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409화 Episode 78. 전(轉) 전신의 근육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저렸다. 순간적으로 사라졌던 의식이 되돌아왔고, 나는 새카만 공허 속에서 설화를 토하며 눈을 떴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당신을 일별합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더 네임리스 미스트(The nameless mist). 나는 73번째 마계에서 이 녀석의 분체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고작 분체의 힘만으로도 내 마계를 멸절시키고, 설화급 성좌와 초월좌들을 거꾸러뜨린 녀석. 나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재앙의 아가리 속에 들어와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것만이 묵시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 네가 왜 가만히 있나 했지. 「세계의 재앙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온다. 그런 건 회귀자 유중혁이나 할 만한 발상이었다.」 허공에 떠오르는 [제4의 벽]의 메시지를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럼에도, 김독자는 이렇게 해야만 했다.」 주변을 흐르는 후폭풍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너는 지나치게 많은 개연성을 어그러트렸다. ―이대로면 조만간 네가 쌓은 개연성의 업보가 폭발할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이것은 지금껏 내가 쌓아온 개연성의 업보였다. 성좌들이 경고했고, 도깨비들이 말했던 바로 그 업보. 「소중한 것을 잃지 않는 설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타 스트림>의 위대한 설화들은 모두 상실의 설화다. 영웅은 각성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고, 연인과 친구는 사랑과 우정의 완성을 위해 어느 한쪽을 잃어야만 한다. 존재는 무언가를 잃고, 설화는 그것으로 완성된다. 「김독자는 그게 싫었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 대가를, 언젠가 치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비틀고, 개연성을 어그러트린 대가를 받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그래서 김독자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츠츠츠츠츳! 입에서 설화 덩어리가 쏟아졌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나를 공격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공격하는 것은 뒤틀린 개연성이었다. 이계의 신격을 불러내기 위해 축적한 세계의 뒤틀림이, 시나리오에서 나를 배제하려 하고 있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설화들 덕분이었다. 내 귓가에 이야기를 속삭이는 설화들. 너는 구원의 마왕이다.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마치 메타트론과 아가레스에게 그랬듯, 설화들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진동하는 암무 속에서, 나는 바깥의 정경을 감각할 수 있었다. [‘묵시록의 최후룡’이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이 움직입니다.] 다행히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를 먹어치우러 왔다가 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발견한 이계의 신격은, 이제 ‘묵시록의 최후룡’을 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재앙과 재앙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묵시록의 최후룡 대 더 네임리스 미스트. 녀석들의 공멸은 다른 모든 존재의 희망이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시간을 버는 것이다. 성좌들이 다시 모일 수 있도록, 저 빌어먹을 별들이 그 이름에 걸맞게 다시 한번 별자리를 맺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것. [화신체의 손상이 심각합니다!] [아득한 존재의 격이 당신의 ‘수식언의 맥락’을 갉아먹습니다.] [설화와 설화 사이의 결속이 느슨해집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경이로운 업적에 놀랍니다.] [당신을 위한 거대 설화가 깨어나고 있습니다.] 멀리서 어슴푸레한 노래 같은 것이 들렸다. 아주 오래전 들었던 멜로디. 그것이 어머니의 것이었는지, 동료들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희미한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 쿠구구구구! 세계와 세계가 충돌하고 있었다. 묵시룡의 충격파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있던 김독자에게 새카만 암무가 덧씌워졌다. 이제 충격파를 감당하는 것은 김독자가 아니라 저 끔찍한 이계의 신격이었다. 혼돈에서 태어난 두 힘이 부딪치자, 주변의 모든 것들이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침음합니다.] 다행히 그 충돌 지점이 생각보다 멀었기 때문에, 지상의 일행들은 무사했다. 묵시룡에 이어 이계의 신격까지 목도한 성좌들은 대부분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있었다. 천공에서 왕처럼 누비던 세월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설화급 성좌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재앙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제야 밤하늘의 성좌들은 절감하고 있었다. 세계의 멸망이, 정말로 코앞에 와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세계의 멸망보다 한 존재의 희생이 더 커다란 비극이었다. “아저씨이이이이―!” 처절한 고함을 내지른 이지혜가 암무를 향해 포화를 쏘았다. 물론 포연은 더 네임리스 미스트의 본체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몸통인지조차 알 수 없는 대상. 하지만 일행들은 폭주하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병에 걸린 것처럼, 신유승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 감정에 동조하듯 키메라 드래곤이 허공을 향해 브레스를 쏘아 올렸다. 그 옆에 있던 이길영도 동공이 반쯤 풀려 있었다. 부르르 떠는 소년의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약······ 한다······ 안 한다······ 한다······.” 그런 세 사람의 앞으로, 또 다른 세 사람이 나왔다. 자신이 생각하던 가장 끔찍한 재앙 앞에서, 일행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광기를 앓았다. 누군가는 밀려오는 감정 앞에 이성을 놓았고, 누군가는 정교하게 망가진 이성을 지켰다. 초월형을 개방한 유중혁. 흑염룡을 두른 한수영. 신살(神殺)의 눈을 뜬 정희원.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세 사람은 동시에 앞으로 나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안나 크로프트였다. “다들 멈추세요! 전장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전장을 통제합니다.] 안나 크로프트의 목소리와 함께 <아스가르드>의 거대 설화가 세 사람을 제자리에 묶었다. 유중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꺼져라.” “이건 구원의 마왕이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구원의 마왕이 바라는 것?’”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한수영의 왼손에 흑염이 맺혔다.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미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대악마의 눈동자]에 설화들이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해낸 건지도 모른단 뜻입니다.” 안나 크로프트는 진심으로 감탄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머나먼 창공에서 벌어지는 두 재앙의 격전을 보며 말했다. “그는 정말 이 세계를 구하려고······.” “씨발! 세계 멸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는―” “그의 희생은 숭고해요. 정말로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아가리 안 닥쳐?” 폭발한 한수영이 쏘아붙였다. 그 무시무시한 기파에, 안나 크로프트도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김독자가 왜 세계를 구해야돼? 그 새끼가 왜 지 목숨을 희생해서 헛짓거릴 해야 되냐고! 이딴 세계에 그럴 가치가 있어?” 한수영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분노를 참고 참고 또 참아온 사람의 목소리. 그런 한수영의 얼굴을 보고 또 말을 들으며, 예언자는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구원의 마왕도 언젠가 당신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 세계가 과연 지킬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두고봐야 알겠지. 아마 미식협 때였던가. 구원의 마왕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안나 크로프트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이 세계는 도깨비와 성좌들이 지배하는 세계. 그녀 또한 그런 세계를 바꾸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를 만들었으니까. 안나 크로프트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원의 마왕이 지금도 세계에 대한 질문을 거듭하고 있는지, 예언자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리고 그는 지금 저기에 있습니다.” 어떤 설화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증명되는 법이다. “이런 세계에서 당신들이 만났잖습니까.” 그 말에, 처음으로 세 사람의 얼굴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언자인 제 말을 믿으세요. 힘을 비축해야 합니다. 두 재앙이 서로 싸워 공멸하는 순간을 노려야 해요. 그렇게 해야만 우리 모두 생존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미래를 아는 게 너뿐인 줄 알아?” 그제야 안나 크로프트는 뭔가를 깨달았다. 한수영의 주변에서 [예상표절]의 설화가 흐르고 있었다. 회귀자 유중혁 또한 [현자의 눈]을 통해 끊임없이 상황을 통찰하고 있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예언자만이 아니다. 이들 또한, 누구보다 미래에 대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독자를 구하는 것을 택했다. 검을 뽑아든 정희원이 말했다. “난 미래 같은 건 몰라. 하지만 하나는 알아. 당신은 세계를 구하고 싶어한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녀의 의지가, [심판자의 검]에서 새하얀 불꽃을 토했다. “그 사람이, 내가 구하고 싶은 세계야.” 그 말과 함께, 세 사람이 허공을 향해 도약했다. 거대 설화의 개연성도, 성운의 억압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들은 천공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막은 것은 성운도 개연성도 아니었다. ‘그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한수영이었다. “뭐야? 미친―” 쿠구구구구구! 재앙과 재앙의 사투 속에 하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문제는 무너진 균형의 추가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것은······.] 성좌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하늘을 뒤덮은 암무 속에서 뭔가가 움지럭거리며 분열하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더 네임리스 미스트가 묵시룡을 압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분체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아아. 아아아······.” 암무 사이로 드러난 샛노란 공포의 눈동자. 예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듯, 신유승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신유승은 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저 눈을 본 화신들은 모두 정신을 지탱하지 못해 이계의 생명체로 변한다. 그날, [공단]의 모든 존재는 저 재앙 앞에서 너무나 무력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날의 기억을, 전혀 다르게 각인하고 있었다. [그때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군.] 척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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