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410화
척준경은 자신의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환생자들의 섬’에서 다져진 그의 설화들이 그의 몸을 감싼 채 근육처럼 꿈틀거렸다.
[가지, 작은 초월좌여.]
척준경의 어깨에 키리오스가 올라섰다. 두 사람은 전에도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상대하며 합을 맞춘 적이 있었다.
허공을 향해 도약한 척준경의 검 위로 키리오스의 [전인화]가 흘렀다.
환한 백청의 기류가 척준경의 몸을 감싸자 그는 번개의 신처럼 번쩍였다.
[나 척준경은 오로지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호기로운 격이 기세를 드러냈다.
산을 베고, 바다를 베었던 그의 검이 베지 못했던 적이 눈앞에 있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그는 미완성이었던 사검(四劒)을 수련해왔다. 측량할 수조차 없는, 저 막막한 공허에 대적할 단 하나의 검식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쌓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결과였다.
꾹꾹 눌러 담은 척준경의 설화가 발화했고, 주변을 키리오스의 전격이 맹렬히 회전했다.
지상의 성좌들이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하나의 성좌와 하나의 초월좌.
그 둘의 격이 우습다는 듯,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가 그들을 향해 입을 벌렸다. 그 암무의 주둥이가 별의 빛을 삼키려는 순간.
제 사식(四式).
척준경의 검이, 빛을 뿜었다.
사검참허(四劍斬虛).
안개의 중심부가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짐승의 뱃가죽이 갈라지듯, 그 중심부에서 뭔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암무 속에 도드라진 노란 눈동자가 설화를 토해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고려제일검’의 무위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벌립니다!]
지상의 모든 성좌들이 경악했다.
아무리 분체라고는 해도, 상대는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청소부이자, 뒤틀린 개연성을 잡아먹는 재앙.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고 알려져있는 그 재앙을, 척준경이 베었다.
심지어는, 그 검식의 형태조차 제대로 본 이가 없었다.
오직 유중혁만이 그 검을 알아보았다.
별을 베었던 유중혁조차 그 순간만큼은 놀란 얼굴이었다.
“의형검(意形劍)······.”
자신의 의지만으로 세계를 베는 힘. 무공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최고의 경지. 척준경은 성좌가 되어서야 그 고절한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나의 검이 벨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터지는 빛살 속에서 무력하게 흩어지는 안개를 보며, 척준경 또한 해방감을 느꼈다.
저것을 베기 위해 인내한 시간이 얼마였던가.
무상(無想)의 경지에 올라, 자신의 의지가 곧 검이 되던 순간의 희열. 사검식 ‘사검참허’는 그가 통찰한 무공의 정화였다. 그는 유중혁 쪽을 보며 외쳤다.
[가거라, 후인들이여! 가서 김독자를―]
그러나 척준경은 그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뒤쪽에서 전해진 엄청난 충격이 그의 화신체 전체를 망가트렸던 것이다.
낙하한 척준경은 운석처럼 떨어져 땅바닥에 틀어박혔다.
흔들리는 사위 속에서 간신히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척준경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깨달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겠군.]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척준경은 자신의 화신체가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어떻게?
방금, 내가 베었는데.
마치 조금 전의 일이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하늘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늘을 까마득히 덮을 만큼 많은 분체들. 족히 수십 개체는 되어 보이는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지상의 산 것들을 먹어 치우기 위해 강하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위인급 성좌들이 지평선 너머로 달아났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재앙은 몰려왔다.
쩌저저저저적!
안개 사이로 돋아난 이빨에 성좌들의 화신체가 연약한 과육처럼 으깨졌다. 피할 곳도, 달아날 곳도 없었다. 묵시룡의 충격파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이쪽도 절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모두 침착해. 방금 봤잖아. 싸울 수 있는 존재라고!]
디오니소스가 목청이 터져라 외쳤지만, 성좌들은 규합이 되지 않았다.
[이런 제길······.]
앞서 두 번의 충격파를 견디며 상당량의 격을 소모한 <올림포스>의 성좌들은 충분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개연성을 지나치게 소모한 <명계>도 설화를 고르고 있었다. 그나마 선전하는 것은 우리엘과 흑염룡이었다.
“꺼져! 꺼지라고, 이 새끼들아!”
유중혁과 한수영, 그리고 정희원은 서로의 등을 맞댄 채 격을 방출했다.
밀려오는 암무에 맞서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김독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던질 계획이었다. 하지만 틈이 보이질 않았다. 이대로는 김독자를 구하기도 전에 일행들이 전멸할 판이었다.
“빌어먹을! 또 누구 없어? 김독자 친구 또 없냐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도와줄 만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흑염룡의 격도, 우리엘의 격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하늘의 서기관’을 노려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아직 ‘파멸공허의 오른손’은 쓸 수 없다고 말합······.]
환생자들의 섬을 덮은 암무는, 이제 섬을 삼키기 위한 준비 운동을 마친 상태였다.
멀리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같은 것이 비친 것은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폭연을 뚫고 뭔가가 도착했다.
부연 먼지 속에서 드러난 차는 <김독자 컴퍼니>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흐음. 여기서 다치면 곤란하다네. 자넨 찍어야 할 광고가 세 개나 더 남아있어.]
[X급 페라르기니]의 문이 열리며 머리가 희끗한 중년인이 방긋 손을 흔들었다. 파인애플이 그려진 분홍색 폴로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그 어마어마한 패션감각에 한수영이 입을 벌렸다.
“······양산형 제작자?”
그러자 주변에서 재앙에 맞서던 몇몇 성좌들이 중얼거렸다.
[양산형 제작자? 강한 성좌인가?]
[아니, 별 도움은 안 되는 영감이다.]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군. 코인에 눈이 멀어 쓰레기 같은 설화들을 찍어낸다는······.]
한수영은 그런 ‘양산형 제작자’를 바라보았다.
양산형 제작자는 설화급 성좌다. 하지만 그 급수에 비해, 느껴지는 격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양산형 제작자가 허허롭게 웃었다.
[허허, 내가 어지간히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양이로군.]
그 여유로운 발언에 입으로 포도주를 쏟아 붓던 토르가 외쳤다.
[어이, 꾸준좌! 왔으면 빨리 손이나 보태라고! 지금은 늙은이 손도 급하니까!]
[흐음, 난 싸우러 온 건 아닐세.]
[그럼 왜 왔어!]
[코인이나 좀 보태주려고.]
[이 미친 늙은이가······ 지금 그딴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성좌들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그딴 소리 할 거면 꺼져! 코인에 눈먼 늙은이가······!]
하지만 양산형 제작자는 주눅 든 기색이 아니었다.
순간, 한수영은 언젠가 김독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녹음실 너머로 도깨비들과 대화를 나누는 ‘양산형 제작자’를 보며, 한수영은 물었다.
―김독자. 저 성좌 뭔데?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왜 도깨비들이 빌빌 기지?
그 물음에, 김독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코인이 많잖아.
그때의 김독자처럼, 지금의 양산형 제작자도 웃고 있었다.
[나는 젊은 친구들이 이해가 안 돼. 어째서 코인을 무시하는 건가?]
[그깟 소모품 따위―]
팽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양산형 제작자의 손바닥 위에 코인이 떠올랐다. 1코인이었다.
[자세히 보게. 정말 이게 그저 ‘소모품’으로만 보이나? 왜 저 <스타 스트림>이 굳이 이 ‘코인’을 거래의 단위로 사용하는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나?]
[무슨 개소릴 하고 싶은 거야!]
이제 코앞까지 밀려온 분체들을 응시하며, 양산형 제작자가 말했다.
[힌트를 주지.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은 ‘설화’로 이루어져 있어. 그렇다면 ‘코인’은 어떨 것 같은가?]
[······노망이라도 든 거냐? 바쁘니까 말 걸지 마!]
성좌들은 그딴 헛소리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허공을 향해 마력을 분출하기 바빴다.
하지만 한수영은, 급박한 와중에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양산형 제작자의 말 그대로였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것은 설화다.
그런데, 왜 <스타 스트림>의 거래 단위는 ‘설화’가 아니라 ‘코인’이었을까?
츠츠츠츠츳!
양산형 제작자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개연성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개연성의 영향 속에, 양산형 제작자의 격이 증폭되고 있었다.
그의 격은 순식간에 위인급을, 다시 설화급을 넘었다.
가공할 격의 증폭에 깜짝 놀란 선과 악의 성좌들이 동시에 양산형 제작자를 돌아보았다.
[아주 오래된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양산형 제작자. 그 역시 자신만의 ‘단 하나의 이야기’를 추구하는 성좌였다.
그렇다면 그가 추구하는 ■■는 무엇일까.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야. 자본(資本)이지.]
양산형 제작자가 하늘 높이 코인을 던졌다.
유중혁도, 한수영도, 그리고 정희원도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코인에 얼마가 적혀 있는지는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이 <스타 스트림>의 누구보다도 코인이 많다네.]
정확히는, 얼마가 적혀 있더라도 믿을 것 같았다.
코인으로 저런 기적을 보이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코인을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대량의 코인을 사용하였습니다!]
[설화,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잠시 후, 코인이 사라진 하늘 저편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치는 문이 열리고 있었다. 게이트였다.
[편도 게이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도깨비와 관리국만이 열 수 있었던 게이트를, 고작 성좌 하나가 열어낸 것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관리국이 해당 설화의 개연성을······.]
[소환이 시작됩니다!]
게이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인형(人形)들이 있었다.
휴양이라도 온 듯 한가한 얼굴로, ‘양산형 제작자’가 어깨를 으쓱 들었다.
[참, 자네들 말이 맞는 것도 하나 있어. 나는 싸움을 잘 못해.]
게이트 너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산형 제작자가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말을 이었다.
[대신, 이걸로 싸움을 잘하는 친구들을 데려올 수는 있지.]
게이트를 넘어서 전장에 초환되는 이들.
그들의 정체를 제일 먼저 알아본 이는 유중혁이었다.
“······사부님?”
파천검성과 초월좌들이 게이트를 건너 날아오고 있었다.
초월좌들 중에는 파천검성을 제외하고도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일권무적 유호성.
‘환생자들의 섬’의 최강자인 그 또한, 이번 시나리오를 돕기 위해 참전했던 것이다. 아마 파천검성이 늦게 온 이유는 저들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유중혁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들만으로 막을 수 있을까?
설화급 성좌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의 분체가 수십여 체에 달한다. 아무리 파천검성과 유호성이 강하다 한들, 초월좌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그런데 초월좌들의 후미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와 씨, 진작에 이렇게 오게 해주지!”
장하영이었다.
몇몇 일행들이 소리치며 장하영을 불렀다.
장하영도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 누굴 좀 설득하느라.”
······설득?
장하영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새로운 강자들의 등장에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의 분체들이 대거 방향을 틀었던 까닭이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계의 신격을 보며, 장하영의 표정도 긴장으로 물들었다.
장하영도 그것들을 마계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으로는, 분체 하나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다음 순간, 장하영의 몸에서 황금빛 아우라가 폭발했다.
막대한 격이 장하영의 몸을 중심으로 해방되고 있었다.
장하영의 금발이 물결처럼 퍼지며, 하얀 이마 위로 작은 금테가 자라났다. 아름다운 황금빛 털옷이 전신을 가죽처럼 덮었다.
천천히 눈을 뜬 장하영의 두 눈에서 화안금정(火眼金睛)의 요기가 소용돌이쳤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눈을 가늘게 뜹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탄식합니다.]
[중립 계통의 모든 성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그곳의 모두가 그 격의 정체를 알아봤다.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공으로 뻗은 장하영의 손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봉이 쥐어져 있었다.
한없이 오만하고 고고한 눈동자가 창공을 응시하자, 세계의 모든 구름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김독자를 구하러 가라.]
그 말을 하는 이는 장하영이 아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