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413화
뭉그러진 의식 속에서 설화들이 낱말을 흘려보낸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래, 아직 듣고 있어.
잠들지 않았다고.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당신을 지탱합니다.]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처럼, 나는 내가 살아온 설화들을 먹으며 견뎌냈다. 피부와 뼈마디에 감각이 사라진 후부터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내 안의 균형을 담당하던 시계 같은 것이 부서진 느낌이었다.
[‘묵시록의 최후룡’이 거센 포효를 터트립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묵시록의 최후룡’을 노려봅니다.]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재앙과 재앙의 대결.
멀리서 퍼져 나오는 충격파의 진동을 안개 내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강력한 격이었지만, 조금씩 그 진동의 크기는 줄어들고 있었다. 예상대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묵시룡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강하지만, 이제 막 봉인에서 깨어난 재앙이다. 오래전부터 <스타 스트림>을 부유해온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에 대적하기는 조금 부족할 터.
그러니 힘의 균형은, 천천히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문제는 녀석의 분체들이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발동합니다!]
본래 동료들에게는 이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츠츠츠츠츳!
머리가 짜부라지는 느낌과 함께, 눈앞에 어렴풋한 영상이 떠올랐다. 설화의 손상이 삼한 까닭인지 노이즈가 심했지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김독자를 구하러 가라.”」
아비규환의 전장. 그 전장의 하늘을 뒤흔드는 여의봉의 모습이 보였다.
와 줬구나.
황홀하게 흩날리는 금빛 세모(細毛). 제천대성의 강림을 견뎌내는 장하영이 창공을 향해 격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장하영을 돕는 흑염룡과 우리엘의 뒤로, 다시 키리오스와 파천검성의 모습도 보였다.
분체들로부터 일행을 지키는 <명계>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X급 페라르기니]로 쓰러진 성좌들을 태우는 ‘양산형 제작자’······.
이윽고 전장의 중심에서 퍼진 폭음과 함께, 거대한 배가 등장했다.
「내가 나와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에덴>이 빚은 방주의 설화가 전장을 물들였다.
아무래도 메타트론이 결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역시, 묵시룡을 봉인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아저씨······.”」
방주에 올라탄 신유승과 이지혜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유승은 혼절한 이길영을 부축하고 있었다. 폭주하는 길영이를 막는 것이 신유승의 임무였고, 다행히 나의 화신은 임무를 잘 수행해 낸 모양이었다.
성좌와 화신들이 방주로 대피하고, 섬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희끄무레한 염주 같은 것이 눈앞에 나타난다 싶더니, 진언이 들려왔다.
[아해여,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나는 그를 향해 힘겹게 웃어 보였다.
‘이미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눈앞에 떠오른 백팔 개의 염주알이 신묘한 빛을 뿜고 있었다.
석존은 이미 내가 나타나던 그 순간부터 이 시간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원이다. 정확한 미래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어낼 수 있다.
[섬의 역사도 여기까지군요. 이제 바빠지겠습니다.]
그가 왜 바빠지는 것인지, 나는 ‘멸살법’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일제히 진동하는 염주알들이 새하얗게 탈색되고 있었다. 이 섬은 곧 닫힐 것이다. 그리고 수만 년 전에 그랬듯, 섬은 다시 한번 묵시룡을 봉인하게 되겠지.
이 섬은 묵시룡을 담을 하나의 거대한 염주가 될 것이다.
‘방주에 탄 일행들을 섬에서 탈출시켜 주십시오.’
염주가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동의의 표시였다.
[하지만 아해는 구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는 지금 묵시룡과 더 네임리스 미스트의 한복판에 있으니까.
[부디 아해에게 이야기의······.]
진언은 충격파와 암무의 파도에 휩쓸려 지워졌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조각조각 떨어진 설화들이 분해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이것만 버텨내면 <김독자 컴퍼니>는 새로운 거대 설화를 얻는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향해 나아갈, 전(轉)을 채울 수 있게 된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그리고 설화가 하나둘 끊어지기 시작했다.
[설화, ‘귀환자의 제자’가 이야기를 멈춥니다.]
[설화, ‘미식협의 이단아’가 이야기를 멈춥니다.]
호흡이 곤란해지며 눈앞이 캄캄해져 갔다.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가 이야기를 멈춥니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몸을 웅크립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저항합니다.]
그랬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이어갔다.
자꾸만 아득해지는 머릿속을, 내가 잘 아는 문장들로 채웠다.
그래, 멸살법 생각을 하자.
그러나 엉뚱하게도,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멸살법’의 내용이 아니라 중학생 시절의 나였다. 사촌 형들 몰래 컴퓨터로 ‘멸살법’을 읽고, 학교의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를 하던 기억들.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던 ‘멸살법’의 내용을 공책에 필사하고, 등장인물들의 파워 밸런스 도표를 만들던 기억들.
―독자는 나중에 작가가 되고 싶은 거니?
내 낙서를 보고 그렇게 물어준 선생님도 있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예요. 그렇게 말하자, 선생님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어 보였다.
―그것도 좋구나. 결국 작품은 독자가 있어야 완성되니까.
그 말을 해준 선생님은 사흘 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생이란 그런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삶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나는 이 삶이 차라리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살고 싶다.’
뻗은 손에 감각이 없다.
아주 먼 곳에서, 묵시룡과 이계의 신격이 대치하는 전장 속을 헤치고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나 어슴푸레한 인형이었지만, 나는 그게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놀라운 업적을 인정합니다.]
[당신은 새로운 ‘거대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어디선가 흘러온 따뜻한 빛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살리고 싶다.
반드시, 살리고 싶다.
한수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생존의지 Lv.1’을 발동 중입니다.]
저 메시지를 듣는다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김독자가.
“아직 늦지 않았다.”
유중혁의 말에, 한수영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쓱 닦으며 웃었다.
“난 살면서 한 번도 누구한테 뭘 양보해본 적이 없어.”
“이미 한계라는 걸 알고 있다.”
“남 말하시네.”
“너보다는 오래 버틸 수 있다.”
이제 김독자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시간도,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정희원이 달아준 추진력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남은 힘으로는 분체들을 상대할 수도, 저 두터운 암무를 뚫을 수도 없었다.
쿠구구구구구······.
풀어헤친 한수영의 붕대에서 피와 설화가 뒤섞여 쏟아지고 있었다.
과할 정도로 창백해진 얼굴. 유중혁이 말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할 셈인가?”
“널 백 퍼센트 신뢰할 수가 없어서 말이지.”
유중혁의 눈동자에 차가운 뭔가가 스쳤다. 한수영이 물었다.
“나 거짓 간파 있는 거 알지?”
“물론.”
“너 진짜 김독자를 동료로 여기는 거 맞아?”
“불필요한 질문이군.”
“너희가 시나리오로 지지고 볶으면서 미운 정이 좀 들었다는 건 알아.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납득이 안 가는 점도 있거든.”
말과는 다르게, 한수영은 [거짓 간파]를 켜지 않은 채로 말했다.
“넌 원래 동료고 뭐고 없는 놈이잖아. 그런데 이번 회차에 들어와서 너무 많이 변했다 이거지.”
“······.”
“그래서 나는 너를 믿을 수 없어. 대의를 위해 동료들을 저버렸던 네가, 왜 김독자는 구하려는 건데?”
유중혁의 시선이 한수영과 마주쳤다.
그토록 깊은 어둠을 마주한 것은 간만이었기에, 한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어쩌면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수영은 유중혁의 ‘회차’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유중혁이 대답했다.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났을 때, 김독자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아무 감정도, 생각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절망 같기도 했고, 분노 같기도 했고, 지독한 외로움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모든 감정은 유중혁이 아니라 한수영 자신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기에, 한수영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때까지는 살려둘 거라 이거지?”
그 말을 하는 한수영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새카맣게 타오르는 [흑염]. 그녀의 마지막 마력이 그 손바닥에 깃들고 있었다.
“약속 꼭 지켜라. 만약 못 구하면―”
이글거리는 한수영의 눈빛이 유중혁을 보았다. 한수영의 작은 손이 유중혁의 등에 맞닿으며, 가공할 마력의 폭풍이 발생했다.
“그냥 다음 회차로 꺼져버려!”
한수영의 팔에서 뻗어 나온 흑염룡의 가호가 일시적으로 유중혁에게 깃들었다. 정희원이 전해준 마력과 한수영이 전해준 마력이 일시적으로 결합하며, 검은 코트의 너머로 빛과 어둠의 날개가 펼쳐졌다.
콰아아아아아!
광막한 공허를 누비며,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혼자의 힘만으로는 넘지 못했던 암무를, 유중혁은 정희원과 한수영의 힘으로 넘어섰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가호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의 가호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그럼에도 마력은 점차 떨어져 갔다. 암무의 밀도가 짙어질수록 별빛은 흐려졌다. 유중혁은 이를 악물었다.
더 뾰족하고 더 정확하고 더 날카로운,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다.
저 재앙의 안개를 뚫어낼 수 있는 설화가······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그곳에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모든 공허의 길목에, 그와 김독자가 걸어온 시간이 은하수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유중혁은 그 길을 달려갔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하나의 설화를 달리고.
[설화, ‘거신의 해방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또 하나의 설화를 달리며, 유중혁의 화신체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뒤덮였다. 초월형 2단계, 그리고 3단계······ 4단계를 넘는 순간 유중혁의 몸이 일시적으로 바뀌었다.
으드드드득.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르며, 환골탈태(換骨奪胎)라도 하듯 체형이 더욱 날렵하게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초월형 5단계.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멀리서, 홀로 죽어가는 별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성좌처럼 보이지 않았다.
김독자.
아직 늦지 않았다.
그들이 기억하는 설화들이 남아 있고, 김독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다.
김독자가 그토록 만들고 싶어했던 이야기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설화, ‘김독자 컴퍼니’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너도,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화신체의 내구도가 한계치에 달했습니다!]
[‘방주’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뒤쪽에서 그를 잡아당기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그 인력이 김독자에게 다가가는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당신을 호출합니다.]
“시끄럽다!”
유중혁은 그 모든 힘을 거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김독자는 코앞에 있었다. 열 걸음, 아홉 걸음, 여덟 걸음······ 전신을 찢어발기는 스파크를 견디며, 유중혁은 앞으로 나아갔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손을 뻗었다.
공허 속을 부유하는 김독자의 옷깃. 그 끄트머리에 손이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느낌과 함께 사위가 흔들렸다. 기절을 하거나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유중혁은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굳센 손이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무척이나 익숙한 손이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동요합니다.]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묵시룡과 이계의 신격이 충돌하는 소리. 섬의 차원이 붕괴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유중혁이 본 것은 그런 멸망의 정경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한없이 불길한, 그 끝을 잴 수조차 없는 혼돈 너머로 김독자의 것과 똑같은 백색의 코트가 펄럭이고 있었다.
혼절한 김독자를 허리에 낀 존재.
새카만 어둠 속에서, 심연과 같은 두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전율이 올라왔고, 붙잡힌 손목이 미친듯이 떨렸다. 유중혁은 눈앞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미래에서 온 ‘김독자’인가?
언젠가, 유중혁은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1863회차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아는 존재는 김독자뿐이라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던질 수 있었던 물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멍청한 질문이었다.
1863회차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는 존재.
어떤 이야기에 관해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는 그것을 읽은 ‘독자’가 아니라 직접 그 이야기를 살아간 ‘등장인물’인 법이다.
【돌아가라. 너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