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화

412화 시야를 덮는 안개 속에서 유중혁이 말했다. “놈을 구하는 것은 나다.” 그의 손에 쥐어진 [흑천마도]가 새파란 빛을 내뿜었다. “너희는 모두 지쳤다. 그러니 내가 가는 것이 맞다. 남은 마력을 모두 내게 모아라.” 그러자 [심판자의 검]을 뽑아든 정희원도 말했다. “당신도 몸 상태가 엉망인 건 마찬가지잖아. 이번에는 내가 가겠어요.”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껏 정희원이 이처럼 강경하게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둘 다 안 비켜? 나 하나로도 충분하거든?” 거기에 한수영까지 끼어들었다. 대치 중이던 두 사람의 시선이 한수영에게 쏠렸다. “우린 그렇다 치고, 넌 또 왜?”라는 느낌의 시선이었기에, 한수영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뭘 그렇게 봐? 난 김독자 구하면 안 되냐?” “독자 씨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 물론 그 자식 좋아하진 않지.” 보통이라면 이런 귀찮은 일은 유중혁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한수영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김독자가 수르야의 열차를 타고 돌진하던 순간, 그녀에게 날아온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 구해줄 거지? ······그 말만 듣지 않았어도. 투덜거린 한수영이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 정희원이 말을 빼앗았다. “미안하지만 독자 씨가 나한테 직접 구해달라고 했어. 그러니까 이번엔 너나 저 양반한테 양보 못 해.” “뭔 개소리야? 김독잔 나한테 구해달랬거든?” “거짓말 마. 그 인간이 너한테 구해달라고 할 리가 없잖아?” “아 그랬다니까! 작가라고 입만 열면 거짓부렁인줄 아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리고 그 순간, 한수영은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처음에는 정희원이 저 얼치기를 구하려 거짓말을 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희원은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불현듯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야, 너······.” 어마어마한 분노가 깃든 얼굴로, 유중혁이 먼 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한수영은 뭔가를 깨달았다. ······잠깐, 이거 혹시? “설마 김독자 이 새끼가?”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 히죽 웃는 김독자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 것도 같았다. * 쿠구구구구······. 제천대성이 뚫어 놓은 하늘의 구멍이 조금씩 메워지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 주춤거리던 분체들은 다시금 세를 회복하고 있었고, 세계는 다시 암무로 뒤덮이고 있었다. 묵시룡의 충격파가 만들어 낸 소리가 파도처럼 들려왔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성좌들이 제천대성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두 번은 못 해. 지금 이것도 규약 위반이거든.] 귀찮다는 듯 여의봉을 휘휘 돌린 제천대성이 여의봉을 귓속에 집어넣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에게 성운 <황제>의 ‘약속’이 발동합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압박했던 제천대성의 모습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몸이 여러 개로 찢어지듯, 현현했던 제천대성의 격이 부서지며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너네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다 뒈진다.] [몰아붙여! 지금 밀리면 다 뒈지는 거야!] 기력을 되찾은 디오니소스와 <올림포스>의 성좌들이 허공을 향해 격을 발산했다. 힘을 비축하고 있던 <명계>의 성좌들도 움직였다. 한반도의 성좌들이 이지혜에게 힘을 모았고, [터틀 드래곤]의 포신에서 눈부신 포화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싸웠고, 누군가는 저항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성처럼,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달아나던 <베다>와 <파피루스>의 성좌들. 수식언이 알려졌거나, 수식언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별들이 묵시룡과 이계의 신격의 패권 다툼에 휘말려 추락하고 있었다. 이제 별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처럼. 메타트론은 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 요피엘. 그녀가 1863회차에서 보내준 정보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그의 양손에는 묵시룡을 봉인하기 위한 봉인구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에덴>과 절대선의 모든 설화를 끌어모아 만든 봉인구. 요피엘은 말했다. ―서기관은 죽게 되겠지만, 세계는 ‘선’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분명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대상은 봉인이 불가능합니다.] 봉인구가 거의 완성되었음에도, 묵시룡은 가둘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묵시룡을 너무 일찍 깨운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끼어들었기 때문일까. 역시 ‘구원의 마왕’이 문제였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요피엘이? 시야의 끝에 화신체의 절반을 잃고 죽어가는 미카엘이 있었다. <에덴>이 있는 한 미카엘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에덴>은 사라질 것이다. <에덴>뿐만 아니라, 곧 <스타 스트림> 전역의 붕괴가 시작될 것이다. [벌써 포기할 셈인가? 네놈답지 않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메타트론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를 죽이러 왔습니까?] [그냥 내버려 둬도 죽을 텐데, 뭐하러?]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가레스가 킬킬 웃으며 인상을 썼다. [가장 오래된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으로 메타트론은 아가레스가 왜 되돌아온 것인지를 깨달았다. 메타트론이 말했다. [······잠깐이지만 당신을 부러워했습니다. ‘악’의 설화를 그토록 쉽게 내버리고 떠난 당신을 말입니다.] [거짓말은 ‘악’의 미덕이야. 잊었나?] 아가레스가 진저리난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메타트론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선과 악. 그들은 이 세상의 대척점에 있지만, 이 세상의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이 ‘설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설화는, 이미 그들 자신이니까. [가장 오래된 선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장 오래된 악이······!] [시끄러워. 그 빌어처먹을 이야기는 대체 언제까지 ‘시작하는’ 거냐.] 피어오르는 설화들을 보며, 아가레스가 인상을 썼다. [가장 오래된 악이 ‘지옥 동부의 지배자’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품속에 손을 넣은 아가레스가 궐련을 꺼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궐련에 불이 붙으며 연기가 허공으로 퍼져 나갔다. 추락하는 별들의 개수는 점점 많아졌고,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은 추락한 성좌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멀리서 묵시룡의 울음이 들렸다. [장관이로군. 이 긴 싸움을 마무리하기엔 딱인 무대야.] 선과 악의 수장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곳의 모든 비극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뒤쪽에서 괴이쩍은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은밀하게 다가온 분체 하나가, 메타트론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쿠드드드드! 당장이라도 대천사를 찢어 삼킬 듯 덤비던 분체가 움직임을 멈췄다. 아가레스의 양손이 닫히는 분체의 아가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 역시 서열 2위의 마왕이다. 현 마계의 마왕들 중 유일하게 ‘신화급 성좌’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존재. 아가레스가 궐련을 씹으며 말했다.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냐? 여기서 순교라도 할 셈이냐?] [잠깐이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놈이 벌린 일이면 제대로 끝을 내라. 잘난 ‘하늘의 서기관’으로서, 제대로 ‘성마대전’의 마무리를 지으란 얘기다.] [무립니다. 예상보다 묵시룡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벽’의 힘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거다.] [‘벽’의 힘을 사용해도 묵시룡은 봉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여기 있는 녀석들을 살릴 수는 있다. ‘벽’은 본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 말에 메타트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너는 늘 두 번 말해야 알아듣지.] 분체를 향해 거센 격을 쏟아내는 아가레스가 그곳에 있었다. 메타트론은 오랜 세월 저 마왕과 싸워왔다. 그럼에도 지금 아가레스의 표정은, 그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 순간 선과 악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왕의 눈동자가 죽어가는 마왕들과 대천사들을 응시했다. [지금 저놈들을 살려야, 다음 세대에도 ‘선악’이 이어질 것 아닌가?] [마왕인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이상하군요.]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너도 그다지 대천사처럼 보이진 않아.] 아가레스의 부루퉁한 목소리를 들으며 메타트론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토록 오래 싸워온 악마가 어째서 이처럼 가깝게 여겨지는 것인지. 지금 그들의 행동은 선행인지, 아니면 악행인지. 메타트론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가장 오래된 선악의 설화가 당신들을 바라봅니다.] 설령 그들이 설화 그 자체라 한들. 이것은, 설화들이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 혼자로는 무립니다.] [알고 있어.] [‘선악을 가르는 벽’이 거칠게 흔들립니다!]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선과 악의 대표가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서 이들을 살린다고 종말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어.] 메타트론이 만든 봉인구의 위에, 아가레스가 손을 올렸다. [근데 그건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대천사와 마왕이 손을 잡았다. 그러자 봉인구가 눈부신 빛을 터트리며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 구라기보다는 한 척의 배처럼 보였다. 쿠구구구구! 그것은 한때 세계의 멸망에 맞서 지상의 존재들을 보호했던 방주였다. 대홍수 속에서 종을 보호하기 위해 현현했던 신화 속의 배. 메타트론이 말했다. [성좌들을 대피시키십시오.] [알겠습니다, 서기관.] 메타트론의 말에 성좌들 사이에 섞여 있던 ‘방주의 주인’이 배를 이끌었다. 하나둘, 살아남은 발키리들이 주변의 성좌들과 화신들을 방주에 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주의 설화를 지탱해야 하는 메타트론과 아가레스는 그 배에 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메타트론과 아가레스만이 아니었다. [멍청한 짓을 하셨군요,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스모데우스.] 말을 섞을 틈도 없이, 아스모데우스의 클로가 아가레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한 아가레스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불쾌하다는 듯,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그만 ‘벽’을 내놓으시죠. 당신에겐 ‘악’을 대표할 자격이 없습니다.] 꾸드득 파고든 클로가 아가레스의 내부를 헤집었다. 새카만 설화를 흘리며 아가레스가 말했다. [너도 집요한 녀석이구나. 어째서 그렇게 ‘벽’을 원하는 것이냐? ‘벽’을 가지면 신이라도 될 수 있다 착각하는 거냐?] [그걸 가진다고 신이 될 수는 없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시나리오’의 비겁자들중 하나는 될 수 있겠죠.] [그렇군. 마지막 시나리오에 대해 알고 있었나······.] 씁쓸하게 웃던 아가레스의 두 눈에 광기가 스쳤다. [미안하지만, 너는 ‘벽’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당신이 죽으면 당신의 ‘벽’은―] [내 ‘벽’은 이미 다른 녀석에게 넘겼거든.] [그런······.]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마왕의 본능으로, 아스모데우스는 아가레스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대체 누구에게?] [그건 네가 알아내야지.] 괴성을 지른 아스모데우스의 클로가 아가레스의 목을 꿰뚫었다. 피처럼 쏟아지는 설화 파편 속에서, 아가레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답지 않나, 메타트론? 이것이 우리의 종말이다.] 희미하게 이어지는 선악의 이중주가 멸망하는 밤하늘을 흘렀다. 떨어지는 유성우를 보며, 아가레스가 웃었다. * [성좌, ‘구원의 마왕’이 ‘희생의지 Lv.9’를 발동 중입니다!] “저거 열 받네 진짜. 끌 수도 없고.” 한수영은 씩씩거리며 외쳤다. 점점 불어나는 암무 속에서, 세 사람은 늘어나는 분체들과 싸우고 있었다. 저 너머에 김독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셋 중 누구도 혼자의 마력으로는 저 암무를 뚫을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한 사람을 선택해 마력을 몰아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세 사람 중 누구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단순히 이것이 김독자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누가 가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저 별을 향해 가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다. 암무는 시시각각으로 짙어지고 있었고, 묵시룡의 충격파는 더욱더 거세지고 있었다. 김독자는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구할 수 있을 확률은 낮다. 설령 김독자를 구해낸다 하더라도, 김독자와 함께 죽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것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다툼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죽을 사람을 뽑는 자리였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유중혁의 말이었다. 그 ‘죽지 않음’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아는 정희원은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수영이 더 빨랐다. “잘 생각해 정희원. 넌 혼자 죽는 것도 아니야.” 순간, 정희원은 자신의 등에 동여맨 십자가의 무게를 느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그녀가 죽으면, 그녀의 등 뒤에 매달린 사람도 죽는다. “그럼 네가 대신 현성 씨 좀―” “정희원! 뒤!” 정희원은 한수영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차, 싶었던 순간 뭔가가 그녀의 등을 밀쳤고, 정희원은 비틀거리며 지상으로 낙하했다. 대천사의 날개를 펼쳐 간신히 멈춰섰을 때, 유중혁과 한수영의 신형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망할! 이게 무슨─ 멈춰!” 마력조차 받지 않고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정희원은 그들이 무슨 결심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을 알았기에, 치솟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김독자는 그녀에게 구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는 그들을 쫓아가서는 안 되었다. “우리엘.” 뜨거운 감정을 씹어 삼키며, 정희원은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뻗어 나온 대천사의 마력이, 어둠을 뚫고 날아가는 두 사람의 등 뒤에 눈부신 날개를 만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강한 약동이 느껴졌다. 그것은 누군가의 심장 소리였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거세게 뛰는 진동.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저도요, 현성 씨.” 우주를 향해 멀어지는 두 개의 빛살을 보며, 그리고 그 너머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연약한 별을 바라보며, 정희원은 무언가를 참아내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데 이번엔 우리 차례가 아닌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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