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419화 머릿속으로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흘러갔다. “나는―”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징을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밀려온 메슥거림에 입을 막았다. 휘청거리는 나를 꼬마 유중혁들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이들을 알고 있었다.」 품속에서 환한 문장을 토해내는 ‘멸살법’의 최종본.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김독자?” 내 이상을 눈치챈 꼬마 유중혁들이 나를 불렀다. 생각을 멈춰야 했다.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생각을. [‘제4의 벽’이 격심하게 흔들립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낱장의 페이지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폭풍이라도 치듯, 페이지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내 모든 의식을 덮고 있었다. “······이봐?” 이윽고 시야가 캄캄하게 물들었다. * “그가 알게 된 것 같군.” 꼬마 유중혁 [41]이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곁에는 낡은 왕좌에 앉은 ‘은밀한 모략가’가 있었다. “혹시 일부러 힌트를 준 건가?”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소품까지 준비하며 연기한 보람이 없는 것 같은데.” 꼬마 유중혁 [41]이 ‘은밀한 모략가’의 백색 코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입고 있었던 백색 코트. 시선을 느낀 ‘은밀한 모략가’가 코트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연기는 아니지. 1863회차의 그 녀석은 본래 내 일부가 되었어야 했다. 너희처럼.】 “하지만 멋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지. 이 코트만 남긴 채 말이야.” 꼬마 유중혁 [41]이 하얀 코트를 받아 들었다. 마치 금기에 대해 이야기하기라도 한 듯, 둘 사이에 가벼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은밀한 모략가’는 말없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낡은 왕좌의 곁에 동그란 테이블이 나타났다. 동그란 테이블 위에는 레드 와인이 채워진 와인글라스가 놓여 있었다. ‘은밀한 모략가’는 와인 글라스를 가볍게 쥐었다. 【시나리오가 빨리 진행되긴 한 모양이군. 숙성도가 형편없어.】 “김독자 녀석 때문이지.” 【도깨비 왕은 움직였나?】 꼬마 유중혁 [41]이 허공에서 메시지 로그를 넘겼다. “아직. 하지만 대도깨비들의 준동이 시작됐어. 혹부리 쪽에서도 연락이 왔다.” 【곧 시작되겠군.】 “그렇겠지.” 두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궁. 갈라진 벽의 균열 사이로 음습한 울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들을 찾는 이계의 사냥개들이 울부짖는 소리였다.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41회차. 너는 나와 가장 비슷한 ‘유중혁’이다.】 “그것 참 영광이군.” 【너는 죽게 될 것이다.】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것 아니었나?”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허공에 희뿌연 빛이 어리더니, 이윽고 성류 방송의 화면이 나타났다. 무료한 듯 그 화면을 넘기며,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긴 이야기의 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 눈을 떴을 때,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김독 자 귀찮 아」 희미한 벽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미안.’ 희끄무레한 어둠을 밝히는 칸델라의 불빛. 나는 아무래도 다시 [제4의 벽]의 내부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무너지려는 정신을 이번에도 [제4의 벽]이 지켜주었던 것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맑아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혼잡했던 머릿속에는 한 줄의 명료한 문장만이 남았다. 「은밀한 모략가는, ‘멸살법’ 원작의 유중혁이다.」 녀석은 내가 1863회차에서 만났던 유중혁도 아니고. 나와 함께 3회차를 살아온 유중혁도 아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유중혁. 지금의 ‘3회차’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스타 스트림>의 결말을 본 유중혁이다. ―잠깐만요, 작가님! 중혁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러면······. 마지막으로 달았던 ‘멸살법’의 댓글들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에필로그로 넘긴 채 끝나버렸던 이야기. 내가 궁금했던 질문의 대답······.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의 장서들을 두리번거렸다. [유중혁, 4회차 8권의 기록] 은은한 불빛 속에 드러난 장정을 보며, 나는 멍하니 섰다. 내가 읽으며 자라온 이야기들이 그곳에 있었다. 천천히 장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정의 끝에 닿은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읽고, 읽고, 또 읽었던 이야기. 그 한 문장 한 문장은 내 생이었고, 내 피였고, 내 살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그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억지로 책을 집었다. 언제 어느 페이지를 읽더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나를 배신할 리 없었다. 읽으면, 나아질 것이다. 지금껏 그랬듯 분명. 공교롭게도 펼쳐진 장면은 안나 크로프트와 유중혁의 대치 장면이었다. 소설 속에서,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네놈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떨렸다. 다음 페이지를 볼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자격도 없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즐거웠나? 누군가의 불행과 고통을 읽는 것이 내 삶이었나? 그렇다면 나는 저 빌어먹을 하늘의 성좌들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어떻게 할 거냐?)」 돌아본 곳엔 니르바나가 있었다. 「(이 세계의 ‘유중혁’은 둘이다.)」 도서관 사서들이 모여있었다. 나를 안쓰럽게 보는 세 쌍의 눈. 니르바나, 시뮬라시옹, 그리고 꿈을 먹는 자. 나는 그들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당신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몸의 의견을 구하는 건가?)」 니르바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정답이 있다는 듯 당당한 목소리. 「(고민할 필요도 없다. 세상 만물은 모두 태초의 하나에서 시작한 것이니까.)」 “또 ‘하나’ 타령이냐?” 「어차피 모든 게 하나였으니, 유중혁이 둘이든 셋이든 무슨 상관인가? 모든 유중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지극한 우주의 섭리······!」 저런 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극장 던전의 주인, 시뮬라시옹이 나를 보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군.)」 죄책감. 이것을 그런 감정으로 뭉뚱그려도 되는 것일까. 장정을 쥔 손이 떨리자, 책의 페이지들도 떨렸다. 「(무엇에 대한 죄책감이지? 그의 불행이 너를 괴롭게 만드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차피 그를 구할 수 없다. 그는 그런 삶을 살았고, 너는 그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것이 사실의 전부다.)」 현기 어린 그의 말투에는 오랜 세월 이야기를 읽어온 노인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꿈을 먹는 자’였다. 그는 오징어 다리 같은 촉수로 안경을 쓱 밀어 올리더니 비웃듯 말했다. 「(성좌여. 위대한 모략이 너에게 동정 따윌 바랄 것 같은가?)」 그 말을 듣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맞다. 이 감정은, 어쩌면 내가 읽어온 모든 이야기를 모독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하찮은 감정놀음에 빠질 때도 아니었다. 니르바나가 이죽거렸다.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군.)」 지금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만 한다. ‘동료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어.’ ‘꿈을 먹는 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은가이의 숲’에서는 그가 곧 신이나 다름없으니까.)」 ‘혹시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있긴 하지만 설명해봤자 그다지 의미는 없다. 어차피 ‘이계의 신격’에 관해서는 설명할수록 본질에서 더 멀어질 뿐이니까. ‘공포의 기록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포의 기록자······ 언젠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꿈을 먹는 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입구와 출구는 결국 같은 곳이다. ‘당기시오’라고 쓰여 있는 문은 대개 밀어도 열리게 마련이니까. 너는 네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면 출구는 자연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은밀한 모략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삼문답을 모두 사용했을 때, 너는 ‘네가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내가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 생각해 보니 ‘신성한 삼문답’이 취소된 것은 내 입장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일지 몰랐다. 나는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를 유추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녀석이 나를 데려온 이유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녀석은, 대체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것일까? 「(그는 한 세계의 끝을 본 존재다.)」 그런 내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꿈을 먹는 자’가 말을 이었다. 「(이미 ■■를 알고 있는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다시 거대한 수레 속으로 몸을 던졌을까······?)」 순간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었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무릎 위에 책을 놓고 읽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 ―독자야. 다시 읽어보렴. 모든 이야기를 아는 존재가 그것을 ‘다시’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나 가 김독 자」 다음 순간 시야가 깨지며 나는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장서관의 모든 정경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팽그르 돌며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약간의 신음과 약간의 두통, 그리고 약간의 현기증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현재 화신체 회복률 : 34%] 설화 팩에 꽂힌 링거로 잔여 설화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허공의 디스플레이 위로 떠오르는 화신체의 정보들. [현재 근원 설화의 손상이 심각해 치료제 투여가 불가합니다.] [자연 회복을 추천합니다.] [현재 영약에 대한 내성이 높은 상태입니다.] [새로운 영약의 섭취를 통해 회복을 가속할 수 있습니다.] 낑낑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몸 곳곳이 쑤셨지만, 이전보다는 관절의 움직임이 원활했다. “비유.” 예상대로 비유의 답은 없었다. 대신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재 당신은 임시 채널에 접속해 있습니다.] 임시 채널. 즉, 이곳은 <스타 스트림>의 정식 시나리오 지역은 아니라는 뜻이다. “접속 총원.” [현재 임시 채널에 접속 중인 성좌 : 2] 말이 2지, 이건 뭐 멸살법 조회수만큼이나 투명한 숫자였다. 나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모략가’와 다시 대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녀석은 쉽게 만나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 ‘은밀한 모략가’를 부릅니다.] 놈이 안 만나준다면.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 ‘은밀한 모략가’를 바라봅니다.] 놈이 나를 바라볼 때까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 ‘은밀한 모략가’에게 진상을 부립니다.] 계속해서 귀찮게 굴면 된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예상대로, 반응이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다시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방의 문이 활짝 열렸다. “미친놈. 시끄럽게 무슨 짓이냐?” “왔냐?” 꼬마 유중혁 [666]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용건이 있다면 나를 부르면 된다. 시끄럽게 간접 메시지 터트리지 말고.” 꼬마 유중혁들은 ‘은밀한 모략가’의 권속이니, 내 간접 메시지를 들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저 [666]이 오늘 내 간병 담당인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스마트 폰처럼 보이는 물건을 손으로 꾹 붙들고 있었다. 미니 사이즈 주제에 스마트 폰은 빅 사이즈다. “그건 왜 보고 있어? 폰 게임이라도 하냐?” 성큼 일어난 나는 방심하고 있던 녀석에게서 스마트 폰을 빼앗았다. 유중혁은 어쨌든 본업이 ‘프로게이머’였으니,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 어? “당장 내놓아라!” 튀어 올라 내 옆구리를 퍽 친 [666]이 험악한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멍한 얼굴로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게임이 아니잖아? [현재 2개의 채널에 접속 중입니다.] [현재 시나리오 권외 지역에 있습니다. 프록시 채널을 경유 해 정식 채널에 접속합니다.] 스마트 폰의 화면으로 익숙한 배경이 보였다. 「“독자 아저씬 괜찮아요. 분명 살아 있으니까. 내가 알 수 있어요.”」 [LIVE]라는 표식 아래로, 내가 잘 알고 있는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채팅방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을 위로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 채팅방의 아래쪽에 있었다. [성좌명 :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현재 VIP 구독좌입니다.] [VIP 특전으로 간접 메시지 비용 부담이 면제됩니다.] ―표현할 감정을 선택해주세요. [현재 (힘내)을/를 선택하셨습니다.] ―후원할 코인 액수를 입력해주세요(해당 채널은 최소 50코인부터 후원이 가능합니다). [(현재 입력값 없음) C] ―간접 메시지로 전달할 말을 입력하세요. [그런놈따윈잊어버리고새로운리더를(입력 길이를 초과하였습니다)] 거기까지 읽던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꼬마 유중혁 [666]을 내려다보았다. “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 “설마 지금까지 간접 메시지 쓴 게―” “오늘이 내 차례였을 뿐이다! 빨리 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김독자.” 꼬마 유중혁 [666]이 붉어진 얼굴로 [진천패도]를 쥔 채 씩씩거렸다. 그제야 풀리지 않던 뭔가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지금껏 ‘은밀한 모략가’가 보냈던 무수한 간접 메시지들은, 모두 이 꼬마 녀석들의 짓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돌아오면 그냥 관짝에 넣고 묻어 버리자. 시나리오 다 끝나면 꺼내 주는 게 좋겠어.”」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는 이지혜의 목소리. 화면 너머로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다. 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다시 저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미 ‘묵시룡’ 시나리오까지 풀린 상황이니, 얼른 돌아가지 않으면― 츠츠츠츠츳! 화면 속에서 개연성의 스파크가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서울 상공에 하나둘 도깨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개중에는 비형의 모습도 보였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빌어먹을······ 벌써? 화면 속의 비형이 말하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로 떠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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