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42화 “뭐?” 「대체, 너는······?」 갑자기 변한 녀석의 상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내 말을 듣고 이성이 돌아왔다고? 그럴 수가 있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애초에 이 작전은, 이런 결과를 기대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까.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당황합니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통제를 강화합니다!] “크으으윽······!” 유중혁의 눈빛이 다시 몽롱해졌다. 역시. 혹시나 기대했지만 녀석이 자력으로 깨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개복치가 괜히 개복치인 게 아니지. 자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심정이다. 유중혁의 검에 휘감긴 새파란 에테르가 파르르 떨렸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파천강기’가 성장합니다!] 이 와중에도 전승된 스킬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망할 주인공의 재능 덕택이다. 파츠츠츳! 격돌한 백청강기가 조금씩 밀려난다. 스킬 자체가 가진 한계인지, 아니면 재능의 차이인지는 모른다. 나는 이길영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흰자위를 드러낸 이길영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슬슬 때가 왔다. “중혁아.” 아마 오늘 이 순간이 지나면 유중혁은 놀라울 정도로 강해지겠지. 나는 있는 힘껏 검을 밀어내며 말했다. “전에 내가 물었지? 너 한 대만 때려도 되냐고” 타고난 재능의 차이가 있으니, 향후 몇 년간 유중혁은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분명 너, 그때 때려도 된다고 했다. 기억하지?” 지금의 내가 전력을 다하면, 적어도 단 한순간 정도는 이 녀석을······.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불꽃’으로 변환됩니다.] 이 말도 안되는 녀석을, 압도할 수도 있다. 기이이이잉! 에테르 블레이드. 허공에서 만개한 불꽃의 에테르가 놈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화르르르륵! 갑작스런 공격 일변도에 당황한 유중혁이 순간적 몇 걸음을 물러났다. 녀석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하지만 늦었다. [성흔, ‘칼의 노래’를 발동하였습니다.] 칼의 노래. 위인급 성좌인 충무공이 자랑하는, 최강의 전투 버프 중 하나.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깃듭니다.] 무작위의 소절이 깃든다는 점에서 전투력 상승 편차가 크긴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더없이 기꺼운 스킬이었다. 「화살을 비처럼 쏘아대고 각양의 총통을 쏘아대니」 운이 좋게도, 내게 깃든 것은 난중일기의 한 구절. 엄청난 마력이 빠져나가며, 검극에서 타오르는 에테르들이 일제히 뭉쳤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유중혁을 향해 휘둘렀다. 「그 대란이 마치 우레 폭풍과 같았다.」 불꽃의 에테르가 화살의 형상을 이루더니, 마치 수많은 화살비가 쏟아지듯 녀석에게 폭격을 시작했다. 부족한 마력 탓에 찰나 밖에 쓸 수 없는 공격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투두두두두두두두! “크으으으읏!” 유중혁의 온몸에 새빨간 상흔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코인만이 모든 가치를 대변하고, 성좌들이 모든 전개를 결정하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는, 아직 유중혁이 필요하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내가 너를 지켜주마. 화르르르륵······. 전실을 태우는 불길 속에서 유중혁의 행동이 멈췄다. [불꽃 내성]이 있으니 심각한 타격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행동불능의 상태에 빠지기엔 충분할 것이다. 나는 정원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극장 주인’을 바라보았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당신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나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안색이 굳어진 ‘극장 주인’이 보인다. 그런데. [등장인물 ‘유중혁’이 ‘기사회생 Lv.2’을 사용합니다!] 빌어먹게도, 유중혁이 벌써 나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기사회생]. 극악의 타격을 받아도 하루에 한 번, 순식간에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사기 스킬. 벌써 저 스킬까지 전승되었을 줄이야. 파바바밧! 내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주작신보]를 사용하는 유중혁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극장 주인을 코앞에 두고, 유중혁의 검과 마주쳤다. 이제 믿을 것은 마지막 카드뿐이다. 나는 온힘을 다해 외쳤다. “길영아!” 쿠구구궁! 내가 외친 순간, ‘하늘 정원’의 천장에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옥상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돔이 깨져 나가고 있었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유중혁도, 유중혁을 조종하던 ‘극장 주인’도. 그 순간만큼은 놀라 천장을 보았다. 쩌저저저저적! ‘히든 시나리오’의 차폐 구역이 깨지다니, 일반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라면 가능하다는 뜻이다. 멀리서 이길영이 코피를 쏟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으, 으아······ 으아아아······!”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괴물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 그오오오오오! 깨진 돔의 틈새로, 거대한 곤충의 앞발이 파고들었다. 퍼걱! 퍼거거거걱! 얇은 유리처럼 돔이 깨어져 나가며, 옥상이 갈라졌다. 경악한 ‘극장 주인’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려 ‘히든 시나리오’의 차폐 구역을 파괴할 수 있는 괴물. 겉보기엔 사마귀를 닮은, 무지막지한 크기의 충왕종이었다. [6급 충왕종, 티타노프테라가 출현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외양. 일전에 ‘시독 코뿔소’들을 상대하고 있던 괴물이었다. 그 녀석이, 이길영의 [다종 교감]에 반응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길영이 웃고 있었다. “헤, 헤헤······ 티타노오······.” 티타노? 설마······ 닮긴 했지만, 아니겠지. 그오오오오! 사마귀의 무지막지한 앞발이 ‘극장 주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유중혁이 그 앞을 막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호신강기 Lv.4’를 사용합니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며, 유중혁의 몸이 옥상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버티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괴물이다. 지금 능력치로 6급 충왕종을 상대한다고? 심지어 유중혁은 반격을 개시했다. 갸오오오오! 힘껏 내지른 검격에 티타노프테라가 비명을 질렀다. 투쾅! 스가각! 놀랍게도 유중혁은 6급 충왕종과 대등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와 싸웠을 때 봐줬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극장 주인’의 표정에 여유가 돌아오고 있었다. 유중혁은 강하다. 갑작스런 상황이지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틀렸다. 너는 나를 봤어야 했어. 나는 다시 ‘극장 주인’을 향해 달렸다. [다종교감]의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이길영이 온힘을 다해 벌어준 시간을, 결코 헛되이 쓰면 안 된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극장 주인’이 나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 ‘멸살법’의 설정에 따르면, 이 네임드 보스는 저래 봬도 한 성좌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마스터피스였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 열화판의 형태가 되었고, 한낱 히든 시나리오의 보스를 맡고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아무나 유중혁의 ‘정신 방벽’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좌의 가호를 받는 녀석.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란 얘기였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시뮬라크르’를 발동합니다!] 스펙터의 [환영 감옥]보다 한 차원 높은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스킬.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온갖 종류의 환영들이 나타났다. 환영을 넘어, 차라리 극실재에 가까워 보이는 괴물들. 땅강아쥐, 그롤, 시독 코뿔소, 티렉스······. 지금껏 보아왔던 괴물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놈들의 흉폭한 이빨이 나를 찢고 할퀴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두렵지 않다. 이건 모두 가짜다. 존재하지 않는다. 저것들은 모두. 소설 속의 허구일 뿐이다. 일순 시간이 느려진 것은 놈의 목에 ‘신념의 칼날’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정신 침식’을 시도합니다!] [정신 침식]. 유중혁을 저 꼴로 만든 상급의 인지 조작 스킬. 하지만 [제 4의 벽]이 있기에, 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놈이 내 머릿속에 침투한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이 당황합니다.] 새카만 자아의 심연. 온갖 잡념들이 몰려들며,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요동쳤다. ―이, 이런? 이, 것, 은······! 무수한 텍스트들이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내가 읽어온 ‘멸살법’의 이야기들이었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발동합니다!] 내 머릿속을 파고들던 ‘극장 주인’의 안색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자신을 둘러싼 문자열들을 보더니, 얼굴이 희게 질렸다. ―설, 마, 당, 신, 은······ 아아! 그리고 그것이 놈의 마지막이었다. 기이하게도, 경외에 젖은 듯한 표정. ‘신념의 칼날’이 목을 치려는 순간, 녀석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신성한 빛에 닿은 유령처럼, 혹은 금기를 어긴 형벌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존재한 흔적도 없이, 놈은 소멸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최초로 ‘극장 주인 시뮬라시옹’을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9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히든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보상으로 4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들. 뒤를 돌아보니, ‘극장 주인’의 마수에서 풀려난 유중혁이 자리에 쓰러지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죽지 않은 상태였다. 무리하게 [다종 교감]을 운용했던 이길영도 마찬가지였다. “형······.” 나는 달려가 이길영을 끌어안았다. 힘이 빠진 이길영이 품속에서 색색거리는 소리를 냈다. [‘극장 던전’을 감싸던 결계가 사라집니다.] 천장을 뒤덮고 있던 결계가 소멸하고, 나를 보는 충왕종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할까 침을 삼키는데, 놀랍게도 녀석이 먼저 몸을 돌렸다. 마치, 이제는 흥미가 사라졌다는 것처럼. 그제야 안도의 숨과 함께 탈력감이 몰려왔다. 끝났다. “······괜찮아요?” 서로를 부축한 채, 정희원과 이지혜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희원 씨는?” “괜찮아요. 지혜도 다행히 무사하고.” 유중혁한테 어지간히 얻어맞은 모양인지, 이지혜는 입이 퉁퉁 부어서 말을 못하고 있었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의 종료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아마 아래쪽도 슬슬 끝날 시간이 된 모양이다. 옥상에서 주변을 돌아보자, 멀찍이 날이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현성이 있었다면 ‘조국 기도문’이라도 읊을 법한 장관이었다. 정희원이 신음을 흘렸다. “아······ 서울이.” 희미한 새벽빛 아래에 폐허가 된 시가지가 보였다. 멀리서 간헐적인 폭음이 들려왔다. 이제 ‘맹독 안개’는 없었다. 무너진 건축물 아래에 깔려 죽은 시독 코뿔소들. 사람들끼리 싸우는 광경도 보였다. 아마 우리보다 먼저 ‘시나리오’를 끝낸 그룹이겠지.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은 하나의 전경이 되어, 거대한 돔(Dome) 안에 갇혀 있었다. 하나의 결계를 부수자 보이는 더 커다란 결계. 현재 서울은 투명한 돔 안에 고립된 상태였다. 정희원이 탄식하듯 말했다. “진짜로······ 전부 끝장났구나.” 새삼스러웠지만,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무너진 빌딩들을 보며, 저기 어디엔가 내가 다니던 미노 소프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상아가 있었다면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유상아는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니까. 내 품속에서 이길영이 꼼지락댔다. “정신이 들어?” 이길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늘을 가리켰다. 멀리서, 유성우가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유성우는 본래 메인 시나리오의 전조다. 그런데 전보다 유성우의 개수가 많아졌다. 그렇다는 것은, 곧 ‘홀’이 열린다는 뜻이겠지. 저 유성우들은 아마 전 세계에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정희원이 감탄하며 말했다. “빌어먹게도 예쁘네요······.” 정희원은 모를 것이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저 유성들이, 낙하 장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악몽을 만들 것인지를. 이제, 더 큰 재앙이 올 것이다. 이길영이 작은 두 손을 모으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정희원도 이지혜도 잠시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들도 뭔가를 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스운 일이다. 악몽의 원흉이 될 존재들에게 소원을 비는 것은, 아마 전 우주를 다 뒤져봐도 인간밖에 없겠지. 잠시 후, 이길영이 눈을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은 소원 안 빌어요?” 나는 그런 이길영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대답했다. “나도 빌었어.” “뭔데요?” “길영아,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냐.” 정희원이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런 정희원을 한 번 보고, 유중혁을 보고, 다시 무너진 서울의 광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떤 소설의 에필로그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이길영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울의 상공에, 희미한 균열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뜨면, 도깨비들은 새로운 지옥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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