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411화
‘환생자들의 섬’을 탐험하는 동안, 장하영은 몇 번인가 ‘정체불명의 벽’을 사용했다. ‘정체불명의 벽’의 1단계 기능인 ‘채팅 시스템’을 사용해 성좌들에게 말을 걸어본 것이다.
―구원의 마왕님.
―······너 왜 그렇게 부르냐?
언젠가부턴 제법 뻔뻔하게, 김독자에게 말을 걸 수도 있게 되었다.
한동안 ‘구원의 마왕=김독자’설을 부정하고 싶어서 자아분열이 온 적도 있었지만, 이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하영이 좋아하는 구원의 마왕은 김독자고, 얼간이 김독자는 구원의 마왕이다. 장하영은 그 사실을 간신히 받아들였다. 물론 전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저는 구원의 마왕님께 말건 거예요 그러니 김독자는 대답하지 마세요.
―······.
―어쩔 수 없어. 닥치고 넌 내가 원하는 대답만 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막상 김독자가 그렇게 묻자, 꾹 감추고 있었던 설움이 폭발했다.
―나는 왜 ‘김독자 컴퍼니’에 안 끼워주는데?
늘 묻고 싶던 말이었다. 모든 동료들이 ‘별자리의 맥락’을 통해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는 것을 보며, 장하영은 스승들과 함께 시나리오의 뒤편에 남겨졌다.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저 별자리 중의 하나였으면 좋겠다고.
내겐 자격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처음부터 김독자와 시나리오를 함께해온 것이 아니니까.
마계에서 혁명을 함께하고, 마왕 선발전을 겪어냈던 시간들을 장하영은 모두 기억했다. 그것은 장하영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희열이었고, 이제는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였다.
그래서, 장하영은 이제 자신도 김독자의 동료가 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모두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네가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돌아온 대답을 보며, 장하영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제와서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런데
―강제로 차원 이동된 것도, 마계에서의 삶도 전부 네 의지가 아니었잖아.
따질 수가 없었다. 마치 숨이 멎은 것처럼, 장하영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어지는 메시지를 읽는 것이 전부였다.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하영아.
그것은 ‘구원의 마왕’의 말이었다.
누군가를 구해내는 설화에 취해, 자기 자신의 생명마저 등한시하는 저 고고한 성좌의 말이었다.
그랬기에 그것은 장하영의 친구 ‘김독자’의 말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벽’이 말하고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와도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 벽으로도, 김독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부탁한 것처럼 그는 철저한 ‘구원의 마왕’일 뿐이었다.
‘아니,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하겠냐고.’
그랬기에, 장하영은 김독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자신의 이름을 갖습니다!]
그것을 위해, 장하영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불가능한 소통의 벽’으로 진화합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의 2단계 기능이 개방됩니다!]
새로운 벽의 힘을 개방하고, <김독자 컴퍼니>를 도울 수 있는 성좌를 설득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츠츠츠츠츠츳!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독자 컴퍼니>의 얼굴들이 보였다. 장하영은 차오르는 격에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외쳐댔다.
“다들 정신 차리고 빨리 움직여! 난 그렇게 오래 못 버틴다고!”
의식이 점차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장하영은 그렇게 외쳤다.
성좌의 존재감이 장하영의 화신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불가능의 희구 Lv.1’을 활성화 중입니다!]
불가능의 희구. 그것은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가진 공능으로, 배후성이 없는 장하영이 한시적으로 누군가와 ‘배후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화신체를 내려다봅니다.]
‘긴고아의 죄수’, 제천대성 손오공.
김독자의 말에 따르면 이 <스타 스트림>에서 최강에 손꼽히는 성좌 중 하나.
그 위대한 성좌는 오만한 시선으로 세계를 훑어보더니, 고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상 나오니까 너무 귀찮군.]
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 장하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 도와준다면서요! 내가 고민도 들어줬잖아? 빨리 움직여요!”
장하영으로서는 황당한 노릇이었지만, 사실 제천대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자신의 몸에 현현한 제천대성의 상태가 이상했다.
즈즈즈즛.
마치 여러 존재가 일시적으로 ‘하나’가 된 것처럼, 제천대성의 위상이 불안정했다. 어쩌면 그가 말한 ‘귀찮음’은 바로 저 현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다.
“빨리 약속 안 지키면 머리카락을······!”
[해. 한다니까?]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제천대성이 재차 여의봉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격에 몇몇 성좌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제천대성. 지금 저들을 올려보내는 것은 자살 행위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넌 누구냐?]
[······나는 척준경이다.]
제천대성의 격에 대항하듯, 척준경이 가슴을 폈다. 제천대성은 그런 척준경의 눈동자에 새겨진 감정을 가만히 읽더니 물었다.
[네놈은 손 선생을 알고 있느냐?]
척준경은 잠시 생각한 후에야 ‘손 선생’이 제천대성 본인을 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대가 한때 유명했던 성좌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하긴, 이 몸이 시나리오에서 제대로 활동한 지 너무 오래되긴 했지.]
하품을 한 제천대성이 여의봉을 축소시켜 자신의 귀를 팠다.
그 오만함에 척준경이 화를 내려는 순간.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척준경을 비롯한 성좌들의 화신체가 허공을 날았다. 놀란 척준경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단지 격을 개방한 것만으로 주변의 성좌들을 위축시킬 정도의 존재감.
[스파크가······!]
성좌들 중 일부가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제천대성이 현현한 장하영의 몸이 엄청난 스파크로 물들고 있었다. 성좌들이 격을 개방할 때 개연성의 스파크가 발생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시나리오 지역이 89번 시나리오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개연성은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저토록 눈부신 스파크라니······.
[보아라.]
제천대성의 동서남북으로 팔괘의 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
문자들은 제천대성의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 주변을 맹렬히 회전하며 금빛 격류를 토해냈다.
그런 제천대성의 기세를 감지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밀려들었다.
츠츠츠츠츳!
개연성 스파크는 곧 후폭풍의 전조. 탐나는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듯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제천대성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달려드는 분체의 숫자는 대여섯체.
설화급 성좌는 물론이고 신화급 성좌라도 상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제천대성은 물러서지 않았다.
까마득한 암무가 제천대성의 전신을 덮는 순간, 그의 몸이 금빛 섬광으로 화했다.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와 함께, 여의금고봉이 아가리처럼 벌어진 암무를 꿰뚫었다.
쿠드드드드드······!
고작 성유물 하나에 얻어맞았다고 해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타격을 입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불어난 여의금고봉의 궤적이 수백 갈래로 변해 분체를 가격하자, 놀랍게도 분체들의 입에서 괴이쩍은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르르르르륵······!
심지어 어떤 분체는 여의금고봉을 피하려는 듯한 낌새까지 보였다.
창공을 호화스레 물들이며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에 대적하는 제천대성의 격에 전장의 모든 성좌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디오니소스도, 수르야도, 척준경도.
심지어는 신화급 성좌인 하데스도 감탄한 표정이었다.
[혼돈의 술(術)이로군.]
하데스는 제천대성의 여의금고봉에 깃든 불온한 힘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닌 힘.
독특한 설화를 쌓아온 제천대성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유의 신선술(神仙術)이었다.
미후왕(獼猴王).
제천대성(齊天大聖).
투전승불(鬪戰勝佛).
무수한 이름으로 존재해 온 ‘긴고아의 죄수’, 손오공이 싸우고 있었다.
척준경이 전력을 다해 간신히 하나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저 공허의 재앙들과, 다대일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에 질 수 없다는 듯, 두 명의 성좌가 가세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진력을 짜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질 수 없다는 듯 포효합니다!]
제천대성의 격 위로 두 성좌의 격이 실리고 있었다. 흑염룡의 [흑염]과 우리엘의 [지옥염화]가 뒤섞이며 제천대성의 여의금고봉이 비정상적인 크기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에 잊힌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선과 악, 중립의 별들이 마침내 한자리에 모였으니」
세 가지 격이 뒤섞이며 눈이 멀 듯한 섬광이 터졌다.
고오오오오!
창공을 향해 휘두른 여의봉이 엄청난 부피로 하늘을 강타했다. 천지가 뒤흔들리며 광대한 충격파가 시공간을 비틀었다.
비명을 내지른 성좌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암무로 뒤덮여 있던 하늘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천대성이 말했다.
[가라.]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세 인물이 움직였다. 허공답보를 사용한 유중혁이 달렸고, 흑염룡의 분신을 탄 한수영과 대천사의 날개를 빌린 정희원의 몸이 수직으로 솟구쳤다.
세 사람의 몸은 순식간에 암무를 관통해 벌어진 하늘의 균열을 지나쳤다.
대기권을 지나치는 순간 세 사람의 몸은 급격하게 둔해졌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과 ‘묵시록의 최후룡’의 충돌이 만들어 낸 우주적 공간에서 엄청난 설화들의 교환이 오가고 있었다.
“큽······.”
그 가공할 설화의 밀도에 한수영의 입에서도 주륵 피가 흘러나왔다. 그저 설화를 감각하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부스러져 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 공간의 어딘가에, 김독자가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빵 부스러기처럼 흩뿌려진 김독자의 흔적을 찾아냈다.
「이렇게 해야만 제대로 된 전(轉)을 얻을 수 있다.」
부서진 김독자의 파편이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먼저 손을 뻗은 것은 정희원이었다. 마치 작고 연약한 새를 감싸듯, 정희원은 그 파편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품었다.
착각일까. 순간 문장에 찍힌 마침표의 너머로 김독자가 바라는 아득한 세계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 문장을 붙잡고, 다시 그 다음 문장을 붙잡고······. 마치 구름사다리를 건너듯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그들은 저 결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한수영이 말했다.
“너도 성좌는 성좌구나, 김독자.”
모든 성좌는 설화에 취해 있고, 자신이 추구하는 ‘단 하나의 설화’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모든 설화를 탐닉한다.
때문에 성좌들에게는 진정한 타자가 없다.
결국 성좌들은 모든 설화를 자기 자신으로 만들 뿐이니까.
「그 어떤 성운에도 대항할 수 있는 설화를, 일행들이 얻게 될 것이다.」
설령 그 설화가, 다른 존재들을 위한 것이라 한들.
“씨발, 내가 언제 이런 이야기 보여달래?”
그들을 발견한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몰려들었다.
한수영의 손에서 [흑염]이 불을 뿜었고, 정희원의 [심판자의 검]이 [지옥염화]를 발동했다. 유중혁의 [파천검도]가 공허를 비집고 길을 열었다.
본래였다면 맞설 수 없는 재앙. 그럼에도 그들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이 길의 끝에 존재하는 별 때문이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성흔 ‘희생의지 Lv.9’를 발동 중입니다!]
희생의지. 자신의 목숨을 걸어 동료들의 전투력을 격상시킬 수 있는 필살의 성흔.
그 별빛에 힘입어 유중혁은 검을 휘둘렀고, 정희원은 염화를 방출했으며, 한수영은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희미하게, 김독자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사람의 숨소리처럼 약해진 설화들이 그들에게 김독자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츠츠츠츳······!
우리엘과 흑염룡의 격이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한계치에 다다른 것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고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화장실이 급해서 힘을 쓰기 어렵겠다고······.]
짙은 암무의 까마득한 건너편. 마침내 희끄무레한 별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중혁도, 한수영도 그 별을 보았다. 이제야 간신히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별.
하지만 그 별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험했다. 밀려오는 분체는 점점 많아지고 있었고, 주변의 격압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었다.
연료 따윈 고려하지 않고 날아온 편도 로켓처럼, 세 사람의 몸 안에 남은 마력은 이제 많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분체들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만약 셋 모두가 저 분체들을 뚫고 돌진한다면, 김독자는 물론이거니와 그들도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에게 남은 편도행 마력을 모두 한 사람에게 모은다면 어떨까.
“······방법은 하나뿐이다.”
세 사람 모두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김독자를 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저 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