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403화
마지막 시나리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흑백이 대조되는 정장을 입은 두 도깨비가 나를 채근했다.
[지금 결정해라. 여기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함께 마지막 시나리오로 떠날 것인지.]
대도깨비 허주와 허체.
이 대도깨비 형제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멸살법’의 후반부에서도 제법 빈번하게 등장하는 녀석들이니까.
그나저나 자신들의 입으로 ‘마지막 시나리오’를 언급하다니······ 드디어 도깨비들도 이 세계의 끝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성좌나 화신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반복하듯, 이야기꾼에게도 반드시 전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 대도깨비들은 그 최후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시나리오? 쟤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한수영은 모르는 눈치였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마지막 시나리오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지.
나는 나와 같은 백색 코트를 입은 한수영을 떠올렸다. 그 꼼꼼한 녀석이 빠뜨렸을 리는 없으니, 아마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것일 터다.
―지금 설명하려면 길어.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는 편이, 3회차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겠지.
간만에 떠올린 1863회차의 한수영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방문한 1863회차는 최종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 최종전에서 한수영은 살아남았을까. 살아남았다면, 지금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유중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 만약 내가 받아들인다고 했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대도깨비들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정은?]
“뭐, 예상하셨겠지만······ 안 합니다.”
[어째서지?]
“수상하니까요.”
[수상하다?]
“애초에 제안 내용부터가 이상합니다. ‘성마대전’을 포기하면 마지막 시나리오에 데려가주겠다······ 여기서 뭐가 빠진 것인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이야기꾼이시면서 제 설화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낮으시군요.”
대도깨비 허체가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대도깨비 허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허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곳에 있는 <김독자 컴퍼니>들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
뜻밖의 선언에 유중혁과 한수영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곳의 <김독자 컴퍼니>를 모두 살리면서, 마지막 시나리오로 갈 방법.
“아무리 관리국이라도 멋대로 그런 일을 벌이면 개연성의 저울이 기울어질 텐데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어쩌면 이것은 다시 없을 기회였다.
모두를 살리고 마지막 시나리오에 도달할 기회.
너무나 탐스러워서, 거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그런 제안.
그럼에도 내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웠다.
“당신들도 이제 똥줄이 타는 모양이군요. 그쪽 제안은 내가 ‘성마대전’을 그만두는 게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
“당신들과 ‘스트림 계약’을 맺는 것이 그 대가겠죠. 아닙니까?”
스트림 계약. 그것은 언젠가 비형과 내가 맺었던 계약이었다.
놀란 대도깨비들의 표정이 보였다. 나는 한 방을 더 먹였다.
“‘최후의 이야기꾼’이 되기 위해, 제 설화를 당신들의 것으로 가져다 쓰려는 거잖습니까.”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지?]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여기서 죽는다.]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쪽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매우 높은 확률’이라고. 그러면 매우 낮은 확률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겠죠.”
[다른 세계선에서 재앙을 보고 온 것 아니었나?]
이번에는 내가 놀랄 차례였다.
이제 대도깨비들도 1863회차의 일을 어느 정도 알게 된 모양이지.
[묵시룡은 일개 성좌나 성운이 막아낼 수 있는 재앙이 아니다.]
나도 알고 있다. 그 끔찍한 묵시룡의 격을. 미래의 세계선에서 직접 느껴보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웃었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이 도깨비의 본분 아닙니까? 중계 준비나 잘 하시죠.”
내 말에 반응하듯, 허공에서 짠하고 비유가 나타났다.
[바앗!]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경악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킬킬 웃습니다.]
[후원계의 큰 손이 당신의 패기에 300,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역시 건수가 커서 그런지 들어오는 후원 액수도 크다.
대도깨비는 알 수 없는 눈길로 잠시간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스르르 자취를 감추었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대도깨비의 신형.
이걸로, 모든 일행이 확실하게 살아남을 방법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대의 판단은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이번만큼은 수르야도 감탄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나는 내 품에서 의식을 잃은 가브리엘을 내려다보았다.
함께 그녀를 응시하던 한수영이 물었다.
“김독자.”
“왜. 또. 뭐.”
“······오래 생각하고 한 판단 맞지? 같잖은 동정심이라든가, 순간적인 충동 아닌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한수영의 말투에서는 희미한 원망이 느껴졌다.
내가 말했다.
“화내도 돼. 난 방금 엄청난 기회를 걷어찬 거니까.”
“······.”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뭐, 그래. 이유가 있겠지. 솔직히 나도 네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
“뭐? 왜?”
한숨을 푹푹 쉬며 대답하는 한수영의 말을 받은 것은 유중혁이었다.
“그게 네놈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평소와 같은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이 두 사람이 내게 무엇을 양보한 것인지 깨달았다.
맞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수영이나 유중혁의 방식은 아니다.
“······빌어먹을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엔 이런 방식이 어울리긴 하지. 오늘 일 나중에 꼭 회고록에 쓸 거야. 물론 여기서 살아남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나 생각하지.”
한수영과 유중혁. 너무나 다른 두 사람.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둘이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이 있다면, 아직 해 볼 만하다고.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6]
하늘에서는 여전히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회색 구체 안의 전투도 마무리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 세계를 파멸로 몰아가는 대가로 살아남을 선과 악이, 저 안에서 곧 모습을 드러내겠지.
한수영이 물었다.
“저거 막을 거야?”
유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저 구체는 바깥에서는 침투가 불가능하다.”
“그럼?”
“혼돈 수치가 100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묵시룡은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최초의 꼬리짓’이 시작되겠지.”
최초의 꼬리짓.
유중혁도 그 재앙에 관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멸살법’에 등장하는 묵시룡의 예언을 떠올렸다.
「가장 뜨거운 지옥의 중심에서,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인 용이 깨어날 것이다.」
「그는 용 중의 용. 혼돈의 중심에서 태어난 모든 용들의 수장이자 세계에서 가장 늙은 증오.」
「그 용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고 꼬리를 내리칠 것이다. 그 한 번의 꼬리짓에 별들이 추락하고 세계의 한 방위(傍位)가 사라지리라.」
1863회차에서는 그 ‘꼬리짓’을 보지 못했다.
그곳의 묵시룡은 완전 해방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유중혁이 결연하게 주장했다.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시발······ 그딴 소리 할 줄 알았어.”
한수영은 허탈한 목소리였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8]
이제 남은 혼돈 수치는 2.
멀리서 일행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독자 형!”
신유승과 이길영. 그리고 함선을 이끌고 다가오는 이지혜와 정희원도 보였다. 착잡한 표정의 우리엘도 있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긴 가브리엘을 발견하고 대경했다.
[······가브리엘!]
나는 그녀에게 가브리엘을 넘겨주었다.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행들을 먼저 돌아보았다.
“아저씨, 진짜 묵시룡이 깨어나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기라도 잡듯이 한수영이 다그쳤다.
“다들 각오해. 이번엔 진짜 장난 아니니까.”
“언제는 장난이었어요?”
이지혜의 대답과 함께 일행들도 준비를 마쳤다.
한수영도, 유중혁도, 신유승도, 이길영도, 정희원도, 이지혜도. 모두 굳은 각오를 마친 얼굴들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쓰러진 이현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9]
그리고 묵시룡의 부활이 임박했다.
[다수의 성좌들이 공포에 질렸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혼돈에 빠집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재앙을 대비합니다!]
[성운 <베다>가 재앙을 대비합니다!]
[성운 <홍익>이······.]
쿠구구구구!
섬의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세상천지가 뒤흔들렸다. 모든 것이 거대한 날갯짓으로 뒤덮인 느낌. 주변의 정경들이 잘못 끼운 블록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작은 설화들이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지금껏 존재했던 모든 ‘재앙’의 이름을 박탈하듯, 어마어마한 설화가 깨어나고 있었다.
“김독자. 묵시룡이 깨어나면 제일 위험한 것은 성좌들이다.”
“예언대로라면 그렇지.”
“그리고 너는 성좌다.”
최초의 꼬리짓은 하늘의 방위를 부순다.
그것은 즉 해당 방위에 위치한 모든 별들과 수식언의 맥락이 파괴될 것이란 이야기였다. 한수영이 이죽거렸다.
“김독자 넌 어느 방위에 있냐? 동쪽? 아니면 서쪽? 재수 없으면 네가 제일 먼저 죽겠네?”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좀 빌어보려고.”
“······뭔 개소리야? 설마 너 묵시룡이랑도 아는 사이야?”
말투는 아니꼬웠지만 한수영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주기로 했다.
“‘묵시룡’은 본래 ‘특정한 용’을 지칭하는 게 아냐. ‘가장 오래된 선’이나 ‘가장 오래된 악’이 특정 성좌를 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묵시록의 최후룡’은 거대 설화 그 자체를 말한다고.”
“잠깐, 그러면······.”
“아직 이 시점에서 ‘누가 묵시룡이 되느냐’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한수영의 입이 희미하게 벌어졌다.
[현재 혼돈 수치 : 100]
[혼돈 수치가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등골이 오싹한 느낌과 함께, 세상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지반을 뚫고 올라온 불온한 아우라가 섬 전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가장 뜨거운 지옥에서 ‘마룡전(魔龍殿)’이 개방됩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공간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 공간을 부수고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들이 있었다.
이 세계에는 성좌나 초월좌, 이계의 신격들을 제하고도 그들의 힘에 육박하는 괴물들이 있다.
세상 모든 괴수종들의 정점.
그오오오오오오―!
심신을 얼어붙게 만드는 드래곤 하울링. 멸망한 도시의 그림자들이 스쳐가며, 오랜 세월 속에 잊힌 고대의 용왕종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용들의 브레스에 맞은 성좌들이 비명을 흘리며 산화했다. 허공을 뒤덮은 수백 개의 그림자. 그 아득한 격의 파랑 속에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경악했다.
하나하나가 성좌의 힘에 육박하는 용왕종.
그 무수한 용들이, 이 세계를 파멸시킬 단 하나의 묵시룡을 뽑기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재앙의 용을 선별합니다!]
나는 그 압도적인 풍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침 우리한테도 용이 하나 있지.”
내 말에 신유승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곁에는, 전신에 두터운 철갑을 덧댄 드래곤이 앉아 있었다.
1급 용왕종, 키메라 드래곤.
신유승의 착실한 성장으로 인해 [키메라 드래곤]은 이제 어지간한 성좌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
마계의 낙원에서 태어난 용이, 하늘을 향해 거센 포효를 터트렸다.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키메라 드래곤을 보며, 한수영이 물었다.
“저 녀석이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키메라 드래곤은 굉장한 성장력을 가진 개체지만, 아직 묵시룡의 후보가 되기엔 무리였다.
“그럼 대체 뭘 믿고―”
“아직 한 마리가 더 있잖아.”
“뭐? 어디―”
한수영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뭔가에 반응하듯 격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이 갈라지며 새카만 어둠이 폭발했다.
근방에 있던 수십 마리의 용들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하늘이 암전되듯 깜빡였고, 새카만 천둥이 지면을 내리쳤다.
심연 사이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흑요석으로 빚은 듯, 고귀한 비늘을 가진 용.
다른 고대룡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격. 홍옥처럼 빛나는 눈동자. 세상의 어둠을 깎아 만든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황홀한 흑염이 창공을 뒤덮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유선형의 생명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디 네 배후성이 승리하기를 빌자고.”
현시점에서 누구보다 묵시룡에 가까운 존재.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시나리오에 현현(顯現)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