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421화 그것은 ‘공포의 기록자’가 쓴 글이었다. 공포의 기록자. 이계의 신격을 만난 최초의 인류이자, 그들의 존재를 전파한 작가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제목을 보는 순간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와 가장 오래된 꿈에 관한 이야기라니. ‘가장 오래된 꿈’은 은밀한 모략가가 자주 되뇐 만큼, 그에 관해 알아낼 주요한 기회인지도 몰랐다. 나는 [999]가 사라진 것도 잊고, 책에 몰두했다. * 그로부터 정확히 여덟 시간 뒤, 나는 멍한 얼굴로 책의 장정을 덮었다. “이건······.”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표현할 정확한 문장을 알고 있다. “‘멸살법’ 보다 재미가 없는데······.” 이 책의 작가가 누구인진 몰라도, 21세기의 플랫폼에 연재가 되었다면 ‘멸살법’만큼이나 망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재미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렵기까지 했다. “······대체 뭔 소리야?” 그나마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 있긴 했다. 예를 들면, 위대한 [그레이트 홀]에는 다섯 명의 위대한 ‘이계의 신격’이 있다는 것. 「동쪽에서 떠오르는 ‘살아 있는 불꽃’.」 「서쪽 세계의 재앙 ‘가라앉은 섬의 주인’.」 「북쪽 우주의 지배자 ‘위대한 심연의 군주’.」 「남쪽 성간을 다스리는 ‘은빛 심장의 왕’.」 「그리고 무엇도 아닌 곳에서 기어오는 ‘위대한 모략’.」 “······멸살법 뺨치는 설정집이네.” 맥락상으로 보아 저 ‘위대한 모략’이 바로 ‘은밀한 모략가’를 상징하는 말인 것 같았다. 실제로 ‘은밀한 모략가’와 관련된 구절들 중에는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었다. 「‘위대한 모략’과 마주한 몇몇 공포의 기록자들은, 그가 ‘가장 오래된 꿈’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략)··· 운이 좋은 공포의 기록자들은 위대한 모략에게 ‘가장 오래된 꿈’의 정체를 물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우주의 시작이자, 거대한 수레바퀴의 주인. 나의 오래된 원수이자 나의 부모. 모든 것의 마지막을 정하는 자.】」 「몇몇 공포의 기록자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위대한 모략’의 표정을 보았고,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내지 못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록이라니. 그래서 이 책의 공저가 ‘공포의 기록자’라고만 되어있는 걸까. ‘은밀한 모략가’나 ‘가장 오래된 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읽어 보고 싶었지만, 책의 대부분은 그들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그저 ‘이계의 신격’ 전반을 다룬 재미없는 일화들이었다. 심지어는 전개도 들쑥날쑥했다. 이야기가 조금 흥미 있어지려 하면 뜬금없이 끝나버리거나, 한 작품 안에서도 시간 순서가 뒤엉키며 앞뒤가 맞지 않는 전개가 되어버리기가 일쑤였다. 하나도 아니고 모든 종류의 일화가 그딴 식이었으니, 몰입이 될 수가 없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끼어든 것은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었다. ‘······뭐가 흥미롭습니까?’ 「(이 책은 일부러 이렇게 설계된 것이다.)」 ‘일부러 재미없게 썼다고요?’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한 이야기로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으면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썼어야죠.’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이해할 수 없다’고 쓴 것이다.)」 ‘예?’ 가벼운 한숨 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눈앞에서 작은 스파크가 흘렀다. [제4의 벽]에서 흘러나온 힘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문장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각각 다른 단편에서 뽑아낸 문장들을 연결하니 다음과 같은 글줄이 되었다. 「아득한 우주로부터 오는 감정. 그것은 필멸자가 결코 쫓아갈 수 없는 태고의 흐름이었다. 우리는 겁에 질렸다.」 「그것들은 우리가 모르는 우주에서 온 괴물 같았다.」 「예상 가능한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오는 ‘공포’였다.」 「우리는 그 공포에 하나하나 힘겹게 이름을 붙였다. 미지의 대상에 이름을 붙여,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처럼 꾸미고 싶었다.」 그제야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시도가 얼마나 의미가 있었는지는, 그대가 판단할 일이다.」 그 체념 어린 문장을 읽고 나자, 어째서 ‘이계의 신격’들이 ‘공포의 기록자’들을 그토록 힐난했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이계의 신격’에게 붙은 수식언들은, 엄밀히 따지면 그들의 본질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들을 만난다면 기억하라.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는, 미쳐버리거나 심연 그 자체가 되는 수밖에 없음을.」 복습까지 끝낸 나는 허탈한 심경으로 책장을 덮었다. “······소득이 너무 없는데.” 결국 이 책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계의 신격’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말이었다. 그런 문장은 ‘이계의 신격’이 아니라 다른 누구를 넣어도 말이 되니까.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한수영’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라고 표현해도 그 맥락은 결국 같다. 비단 ‘이계의 신격’이 아니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찰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장하영과도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묵묵히 내 생각을 듣던 ‘꿈을 먹는 자’가 킬킬 웃었다. 「(맞다. 그것이 이 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우리는 모두는 결국 서로에게 ‘이계의 신격’이라는 것.)」 나는 책을 덮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동그란 방은 창도 동그란 형태였다. 희미하게 비치는 햇살. 울창한 숲의 사이사이로 일광욕을 즐기는 ‘이계의 신격’들이 보였다. 개중 몇몇이 나를 발견하고 촉수를 흔들었다. 괴기스러운 동화의 한 장면을 보듯, 나는 잠시 그 촉수들을 바라보았다. 저 형태는 어쩌면 저들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세히 보니 촉수들의 움직임이 제법 우아한 것 같기도 했다. 「(손을 뻗는 자만이 진실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책을 읽을 필요 따윈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널린 것이 바로 ‘이계의 신격’들이었으니까. 나는 주변의 눈치를 흘끗 살피다가 [소형화]를 사용해 창문을 빠져나갔다. 두둥실 몸을 날려 ‘이계의 신격’을 향해 다가가자, ‘이계의 신격’도 나를 향해 촉수를 뻗어왔다. 딱히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후 회해 도 몰 라」 [제4의 벽]의 경고에도, 나는 촉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후회는 늘 해왔다. 하지만 저지른 일보다는,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더 컸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이 <스타 스트림>의 최종 시나리오는, ‘이계의 신격’과의 대전쟁이다. 그리고 ‘이계의 신격’은 그 전쟁을 끝으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멸살법’에서 유일하게 설명되지 않는 존재들. 나는 묻고 싶었다. 너희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무엇을 위해, 이 <스타 스트림>과 맞서 싸운 것인지. 작중에서 ‘이계의 신격’들은 한 번도 대답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울부짖거나,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성좌들과 맞서 싸울 따름이었다. 츠츠츠츠츠······. [‘제4의 벽’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나는 ‘이계의 신격’의 촉수를 쥐었다. 내 손끝에 감응하듯, 촉수들은 나무 넝쿨처럼 손끝을 감았다. 공포의 기록자들은 말했다. ‘이계의 신격’은 불가해한 존재들이라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고.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지금의 내 행동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 우리는 원작에서 그랬듯 싸우게 될 것이고. 처참한 폐허와 멸망만을 가져오게 될 수도 있다. 다음 순간 주변의 정경이 느릿한 멜로디로 뒤덮였다. 찬연한 햇살 속에서, ‘이계의 신격’들이 하나둘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설화, ‘만물의 사랑을 받는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이 숨겨온 소중한 것을 내어주듯, ‘이계의 신격’들이 뻗은 덩굴의 끝에 작은 꽃들이 맺혔다. 꽃에서 향기가 흘러나왔다. 향기는 곧 노랫말이 되었고, 이야기가 되었다. 「“대장.”」 그것은 아주 오래된 기억의 파편. 「“유중혁 씨.”」 나는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목소리들을 들었다. 모두 다른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목소리들이 누구의 것인지 눈을 감고도 맞출 수 있었다.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만약 ‘은밀한 모략가’가 원작의 유중혁이라면, 그리고 그가 보여준 것처럼 ‘멸살법’의 무수한 세계선이 존재한다면······. 그 무수한 회차에서 실패한 이야기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다음 생애에는 반드시.”」 「“몇 번을 회귀하더라도, 대장과 함께······.”」 밀려오는 기억의 파도가 순식간에 내 의식을 휩쓸었다. 그 기억에는 두서가 없었고, 서로 일관적으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이을 수 있었다. 마치 이어지지 않는 별자리를 잇듯이. 어쩌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그것들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해했다. ‘이계의 신격’이 무엇인지, 원작의 유중혁은 왜 스스로 ‘이계의 신격’이 되었는지. 왜, ‘은밀한 모략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수만 년, 수십 만년, 어쩌면 수백 만년에 달하는 고통의 이야기. 세계선에서 버려져, ‘설화’로 인정받지 못한 이야기. 세계의 무의식이 되어, 먼 우주를 떠돌며 오래된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실패한 설화의 파편들. 끝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내 주변을 정원처럼 덮은 ‘이계의 신격’의 가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기억의 파도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 기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릴 기억해줘요.”」 나는 손끝에서 부스러지는 그 설화들을 붙잡은 채 울었다. 그것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이젠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것들이 가엾어서.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때도 지금도, 그것을 ‘읽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계의 신격’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우릴알아】 【너누구너누구누너누구너누구너누구너누구】 점점 더 나를 조여드는 넝쿨들. ‘이계의 신격’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소리. 먼 우주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태고의 울음. 「그 러지 말 라고했 잖 아」 주변으로 몰려든 ‘이계의 신격’들이 까마득한 숲을 이루었다. 자라난 넝쿨들이 나를 삼키려는 듯 옥죄어왔다. 나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듯이. 이대로, 영원히 자신과 함께하자는 것처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넝쿨을 헤치며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넝쿨은 더욱 조여들었다. 【가 지 마】 【어 째 서】 여기서 먹히면 안 된다. 정말 이들을 위한다면, 나는 여기서 정신을 놓아서는 안 된다. 【못 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내 들기도 전에 양팔이 봉쇄되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넝쿨의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려는 순간, 눈부신 빛살이 넝쿨을 갈랐다. 희미한 볕과 함께 보이는 작은 [진천패도]. 고개를 들자 꼬마 유중혁 [999]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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