를 짚었다.
“······일단 가 보자.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유가 있는 거니까. 어쩌면 김독자도 미리 가 있을지 몰라. 확인해 볼 가치는 있겠지.”
‘김독자’라는 말에 일행들의 얼굴에도 굳은 결심이 섰다.
“저는 찬성이에요.”
“나도! 나도!”
신유승도, 이길영도, 이지혜도. 의결은 금방 끝났다.
정희원은 끝까지 이현성이 걸리는 듯했지만, 이어진 유중혁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에 간다면 ‘강철검제’를 빨리 회복시킬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럼 망설일 것 없어요.”
[자, 출발합니다.]
비형의 목소리와 함께 <김독자 컴퍼니>를 둘러싼 주변의 정경이 일제히 빛으로 화했다.
[시나리오 전송이 시작됩니다!]
상급 도깨비의 권한이 사용되었기 때문인지, 포탈 이동 시간은 안락하고 짧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행들은 새카만 우주의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
정확히는, 그 우주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반투명한 원반 위였다.
“여긴······.”
돔 형의 방어막으로 보호되고 있는 원반은 하나의 출입구와 이어져 있었고, 그 앞엔 몇몇 도깨비들이 서 있었다.
유중혁은 그런 도깨비들을 한 번, 출구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게이트 오브 스타 스트림>이다.”
“여기 알아?”
한수영의 질문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국의 본청이 있는 곳이다. 여기를 지나야 마지막 시나리오 지역으로 돌입할 수 있다.”
“와본 적 있나 보지? 「개연성 적합 심사」라도 걸렸던 거냐?”
“아니, 나도 처음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 1863회차의 기록에 나왔냐?”
“그건······.”
순간, 유중혁은 관자놀이를 쥔 채 비틀거렸다.
‘은밀한 모략가’를 통해 알 수 있었던 1863회차의 기록. 하지만 그 기록에, 이 시나리오와 관련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김독자가 따로 말해준 적도 없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어떻게 이 정보를 알고 있는가?
츠츠츳······.
희미한 스파크가 유중혁의 코트 위로 튀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이지혜가 유중혁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게이트의 인근에서 눈부신 빛살이 퍼지며 또 다른 성좌들과 도깨비들이 워프해왔다.
[성좌님들, 이쪽입니다.]
대도깨비들의 지휘 아래, 성좌와 화신들이 일사불란하게 그들을 스쳐 게이트로 나아가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를 지나친 대도깨비 중에는 얼마 전 그들에게 제안을 했던 ‘허체’의 얼굴도 보였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후회하게 될 거라고.]
스쳐가는 대도깨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수영과 유중혁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쉽게 게이트를 통과하는 대도깨비의 일행들과는 달리, <김독자 컴퍼니>는 아직도 게이트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출입구에 선 비형이 문지기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수속 절차는 모두 밟았을 텐데요. 이들은 ‘마지막 시나리오’에 입장할 자격이 있는 화신들입니다. 비켜 주시죠.]
영롱한 빛을 뿜어낸 게이트가 대도깨비 일행들을 모두 삼키는 순간, 대도깨비가 문지기 대장에게 뭐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한 비형이 앞으로 나서는데, 문지기 대장이 입을 열었다.
[상급 도깨비 비형. 당신과 <김독자 컴퍼니>는 마지막 시나리오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
어렸을 적, 나는 자주 유중혁이 되는 꿈을 꾸었다.
내겐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유중혁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꿈에서 깨어나서도 여전히 유중혁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다. 그것 때문에 맞은 적도 있고, 괴로운 일을 겪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유중혁’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대장, 빨리 다음 시나리오로 가자!”」
물론, 꿈에 등장한 것이 유중혁만은 아니었다.
꿈속에서 나는 용감한 이지혜와 함께였고.
「“장구류 준비 끝났습니다, 중혁 씨.”」
든든한 이현성과 함께였으며.
「“대장, 괜찮으세요? 안색이 나쁜 것 같은데······.”」
사려 깊은 신유승과 함께였다.
아마도, 그들이 내 가족이었다.
유중혁이 나의 부모였다면 이현성은 나의 형이었고, 지혜는 나의 누나였으며, 유승이는 나의 친구였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들의 싸움을 응원했고, 그들의 불행을 관음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음을 알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지금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유중혁의 얼굴이었다.
「“네놈 때문이다.”」
한순간 시야가 팽그르 돌더니, 나는 신음을 뱉으며 눈을 떴다.
“안색이 나쁘군. 괜찮은 건가?”
어쩐지 가슴이 무겁다 싶었는데, 꼬마 유중혁 [999]가 나를 짓밟고 서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진천패도]로 테이블의 컵을 낚아 내게 건넸다.
“마셔라.”
“······고맙다.”
차가운 물을 조금 마시고 나자 천천히 정신이 들었다.
[현재 화신체 회복률 : 36%]
미미하지만, 화신체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김독자 컴퍼니>.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로 떠날 시간이다.
어젯밤 [666]의 스마트폰으로 본 정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벌써 일행들에게 마지막 시나리오의 제안이 들어왔다. 여기서 미적거릴 시간 따윈 없었다.
“네놈은 언제든 나갈 수 있다. 스스로 해답만 찾아낸다면.”
“또 그 소리냐.”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꼬마 유중혁 [999]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싫어하는 음식을 말해라.”
“갑자기 왜?”
“닥치고 질문에 대답해.”
순간 조그만 녀석의 박력에 압도되어버렸다.
“······토마토.”
녀석은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더니 단정한 글씨로 ‘토마토’라고 썼다.
저건 대체 왜 적는 걸까.
“좋아하는 음식은?”
“······무림 만두랑 닭 국물.”
내 대답에 [999]의 표정이 바뀌었다.
“혀는 제법 쓸 만한 모양이군.”
확실히 세 치 혀로 지금까지 살아남긴 했지.
“요리 담당은 81회차다. 검술은 형편 없지만 요리엔 꽤 재능이 있지. 기대해도 좋을 거다.”
그러고 보니 81회차의 유중혁은 요리 스킬을 유독 많이 배웠다. 이곳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유중혁도 아마 그 녀석인 모양이었다.
메모를 마친 [999]는 훌쩍 침대에서 뛰어 내리더니 나를 일별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멍청한 손님이라도 어쨌든 손님이니까.”
“묻고 싶은 게 있어.”
“불필요한 질문만 아니라면.”
“유중혁은 왜 ‘이계의 신격’이 된 거냐?”
꼬마 유중혁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나는 질문을 계속했다.
“심지어는 ‘은밀한 모략가’라는 이름으로 성좌 활동까지 하고······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 녀석은―”
이곳에 있으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꼬마 유중혁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툭하면 시비 걸기 일쑤였고, 질문을 해도 제대로 된 답변을 받는 경우도 드물었다.
하지만 저 [999]라는 녀석은 달랐다. 지난번에 늑대 이야기도 그렇고, 저 녀석은 내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내 예감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네가 아는 유중혁은 대체 뭐지?”
미묘한 경멸이 담긴 목소리.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직도 몇 편의 글줄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대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999]는 한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테이블에 붙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네놈이 그렇게 책을 좋아한다니, 그걸 읽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 책은 네놈처럼 멍청한 인간들이 미지의 공포를 이해하기 위해 쓴 것이니까.”
[999]가 던진 것은 몇 권의 책이었다.
나는 그 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계의 신격에 관한 소고(小考)― ‘은밀한 모략가’와 ‘가장 오래된 꿈’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