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404화
Episode 77. 최후룡
메타트론은 폐허가 된 회담장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병장기를 쥐고 있었던 마왕들과 대천사들이 모조리 누워 있었다.
흩어지는 선악의 설화.
임계점을 넘어선 혼돈 수치의 영향이, 회색 구체 안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아직 의식이 있는 천사 중 하나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서기관······.]
퍼거걱, 하는 소리와 함께 미카엘의 뒷발이 천사의 머리를 으깼다. 미카엘은 절명한 천사를 걷어찬 후, 품속에 감추고 있던 어린아이 크기의 대천사를 끄집어냈다.
혼절한 대천사는 미카엘의 손아귀에 대롱대롱 붙잡혀 올라왔다.
[라파엘도 죽일까? 이렇게 보내긴 조금 아까운데······.]
[원한다면 살려둬도 상관없습니다. 혼돈 수치는 모두 채웠으니까요.]
[그럼, 저 마왕은?]
메타트론은 여전히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구체의 가장자리를 바라보았다. 전신이 넝마가 된 아가레스가 그곳에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를 비롯하여 ‘종말의 구도자’들이 합동 공격을 퍼붓고 있었지만, 마왕 아가레스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전신에서 설화를 줄줄 흘리며, 악귀 같은 원한을 두 눈동자에 새긴 채로.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아가레스는 여전히 궐련을 입에 물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라 여러 개를.
[성흔, ‘괴력의 한 개비 Lv.???’가 발동 중입니다.]
[성흔, ‘민첩의 한 개비 Lv.???’가 발동 중입니다.]
[성흔, ‘마력의 한 개비 Lv.???’가 발동 중입니다.]
그것은 아가레스의 성흔인 [만능 궐련]이었다.
오랫동안 골초로 살아온 아가레스의 주특기. 화신체의 성능을 오버클로킹시키는 설화가 잠재된, 오직 아가레스만의 성흔.
무려 대여섯 명의 마왕에게 합공을 받고서도 여전히 버티는 아가레스를 보며,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과연, ‘지옥 동부의 지배자’의 명성이 헛것이 아니었군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을까요?]
아가레스는 대꾸도 않은 채 새로운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정리된 전장을 가로질러 메타트론과 미카엘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가레스가 말했다.
[메타트론. 다시 생각해라. 이런 식으로는 선악을 지킬 수 없다. 모두가 절멸한 후 기억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기억되기만 한다면 언젠가 다시 부활할 수도 있을 겁니다.]
[부활? 저 빌어먹을 타천사처럼 말인가?]
미카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왕, ‘타락 천사들의 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미카엘의 격에 아가레스가 설화를 쏟으며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메타트론을 향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연명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지? 그건 우리가 아니다. 그렇게 되살아난 우리는 ‘메타트론’이나 ‘아가레스’가 아니라, ‘하늘의 서기관’과 ‘지옥 동부의 지배자’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여.]
메타트론의 등 뒤로 유구한 설화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읽고, 그가 살고, 그가 믿어온 설화들이었다.
[가장 오래된 선이 미소를 짓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서기관’이었다.
이 세계의 선을 기록하는 자.
무엇이 선인지를 정하고, 그 기준이 되는 존재.
자신의 오랜 숙적을 바라보며, 아가레스 또한 자신의 곁을 유유히 흐르는 설화를 느꼈다.
[가장 오래된 악이 고개를 갸웃합니다.]
그것은 그가 추종해 온 기나긴 악의 역사였다.
선에게 맞서고, 배제되고, 징벌된 역사.
그 순간, 아가레스는 자신의 수천 년이 하나의 쉼표로 집약되는 것을 느꼈다.
이 흐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살아있고, ‘하늘의 서기관’이 있는 한. 그들이 맞서 싸우고, 전쟁을 반복하는 한.
메타트론과 아가레스가 죽어도 또 다른 누군가가 ‘하늘의 서기관’이 되고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딴 것이 선악이라면······.]
퉤, 하고 바닥에 가래침을 뱉은 아가레스가 쓰게 웃었다.
[나는, 이제 악을 그만두겠다.]
아가레스의 손끝에서 궐련이 튀어 올랐다.
허공을 회전하며 연기를 그리는 궐련.
아스모데우스가 다급히 외쳤다.
[막아!]
소용돌이치는 연기가 아가레스의 전신을 휘감았다.
[성흔, ‘비겁의 한 개비 Lv.???’가 발동합니다!]
희뿌연 연기가 폭발하며, 공격이 쏟아졌다.
이윽고 연기가 걷힌 자리에 남은 것은 바닥을 구르는 궐련 한 개비뿐이었다. 종말의 구도자들이 허탈하게 병장기를 회수했다.
메타트론은 바닥의 궐련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꺼지지 않은 매캐한 연기가 허공을 감돌았다.
적수는 떠났고, 이제 선은 홀로 남았다.
이것은 외로움일까, 아니면 일종의 해방감일까. 메타트론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너부러진 꽁초를 짓밟아 껐다.
[가장 오래된 악이 새로운 악을 눈여겨봅니다.]
고개를 들자 아스모데우스가 새침하게 웃고 있었다.
[아쉽게 됐군요. 아가레스의 ‘벽’은 제가 가질 생각이었는데.]
그런 아스모데우스를 보며, 메타트론이 말했다.
[곧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현재 혼돈 수치 : 100]
혼돈 수치는 모두 차올랐고, 묵시룡은 부활 시퀀스에 돌입했다.
그리고 곧,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회담장이 붕괴됩니다.]
회담장을 감싸던 회색 구체가 조금씩 무너지면서, 대천사의 시체들이 바닥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즐거웠는지, 아스모데우스가 물었다.
[그런데, 진짜로 괜찮은 건가요?]
메타트론은 침묵했다. 무엇이 괜찮다 안 괜찮다를 논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 추락하는 천사들을 보며, 메타트론은 가장 교과서적인 답변을 꺼냈다.
[모든 것이 선의 뜻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에 도달하기 위한······.]
■■.
모든 성좌들의 염원이자, 별의 이야기가 끝나는 곳.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라······ 그런 것을 추구하는 성좌들은 결국 비슷해지는 모양이군요. 당신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정말 닮았습니다. 성향은 완전히 반대지만.]
그게 누구냐고 물으려는 순간, 메타트론은 창공을 찢는 용의 하울링을 들었다.
그아아아아아―!
수천 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용들이 하늘을 쏘다니며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끊임없이 터지는 폭음. 날개가 찢어진 용들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메타트론이 기대하던 정경은 아니었다.
······아직 묵시룡이 부활하지 않았다고?
[뭘 그렇게 놀랍니까? ■■를 추구하는 건 우리만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는 한 사내를 마주 보며,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포효합니다!]
심연의 흑염룡은 강했다.
천공을 뒤덮은 수십 마리의 용들을 단숨에 찢어발기며 급부상한 녀석은, 그야말로 패도적인 격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역시 ‘멸살법’ 최강의 성좌들 중 하나다웠다.
자신의 배후성이 활약하자 신이 난 한수영은 붕대를 흔들며 외쳤다.
“처음으로 자랑스럽네, 흑염룡! 다 죽여버려!”
“힘내, 키메라 드래곤!”
양손을 꼭 잡은 신유승도 간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심연의 흑염룡’의 존재감이 강해집니다!]
[‘키메라 드래곤’의 존재감이 강해집니다!]
심연의 흑염룡과 키메라 드래곤이 다른 용들을 쓰러트릴 때마다 그들의 위상도 상승하고 있었다. 그 장렬한 전투를 보고 있자니, 나까지 심장이 거칠게 뛰는 느낌이었다.
나는 용들을 보다가 유중혁에게 눈짓했다.
“알겠다.”
내 눈짓을 받은 유중혁은 일행들과 함께 움직였다.
녀석이 맡은 일은 묵시룡이 움직이기 전까지 주변의 성운들과 접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게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허공의 용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생각했다.
묵시룡의 부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마 저 용들 가운데, 지난번의 ‘묵시룡’도 있을 것이다.
[몇몇 용왕종들이 당신의 존재를 인식하였습니다.]
“이런.”
콰아아아아아!
나는 반사적으로 [전인화]를 발동해 브레스를 막아냈다. 몇몇 용왕종들이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날아갔다. 마치, 뭔가 이상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왜들 저러지? 난 드래곤도 아닌데.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용의 제전’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뭐?
[‘용의 제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갑작스레 떠오른 메시지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난 성좌이긴 해도 용은 아닌데 왜 이런 메시지가······.
“그대는 왜 참가하지 않는가?”
······대체 언제 곁에 다가온 거지?
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성별을 알 수 없는 미형의 인간이 서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 강력한 격은 느껴지지 않지만, 어딘가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외모였다.
······환생자인가?
그럴 수도 있다.
이 섬에는 일권무적 유호성처럼 실력을 숨긴 극소수의 강자들이 있으니까.
“그대는 왜 참가하지 않는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왜지? 그대도 용의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서야 퍼뜩 깨달았다.
[설화 파편,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약동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 심장은 골드 드래곤의 것이었다.
언젠가 ‘이야기의 지평선’에서 흡수한 설화 파편.
[설화 파편, ‘어린 골드 드래곤의 망가진 심장’이 용의 제전에 참가하고 싶어합니다.]
아까부터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래서였나.
환생자가 물었다.
“그대가 진정 용이라면, 마땅히 이 상황에 분노해야 한다.”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요?”
“위대한 용들이 한낱 시나리오의 소재 거리로 쓰이는 상황이지.”
거칠게 뛰던 심장이, 아주 천천히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환생자는 말을 계속했다.
“선악, 소통, 윤회······ <스타 스트림>의 거대한 테마들 속에서, 용들은 끊임없이 이용당해왔다. 그대도 용이라면 제전에 참가하라. 묵시를 실천할 최후룡이 되어, 세상의 멸망에 기여하라. 그대에게서 존재를 박탈한 시나리오의 최후를 목도하라.”
나는 환생자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선악, 소통, 윤회······ 아주 오래 살아온 환생자라면, <스타 스트림>의 그 테마들을 모두 겪었을 수 있다.
정말,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환생자라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시나리오의 모든 이야기가 꼭 불행으로만 점철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나리오가 존재하기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있습니다. 환생자들의 섬에만 있어서 모르시겠지만, 시나리오는 분명 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내가 싫었지만, 그럼에도 절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멀리서 성좌들과 접선한 유중혁과 동료들이 보였다.
환생자가 나와 같은 광경을 보며 말했다.
“변하고 있다? 시나리오가 어떻게 변했지? 이제 용이나 괴수들도 설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건가?”
“그런 설화는 이미 있습니다.”
“하지만 인기가 없을 텐데?”
“인기 있는 설화도 있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요. 당신도 알잖습니까? 「니벨룽겐의 노래」라든가, 「성 제오르지오 전설」에서도······.”
“거기서 용들은 주인공이 아니었어.”
허공에서 몇몇 용들이 길을 잃고 부딪치며 추락했다.
환생자가 말을 이었다.
“용들은 항상 사냥당하는 존재였을 뿐이야. 만악의 근원으로 불리며, 인간의 공주를 납치하거나 황금 따윌 모으는 볼품 없는 악당이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야. 용이 왜 금이나 다른 종족의 암컷 따위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그런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 나와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들이 활약하는 시나리오들도 많습니다. 가령―”
“‘미형의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 그게 정말 순수한 드래곤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환생자가 말했다.
“수만 년 전에도 용들의 쓰임새는 한결같았지. 결국 그것들은 다른 종족을 위한, 성좌들을 위한 시나리오들이었다.”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환생자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을 용으로 대우한 시나리오는 하나도 없었다. 용은 늘 소비되었고, 규정되었고, 시나리오의 공략 대상이 되었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금씩,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워졌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설화급 성좌인 나를 옭맬 정도의 격. 하늘에서 포효하는 심연의 흑염룡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흑염룡을 보며 내가 말했다.
“제가 바꿀 겁니다.”
“그대가? 어떻게?”
“다신 용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별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절대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곁을 보며 경악합니다!]
환생자가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흥미롭군.”
환생자의 외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폴리모프(Polymorph).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들이 즐겨 쓰는 마법.
“수만 년 전에도 내게 똑같은 제안을 한 도깨비가 있었지. 용이 시나리오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오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둑해진 시야가 정신없이 흔들렸고, 코에서는 설화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응원하던 신유승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한수영도 입과 코에서 피를 쏟아내며 나를 보고 있었다.
고막이 터질 듯한 이명 속에서 한수영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김, 독자, 이게, 무슨 일······.
손발이 벌벌 떨렸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어떻게든 고개를 들려고 애썼다.
이런 것을 ‘격’이라 부를 수 있는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도망치라고 말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다급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아득한 용언(龍言)이 나의 귓가로 밀려들었다.
[나를 속였던 그 도깨비는 「도깨비 왕」이 되었다.]
태양이 사라지고, 세상이 누군가의 그림자로 덮이고 있었다.
종말의 용. 묵시록의 최후룡이 마침내 재앙의 날개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