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41화
찰진 감각이 손끝에 감기며 속이 다 시원해졌다.
빌어먹을 놈, 얼마나 때려주고 싶었는지.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유중혁?”
놈이, 돌아보질 않는다.
유중혁의 몸에서 회백색의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없이 불길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솜털이 오싹 일어서는 아우라.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자세히 보니 아우라는, 8층 안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노인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노인을 보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빌어먹을, 역시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회백색 아우라를 발산하는 유중혁이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최악의 상황이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등장인물 ‘유중혁’의 통제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이지(理智)를 상실한 녀석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 녀석을 막을 수 있는 ‘등장인물’은, 세상에 없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발경(發勁) Lv.4’을 사용합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투콰아앙!
배 쪽에 강력한 통증이 일어난다 싶더니, 의식이 가물해졌다. 사위가 쏜살같이 밀려나며 머릿속에서 멋대로 기억의 책장이 넘어갔다. 방심했다.
「······8회차의 유중혁이 ‘극장 던전’에서 죽은 것은, 그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유중혁은 운이 없었다.
왜냐하면 ‘극장 던전’의 보스는 회귀자인 유중혁에게는 최악의 상성······.」
숨이 돌아왔다.
“크헙······ 허억.”
[외장 강화 수트가 손상되었습니다.]
[방어력이 일부 감소합니다.]
나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배를 감싸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이다.
앰플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단 한 방에 이 꼴이 되었다고?
한 방으로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 나는 그대로 날아가 옥상의 측면에 처박힌 상태였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귀살 Lv.2’을 사용합니다!]
멀리서 정희원이 눈빛을 불태우며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말려야 했지만, 몸이 쉽게 말을 듣지 않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백보신권 Lv.2’을 사용합니다.]
지금의 정희원이 유중혁의 상대가 될 리 없다. 그나마 [귀살] 덕에 몇 합 버티는 듯했지만, 금세 내상을 입은 정희원의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지금의 유중혁은 훨씬 더 강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지정한 항목들만 표시됩니다.]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프로게이머 (희귀)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8], [백병전 Lv.8], [상급 무기연마 Lv.5], [정신 방벽 Lv.5], [백보신권 Lv.2], [주작신보 Lv.1], [파천강기 Lv.2]······(중략)······.
성흔 : [회귀 Lv.3], [전승 Lv.1]
종합 능력치 : [체력 Lv.28], [근력 Lv.27], [민첩Lv.26], [마력Lv.25]
* 현재 해당 등장인물은 이성을 잃은 상태입니다.
빌어먹을 자식. 역시나 새로운 성흔이 활성화되었다.
<전승>. 과거 회차의 유중혁이 가졌던 스킬들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어나게 만드는 성흔. 이 성흔을 통해 유중혁은 본격적인 괴물이 되어갈 것이다.
“사부!”
아래층에서 이지혜가 올라온 것은 그때였다.
정희원을 향해 날아들던 권격이, 이지혜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투콰콰콰!
“꺄아악!”
충무공의 가호 덕택인지, 아니면 상승한 [귀신 걸음걸이] 덕분인지, 이지혜는 운 좋게 일격을 피했다. 나는 이지혜를 향해 외쳤다.
“놈은 조종당하고 있어! 극장 주인을 노려!”
그러나 이지혜에게 그럴 여유는 없어 보였다. 결국, 유중혁을 넘지 않고서는 ‘극장 주인’에게 다가갈 수 없다.
찰나, 정희원과 이지혜의 눈빛이 서로 교차했다. 두 사람의 칼이 동시에 유중혁을 향해 움직였다.
[검도]와 [검술 연마]의 콤보.
하지만 티렉스조차 쓰러뜨렸던 콤보도, 유중혁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퍼버버벅!
“크헉!”
유중혁이 퍼부은 백보신권에 얼굴을 얻어맞은 이지혜가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정희원의 요청에 침묵합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정희원이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이놈도 안돼?”
당연한 일이었다. 유중혁은 무자비한 녀석이지만, 그 본질에는 분명 대의(大義)가 있기 때문이다.
붕권을 맞은 정희원도 칼을 놓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뒤쪽에 있던 이길영이 특수 스킬인 ‘묠니르의 천둥’을 사용했다.
쿠구구궁!
[등장인물 ‘유중혁’이 ‘전격 내성’으로 공격의 충격을 상쇄합니다.]
유중혁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제기랄.
강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라고?
나는 이길영의 어깨를 짚으며 비틀비틀 앞으로 나섰다.
“길영아. 부탁한다. 뭐 해야 할지 알지?”
눈치 빠른 이길영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미안하다.”
“아니에요.”
이길영은 곧바로 입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뒤집히는 이길영의 눈동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젠 모든 카드를 다 동원해야만 했다.
[‘폭군 티렉스의 DNA앰플’을 사용하였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0분간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그래······ 한번 싸워보자고 이 개복치 새끼야.
[체력 Lv.24 -> 체력 Lv.34]
[근력 Lv.24 -> 근력 Lv.34]
[민첩 Lv.20 -> 민첩 Lv.30]
[마력 Lv.15 -> 마력 Lv.25]
[전신에서 활력이 치솟습니다!]
[근육의 잠재력이 폭발합니다!]
[전보다 쾌속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심장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들끓습니다!]
부족한 스킬은 압도적인 능력치의 격차로 메운다.
유중혁에게 온전한 <전승>이 이루어진 상태였다면 택도 없는 도박이겠지만, 스킬 레벨이 낮은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비록 잠시뿐이겠지만.
그 한순간이라도 좋다.
[전용 스킬, ‘백청강기 Lv.1’를 발동합니다!]
[숙련치가 누적되어 백청강기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백청강기 Lv.1 -> 백청강기 Lv.2]
손끝에 휘감기는 마력의 느낌이 달라졌다. 내가 달려가지 않아도, 놈이 먼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내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녀석도 등허리에서 처음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파천강기 Lv.2’를 사용합니다.]
카가가가각!
서로의 칼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유중혁도, 나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칼날을 쥔 손아귀에서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놈의 칼날에서 타오르는 새파란 에테르.
이쯤 되면 감탄을 넘어서 경이롭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능력치의 앞자리는 절대적인 힘의 격차를 낳는다.
그리고 지금 내 앞자리는 3이고, 유중혁은 2였다.
그런데도 녀석은 내게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칫하면 내가 밀릴 지경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합니다.]
스킬이 발동하는 순간, 유중혁의 난립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괴롭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건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 자식이, 벌써부터?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나는 온 힘을 다해 놈의 칼을 쳐낸 후 놈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어중이떠중이 식의 공격이었지만, ‘전지적 독자 시점’ 덕분에 놈의 움직임이 읽혔다.
스팟!
간발의 차이로 주먹이 턱을 스쳤고, 처음으로 타격을 입은 놈이 비틀거렸다.
「회귀가 시작되면, 또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동료들은 모두 기억을 잃고, 내가 살았던 모든 역사는 지워진다.」
“멍청이가!”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은 반복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개복치는 무척 튼튼한 생물이다. 놈이 잘 죽는 것은 몸이 약해서가 아니라 스트레스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 눈앞의 이 녀석처럼.
‘극장 주인’이 유중혁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유중혁의 불안한 정신상태 때문이었다. ‘극장 주인’은 신체 능력은 약하지만, 최상급의 정신 공격 스킬들을 가지고 있다. 만약 유중혁의 ‘정신 방벽’ 레벨이 8만 넘었더라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몽롱하게 눈이 풀린 유중혁. 개똥철학에 빠져버린 놈을 보고 있자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는다.
“너 진짜 주인공 맞냐?”
말하자면 이것은, 3149회의 멸살법을 읽은, 한 독자로서의 정당한 분노였다.
“겨우 3회차 회귀하고 그 지경이야?”
나는 한 번 더, 온 힘을 다해 놈의 머리를 갈겼다.
기적일까. 턱을 맞은 놈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흉부를 걷어찼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처음으로 회귀했을 때의 각오, 벌써 다 잊어버린 거냐고.”
「이 세계에서 살아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야.」
쓸쓸한 목소리.
“자식아······ 그딴 감상에 빠지지 않기로 했잖아.”
나는 달려드는 놈의 칼을 떨쳐내며 외쳤다.
“눈앞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대의를 위해서라도 살겠다고 결심했잖아?”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진동합니다.]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부딪치는 칼날에서 뜨거운 불꽃이 튀었다. 눈가가 따가웠고, 피부가 열에 익고 있었다. 숨 가쁘게 토해지는 말들 속에서, 어쩌면 나 역시 순간 이성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야.」
마치 내가 유중혁이 된 것처럼, 혹은, 내가 유중혁으로 살아보기라도 했던 것처럼. 가슴이 옥죄는 듯 답답했다.
“혼자라고?”
「나는······.」
“내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네가 혼자라고?”
「나는······.」
검격이 부딪치며 손아귀가 찢어졌다.
피가 흐르고, 살점이 뜯겼다.
나는 미친놈처럼 칼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네가 왜 혼자야? 네가 병신같이 ‘극장 던전’에서 죽었을 때도, 죽은 여동생 안고 징징거릴 때도, 예언자한테 뒤통수 맞고 뒤졌을 때도! 네가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았을 때도······!”
그 이야기를 하면서, 기이하게도 나는 다른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글자, 그리고 한 글자. ‘멸살법’을 읽으며 살아온 내 오랜 기억들.
“아이가 죽은 후 네가 미쳐서 날뛸 때도!”
복잡했던 가정사와, 일진들에게 두드려 맞던 10대의 기억.
“마왕과 싸우고, 귀환자들과 대적하고!”
선임들의 부조리에 치였던 군대의 악몽들.
“이계인들을 돕고, 빌어먹을 환생자들과 맞서 싸우고! 마침내 성좌들 앞에 섰을 때도!”
취업을 위해 몸부림치고, 상사들한테 비열한 아부를 하며 하루를 버티던 날들. 오로지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 하루를 살아냈던.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너를 보면서!”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읽을 수 있는 한 편의 소설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내가······.”
칼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쪽팔리게, 너무 흥분했다. 빌어먹을.
그냥 시간만 끌면 되는 거였는데.
거친 호흡을 다스리며 앞을 본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착각일까.
잠깐이지만 유중혁의 동공에 희미한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너는······.」
어떤 일은, 마음을 읽을 수 있어도 이해하지 못한다.
유중혁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지나친 몰입으로 인해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유중혁의 두 눈이,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는······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