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418화
한수영의 재촉에 유중혁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횡설수설했고 중언부언했다. 그렇게 십 여분쯤 흘렀을까.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만. 너 지금 제정신 아닌 거 같으니까 내가 정리할게. 넌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
평소였다면 그런 폭력적인 정리에 반발할 법도 한데, 유중혁은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한수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김독자를 구하러 갔어. 그런데 너보다 빨리 김독자를 낚아챈 놈이 있었지. 그놈은 우리가 아는 ‘은밀한 모략가’였고.”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놈이 너랑 똑같은 얼굴에 백색 코트를 입고 있었단 거지.”
“그렇다.”
“가짜일 가능성은? 그놈이야 워낙 믿을 수 없잖아. 어쩌면 ‘은밀한 모략가’가 너로 변장한 것일 수도 있고.”
“가짜일 리 없다.”
“왜?”
“1863회차의 내가 가지고 있던 설화를 사용했다.”
“······그 영원 뭐시기 하는 중2병 설화 말이지?”
한수영이 과연,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동공이 미미하게 팽창되며, 설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홀로 소외되어 있던 정희원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뭔 얘길 하는 거야? ‘은밀한 모략가’가 중혁 씨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한수영은 정희원을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쉽게 말해주자면, 지금 이 세계선에는 유중혁이 둘이야.”
“······그럴 수가 있어?”
“불가능할 것도 없지. 다른 세계선의 유중혁이 이 세계선으로 넘어왔다면.”
“그게 가능하다고?”
“김독자도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세계선에 다녀왔으니까. 문제는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존재면 대체 얼마나 강력할까 하는 것인데······.”
<에덴>이나 <파피루스>의 최고위급 성좌들도 자력으로 세계선을 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은밀한 모략가’는, 혼자서 그 모든 개연성을 감당할 정도의 강자인 것이다.
정희원이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세계선에서······.”
“제일 가능성 있는 세계선은 사실 하나뿐이야. 김독자가 다녀왔던 1863회차의 세계선.”
1863회차.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에 등장했던 유중혁의 마지막 세계선. 유중혁이 한수영을 향해 물었다.
“그 세계선의 일을 알고 있나?”
“대충은.”
“그 세계의 마지막에서, 1863회차의 나는 둘로 나누어져서 싸웠다. 한쪽은 죽었고, 다른 한쪽은 회귀했지.”
“알아. 나도 꿈에서 몇 번 봤으니까.”
“······꿈에서?”
한수영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런 이야기까지 자세히 할 시간은 없고, 아무튼 너는 지금 ‘은밀한 모략가’가 그 1863회차의 너라고 생각한다는 거잖아. 그렇지?”
유중혁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걸리는 점들이 있으니까.”
“뭔데?”
“‘은밀한 모략가’의 강함은 기록에서 읽었던 ‘1863회차의 나’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한참이나 입술을 짓씹던 유중혁이 말했다.
“······놈이 뭔가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그 백색 코트.”
“백색 코트?”
“내 성흔인 ‘회귀’는 보유 중인 아이템까지 회귀시키지는 않는다. 놈이 그런 백색 코트를 입고 있을 이유가 없단 얘기다.”
“흰색을 좋아하나 보지.”
“나는 흰색을 싫어한다.”
“취향이 바뀌었을 수도 있잖아.”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느낌의 문제라는 거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조롱?”
“일부러 그 코트를 입고 온 것 같았다는 뜻이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유중혁의 머릿속으로 ‘은밀한 모략가’가 남긴 말이 스쳐갔다.
【······3회차. 네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수영은 턱을 만지며 뭔가를 골몰했고, 정희원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이윽고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좋아. 요약해보자. 논리적으로 보자면 ‘은밀한 모략가’는 ‘1863회차의 유중혁’인데, 느낌적으로 보자면 아니다. 그런 거지?”
“······.”
“그럼 일단 이렇게 가정하고 시작하자고. ‘1863회차의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가 아니다’. 즉, ‘은밀한 모략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유중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겨우 내 느낌일 뿐이다. 그걸 믿겠다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느낌이니까. 자기 자신은 자기가 제일 잘 아는 법이잖아?”
빙긋 웃는 한수영을 보며, 유중혁은 의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답을 말해라, 한수영.”
“음? 무슨 소리실까.”
“너는 ‘은밀한 모략가’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다. 아닌가?”
이번에는 한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언제부터 그렇게 눈치가 빨라지셨지?”
“······네놈이 내 느낌을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리고 그 시선의 교환으로,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지 눈치챘다.
둘은 예전에도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가 ‘미래의 김독자’라고 말했고, 한수영은······.
“아 언제까지 두 사람끼리 이야기할 거야? 그래서 ‘은밀한 모략가’가 대체 누군데?”
정희원의 채근에 한수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냥 가설일 뿐이야.”
“가설이든 뭐든 빨리 말해봐. 답답하다고!”
“나는 굉장히 오랫동안 궁금했던 게 하나 있어.”
“궁금했던 거?”
“만약 ‘멸살법’이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이 우주 어딘가에 나나 김독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멸살법’의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한수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한수영 코퍼레이션>도, <김독자 컴퍼니>도 없는 그런 세계에서, 동료를 잃고 무한한 회귀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미련한 ‘유중혁’이 있다면.”
“······잠깐, 네놈.”
“그 유중혁이 무수한 상실 끝에 결국 모든 것의 결(結)에 도달했다면······, 순수한 자신의 노력으로 마침내 이 <스타 스트림>의 마지막을 본 유중혁이 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찰나의 텀을 두고, 한수영은 유중혁을 보았다.
깊게 흔들리는 유중혁의 외눈에 한수영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녀석은, 과연 지금의 ‘3회차’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은밀한 모략가’.
‘멸살법’의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성좌.
그럼에도 내가 지금껏 만난 그 어떤 성좌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
―은밀한 모략가. 당신은 그 소설의 에필로그를 아는 존재인가?
내가 그 질문을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만약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를 특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
“뭐? 잠깐만.”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세 번째 질문의 ‘거절권’을 사용하였습니다.
빌어먹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 ‘신성한 삼문답’은 양측에게 단 한 번씩 ‘거절권’의 사용을 허용한다는 것을.
‘은밀한 모략가’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잠깐이지만, 그의 코트 주변이 희미한 개연성의 스파크로 뒤덮이는 것이 보였다.
【조금 피곤하군. 그만 물러가라.】
“잠깐만! 아직 삼문답 안 끝났―”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공간이 접혀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나는 어느새 홀 밖으로 쫓겨나 있었다.
굳건히 닫힌 홀의 문을 보자 허탈함이 몰려왔다.
―‘신성한 삼문답’이 일시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한 번의 질문권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본래 ‘신성한 삼문답’은 어느 한쪽의 의사로 보류시킬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그런데 ‘은밀한 모략가’는 그것을 해냈다. 대체 얼마나 강력한 격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부조리한 일이 가능한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홀의 문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문 열어!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 난 내 동료들한테 돌아가야 한다고!”
순간 문에서 강력한 격이 일렁이며 내 화신체를 튕겨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격의 방출을 준비했다.
그런 나를 만류한 것은 곁에 있던 꼬마 유중혁 [999]였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며, 나는 황급히 격을 거두었다. 확실히 꼬마 유중혁의 말이 맞았다. 지금 나는 화신체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고, 상대는 지금의 나로서는 끝을 짐작할 수조차 없는 강력한 존재다.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 김독자.”
“······그게 언젠데?”
꼬마 유중혁들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따라와라. 숙소로 돌아간다.”
또 그 동그라미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암담함이 밀려왔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회랑의 곳곳에서 이쪽을 보는 ‘이계의 신격’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행히 나는 지금 ‘은밀한 모략가’의 손님으로 와 있는 상황.
만약, 내가 탈출을 감행해서 ‘불청객’ 신분이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고오오오오······.
······역시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게다가 아주 수확이 없는 상황도 아니고.
[‘제4의 벽’이 희미하게 진동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많군. 샨타크의 족속들인가.)」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목소리는 [제4의 벽]의 메시지를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말투로 보아하니······.
‘······꿈을 먹는 자?’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내 안에도 ‘이계의 신격’ 중 하나가 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녀석에게 이번 상황에 대한 도움을 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네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군.)」
‘호감? 저것들이?’
나는 멀리서 내 쪽을 향해 사납게 촉수를 세우고 있는 ‘이계의 신격’들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거대한 촉수의 끄트머리에서 끔찍한 모양의 꽃이 활짝 피었다.
「(너를 궁금해하고 있다. 이계의 신격들에겐 드문 일이군.)」
나는 나를 향해 구애라도 하듯 팔랑이는 봉오리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것들이랑 친해지긴 힘들어.’
「(힘들다? 왜지?)」
‘당신도 도서관에서 이것저것 읽었다면 알고 있을 텐데.’
음울한 아우라를 뿜어대는 ‘이계의 신격’들을 지나치며, 나는 ‘멸살법’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생각했다.
「<스타 스트림>의 최후의 전쟁은, 저 ‘이계의 신격’들과 관계되어 있다.」
원작의 유중혁은 그 전쟁에서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를 도와준 화신들은 모두 그 전쟁에서 죽었다. 세상에 파멸을 몰고 온 저 혼돈의 괴물들에 의해서.
그런데 ‘꿈을 먹는 자’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계의 신격들이 왜 재앙이 되었는지 너는 알고 있느냐?)」
‘그건······.’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기묘한 감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저 설명 가득한 ‘멸살법’에도, 이계의 신격들의 유래에 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문득 어떤 예감이 들었다.
‘은밀한 모략가’의 정체와 ‘이계의 신격’의 유래.
어쩌면 둘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에 관해 내가 무어라 물어보려던 찰나, 먼저 말을 건 녀석이 있었다.
“너는 소설이라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꼬마 유중혁 [999]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해. 왜?”
“네놈이 원한다면 짧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 수도 있다.”
“이야기?”
순간, 꼬마 유중혁 [666], [777], 그리고 [888]이 당혹스런 얼굴로 [999]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대답과는 상관없이, 꼬마 유중혁 [999]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외로운 싸움을 거듭해 온 늑대가 있었다. 그는 추구하는 목표가 있었고, 원하는 질문이 있었다. 그는 그 질문의 해답을 위해 싸웠다.”
“우화(寓話)야?”
“늑대는 계속해서 싸웠다. 수백 년,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을.”
늑대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늑대는 마침내 싸움의 끝에 도달해 ‘늑대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무리를 모두 잃었지만, 어쨌든 왕은 그 해답을 납득했다. 그것이 이 세계가 그에게 내놓은 최선의 해답이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을 품에 안은 채, 왕은 세계를 주유했다.”
그것은 묘하게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은 또 다른 ‘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한없이 친숙한 이야기였다.
“그 무리에도 자신과 같은 늑대가 있었다. 그 늑대는 그와 같은 대의를 가지고,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마치 홀린 듯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뭔가가 달랐다. 그 무리의 ‘늑대’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지금 이 녀석은, 내게 ‘은밀한 모략가’가 대답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먹이를 구하는 것도, 무리를 지키는 것도. 그가 갈망했던 아득한 목표들을, 그 늑대는 최소한의 고통만으로 이뤄내고 있었다. 무엇도 잃지 않은 채로. 그 광경을 보며, 왕은 문득 생각했다.”
천천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저 이야기가 끝까지 완성된다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유중혁이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김독자. 너는 그런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