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414화 묵시룡과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대결. 재앙과 재앙의 충돌에 별들이 추락했고, 그 멸망의 정경은 <스타 스트림> 전역에 방송되고 있었다. [이 섬의 끝이 다가오는군요.] 만다라의 수호자 역시, 패널을 통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환생자들의 섬’이 부서지기 시작하며, 그의 화신체에도 조금씩 노이즈가 끼고 있었다. 그런 만다라의 수호자를 향해, 수조 속의 유상아가 말했다. ―이미 알고 계셨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유상아의 영혼이 말없이 빛을 뿜었다. 그녀의 화신체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제가 ‘도서관’에서 본 당신은······. [그 이야기는 아껴두십시오.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원 전체에 무거운 진동이 일었다. 불온하고 탁한 공기가 근방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르르르, 하는 짐승의 울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사방 공간의 모서리가 만들어 낸 그림자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불길한 기운에 유상아의 영혼체도 불안하게 떨렸다. 수조 속에서 일어나는 기포가 많아지자 석존이 나섰다. [틴달로스의 사냥개들이여. 사냥감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군요.] 석존이 가볍게 염불을 외우자, 주변을 배회하던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다른 사냥감을 찾아 떠나는 들짐승들처럼. 유상아는 그 그림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방금 그건······. [아해여.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의 문이 가까워졌습니다.] 석존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의 목에서 발열하는 염주들이 일제히 허공에 떠올랐다. 그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알고 있는 유상아가 물었다. ―저는 되살아나지 못하는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 섬이 끝나면 당신도 죽을 테니까요. 그럼 저도 부활할 수 없겠죠. [아해여, 우리는 거래를 했습니다. 아해는 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 몸은 아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그리하여 이 세계의 평형을 맞추는 것.] 석존은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아해는 무사히 환생할 겁니다. 아직 화신체의 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기에 당장 활동하진 못하겠지만,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그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유상아는 그게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채 묻기도 전에,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잠깐 쉬고 계시지요.] 유상아의 영혼이 잠들자, 석존은 수조에서 그녀의 화신체를 꺼내어 어딘가로 전송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사원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어느새 패널 화면이 바뀌어 있었다. 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사내가, 각각 흑과 백의 코트를 입은 채 서로를 마주 보는 장면. [마침내 당신이 움직이는군요. 수레의 끝에 선 존재여.] 잠시 그 광경을 보던 석존이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슬슬 이쪽도 준비를 해야겠지요.] * 대체 어떻게. 유중혁은 그 말을 싫어했다. 회귀자로 살다 보면 가장 자주 듣는 말이 그것이었다. 레파토리의 변용도 뻔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에서부터 “대체 어떻게 네놈이?”에 이르기까지. 그 말을 듣는 것이 지겨웠던 유중혁은 제일 먼저 그 대사를 던질 인물부터 죽인 적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유중혁은 “······대체 어떻게?” 스스로의 입으로 그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것이, 상대에게 비웃음을 살 행동임을 잘 알면서도. 츠츠츠츠츠······. 휘몰아치는 개연성의 폭풍 속에 그가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얼굴이었고, 이곳에 있어서도 안 될 존재였다. [해당 지역의 혼돈 수치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시나리오의 균형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비틀거리면서도, 유중혁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장 난 시계가 미뤄왔던 시간을 한꺼번에 돌리듯 그의 안에서 무수한 가설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 「녀석은 김독자여야 했다」 「하지만 김독자가 아니었다」 「1863.」 「하지만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내가 그 말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마치 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눈앞의 존재가 답했다. 유중혁은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마주 보았다. 환한 스파크 속에서 빛나는 흰색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뻥 뚫린 어둠이 있어야 할 두 눈의 자리에 그와 같은 크기의 동공이 있었다. 눈만이 아니었다. 코도, 입도, 턱선과 체격도. 마치 거울을 보는 듯 자신과 흡사한 외형. 차이점이 있다면, 그 존재의 뺨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다는 것. 유중혁은 발작적으로 말했다. “네놈은 내가 아니다.” 【맞아. 나는 네가 아니지.】 새카만 어둠을 담은 눈동자가 허리에 매달린 김독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성좌 ‘구원의 마왕’을 응시합니다.] 마치 확인사살처럼 내려앉은 메시지에 유중혁은 몸을 떨었다. “은밀한 모략가······.” 눈앞의 존재가, 정말 그 ‘은밀한 모략가’라고? 김독자를 1863회차에 보내고, 자신에게 김독자의 비밀을 알려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무수한 ‘간접 메시지’를 보내왔던······ 그 ‘은밀한 모략가’가, 1863번의 회귀를 거듭한 자기 자신이라고? 멀리서 들려온 폭음에 유중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김독자를 내놔라.” 상대는 ‘은밀한 모략가’다. 혼돈에서 태어난 이계의 신격. 예측불허의 행동을 반복해온 놈의 패턴을 생각하면, 저 모습은 얼마든지 가짜일 수······. 【그렇게 둔한 머리로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군.】 “닥치고 김독자를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코앞에서 흘러나오는 격에, 유중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의 유중혁은 최상위격의 설화급 성좌인 인드라와도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심지어는 커다란 상처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존재에겐······. 【네놈이 뭘 할 수 있지?】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유중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심지어 놈이 나타난 후로는, 주변을 억압하던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는 기미까지 보였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시나리오의 부조리에 화가 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연성을 허락한 <스타 스트림>에 증오가 일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지금까지 은밀한 모략가가 행한 일들을 생각한다면, 놈이 지금 이곳에 현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은밀한 모략가는 제천대성이나 우리엘, 흑염룡과는 다르다. 놈은 이계의 신격이고, 강림에 어마어마한 개연성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츠츠츠츠츳······!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은밀한 모략가’의 전신은 강한 후폭풍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 어떤 존재라 해도, 개연성의 후폭풍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주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김독자였다면.」 마치 김독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유중혁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개입한 거지?” 【이제 때가 되었으니까.】 “······때가 되었다?” 그 물음과 함께 공허의 저편에서 굉음이 발생했다. 묵시룡과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의 싸움이 이제 절정에 이른 것이었다. 가공할 폭발 속에, 일대의 공간에 거대한 왜곡장이 발생했다. 은하계를 통째로 뭉그러뜨리는 그 풍경에, 유중혁은 정말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확실히 저런 개연성이라면 이제 뭐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저 ‘은밀한 모략가’는,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이다. 쿠구구구구구! 상공에서 [그레이트 홀]들이 열리고 있었다. 그렇게나 많은 [그레이트 홀]이 동시에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단 하나만 열려도 세계를 멸망시킨다는 재앙의 구멍. 그 아득한 구멍들을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촉수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오오오오오오!】 【■■■······■■■■■■】 【위대한 모략이시여!】 【사라진 섬들의 융기가 시작될 것이다······!】 ······. 괴기스러운 울음들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탁기로 물드는 진언들. 그 진언들에 반응하듯, 김독자를 낚아 챈 ‘은밀한 모략가’의 몸이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그레이트 홀]이 있는 방향이었다.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깐, 기다려라!” 아무런 확신도 없는 채로, 유중혁은 ‘은밀한 모략가’가 향하는 길목을 막아섰다. 그저 길을 막은 것뿐인데 코에서 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시야가 흔들렸고, 검을 쥔 손이 떨렸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말했다. “너는 갈 수 없다.” 그런 유중혁을 보며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마라. 회귀가 항상 온전한 다음 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유중혁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하나의 생은 그 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나간 생들은, 언제나 다음 회차의 저주로 남는다. 검을 으스러져라 쥔 유중혁이 말했다. “나는 다음 회차로 가지 않는다.” 【······그래?】 다음 순간, 유중혁은 전신이 우그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어떤 기척도, 전조도 없는 공격. 그저 시선의 움직임만으로, 유중혁의 전신은 압착기에 들어간 것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피를 토한 유중혁이 외쳤다. “얕보지 마라!”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의 기운이 전신을 감싸자, 몸을 억압하던 격의 위세가 일순 주춤했다. 지금은 김독자의 의식이 없으니, <김독자 컴퍼니>가 가진 ‘거대 설화’의 최고 담화자는 유중혁이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움직였다. 모든 마력을 투사한 [흑천마도]에 파천의 결이 실렸다. 하늘을 부수고, 별을 베었던 칼. 그 칼이, 이제 자기 자신을 베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은 순수한 기습. 하지만 칼은 날카로운 파찰음과 함께 정지했다. 금속성의 무언가가 그의 칼을 받아냈던 것이다. 유중혁의 동공이 커졌다. [진천패도]. 그의 세계인 3회차에서는 오래전에 부러진 그 칼이, ‘은밀한 모략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두 자루의 칼이 다시 한 번 부딪치며 불꽃 섞인 광풍이 일었다. 유중혁의 코와 입에서 후두둑 피가 쏟아졌다. 그저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우주 너머로 영혼이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단 한 번의 충돌로 오른팔이 박살나고 늑골이 부서졌다. 그 끔찍한 통증을 내색하지 않은 채, 유중혁은 계속해서 자신의 격을 끌어 올렸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해 볼 만하다는 뜻이었다. “네놈도 불구인 것은 마찬가지다.” 예상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은밀한 모략가’의 위상은 불안해지고 있었다. 존재에 끼는 스파크가 점점 심해졌고, 코트와 화신체를 유지하던 설화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설화들이 뒤섞이기라도 한 것처럼. 「분명 놈은 무리하고 있다. 시간만 끌면 돼.」 게다가 ‘은밀한 모략가’는 아까부터 뭔가를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표정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유중혁은 느낄 수 있었다. 놈의 격은 무언가를 꺼리고 있다. 즉, 녀석은 지금 마음 놓고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시간 끌기라······ 너에겐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군. 김독자에게 배운 건가?】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많아졌다는 것은, 저쪽도 초조해졌다는 증거. 【너는 아직 3회차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의 네 목적과 김독자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이다. 어째서 김독자에게 집착하는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김독자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럼 나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하면 되겠군.” 순간 ‘은밀한 모략가’의 눈가에 희미한 감정 같은 것이 스쳤다. 마치, 유중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한 눈빛. 【너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회차의 마지막 시나리오는 김독자도 모르는 형태일 테니까.】 “그놈 혼자라면 그렇겠지.” 【우습군. 아무것도 모르는 3회차 주제에······.】 “3회차지만.” 유중혁의 전신에서 설화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네놈이 모르는 3회차를 살았다.” 3회차에서 새로이 얻은 설화들이 유중혁의 일부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떤 문장들은 구슬프게 흘렀고, 또 어떤 문장들은 한없이 유려하고 아름답게 흘렀다. 지금까지의 생에서는 없었던 설화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의 삶에서도 없을 설화들이었다. 그 설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아니, 나도 알고 있는 삶이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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