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405화
[‘제4의 벽’이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전대의 묵시룡이 날아오르며 설화의 폭풍이 발생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시야 속에, 나는 고정대를 잃은 허수아비처럼 흔들렸다.
순식간에 창공까지 날아오른 용이 울음을 토하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잠들었다. 화신체들은 머리가 터져버렸고, 전장의 성좌들은 귀를 막은 채 설화를 쏟아냈다.
츠츠츠츠츠츠······.
묵시룡이 지나간 하늘에 새카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용족들이 겁에 질려 달아났고, 분수를 모르고 덤벼들던 용들은 묵시룡의 날개에 스쳐 핏덩이가 되었다.
그 하늘의 중심에서 심연의 흑염룡이 묵시룡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적수를 바라봅니다.]
포효한 흑염룡이 묵시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용이 뒤엉키며 허공에서 격전이 펼쳐졌다.
사실 격전이라기보다는 어른과 열다섯 살의 싸움에 가까웠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분노합니다!]
흑염룡도 다른 용들보다 몇 배는 커다란 몸집인데, 묵시룡 앞에서는 그런 흑염룡이 헤츨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지지 마! 지면 나한테 죽는다!”
자신의 배후성을 응원하는 한수영의 몸에서도 설화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거대 설화들이, 자신의 배후성을 위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파멸의 아포칼립스! 심연의 어비스! 이런 거 몇 번이고 말해줄 테니까 지지 마! 제발!”
그녀의 말에 부응하듯, 심연의 흑염룡이 브레스를 뿜어냈다.
브레스에 맞은 용들이 불에 타는 연처럼 떨어졌다. 하늘 전체가 검은 불꽃으로 뒤덮이는 듯했다.
[강한 용이구나. 내가 잠들기 전에는 너와 같은 존재가 없었지.]
[주접 떨지 마 늙은이. 그런 꼰대 같은 소리나 들으려고 현현한 게 아니니까.]
[버릇을 고쳐줄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날갯짓으로 브레스를 피해낸 묵시룡이 브레스로 반격했다. 피할 틈도 없는 카운터였다.
슈우우우우―
일격을 피해낸 것은 흑염룡의 기지였다. 순간적으로 15살 소년으로 변신한 흑염룡이 용언 마법으로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사용했다.
떨어지는 운석 조각에 맞은 묵시룡이 분노했다.
[······폴리모프? 네놈도 결국 똑같구나.]
[지랄! 늙은이 너도 아까 폴리모프 했잖아.]
[그건 순수한 용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으르렁거리며 다시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간 흑염룡이 외쳤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며 살 거야! 인간이 되든, 오크가 되든, 내 맘이야!]
[모든 용을 대표하기엔 부족한 놈이구나.]
물고 할퀴는 격전에 튀는 스파크.
흑염룡의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던 묵시룡이 천천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흑염룡도 곧장 브레스를 모았다.
브레스와 브레스의 대결.
짙은 흑염의 숨결과 묵시룡의 붉은 홍염이 부딪쳤다.
다음 순간, 하늘의 색깔이 일제히 바뀌었다.
눈앞에 태양이 있는 듯한 열기.
장관이었지만 그것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열기를 견디지 못한 환생자들은 그 황홀한 불꽃을 눈에 새긴 채 잿더미가 되었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최후룡’을 정했습니다.]
심연의 흑염룡은 이 자리에서 가장 ‘묵시록의 최후룡’에 가까운 후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아직 ‘최후룡’은 아니란 뜻이었다.
[‘용의 제전’의 승자가 가려졌습니다.]
붉은 구름 아래로, 뭔가가 힘없이 추락했다.
“흑염룡!”
날개의 외피가 불타오르고, 동체 곳곳이 찢긴 흑염룡.
분하다는 듯, 추락하는 흑염룡의 눈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아아, 한 손만으로 싸우는 건 무리였나······. 뒤는 너에게 맡긴다, 보이.」
전개는 내가 알고 있던 원작과 마찬가지였다.
전대의 묵시룡은 원숙한 신화급 성좌의 힘을 가진 존재.
그리고 이제 저 용은 그 격마저 아득히 뛰어넘는 재앙으로 다시 한번 진화할 것이다.
입에서 한 사발 피를 토해낸 한수영이 다그쳤다.
“씨발······ 김독자! 이거 뭔데! 네 계획이랑 다르잖아!”
“원작대로야.”
“무슨 뜻인데? 잘 되고 있다는 거야 안 되고 있다는 거야?”
뒤쪽에서 유중혁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부를 수 있는 녀석들은 모두 불렀다, 김독자.
유중혁의 배후로 성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망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세상의 빛을 삼킨 용의 거체에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모이고 있었다.
[저건 대체······.]
묵시룡의 부활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시나리오에는 사건이 필요하고, ‘묵시룡’은 사건 그 자체다. <스타 스트림>의 의지가 사건을 원하는 한, 묵시룡의 부활은 정해진 것이다.
원작에서도 이 부활을 막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여기서 얼쩡거리며 전대의 묵시룡을 찾아 헤맨 것. 용의 설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그리고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격을 희생하며 질 싸움을 이어간 것, 그것은 모두······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품속의 스마트폰이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서 묵시록의 재앙이 눈을 떴으니」
tls123이 보낸 최종본에도, 묵시룡의 부활은 예정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한 설화 속에서 삶을 잃은 용들이 포효하고」
「바야흐로 붉은 종말의 계절이 찾아오리라」
추락한 용들이 처절한 울음을 토했다. 설화 속에 희생되고, 자신의 넋마저 빼앗긴 채 이름으로 박제된 무수한 용들이 자신들의 왕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하늘의 건너편에서 메타트론과 아스모데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회담장의 전투도 이제 막 끝난 모양이었다.
메타트론이 묵시룡의 거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왔는가. 하르마게돈의 악룡이여······.]
거대 설화 「하르마게돈」의 악룡. 한때는 악의 표상이었으나, 가장 오래된 악조차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태초의 악.
그 악룡이, 선악의 성좌들을 오연히 내려다보았다.
[늙은 설화들이여. 이제 멸망의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
공기가 거칠게 폭발하며, 묵시룡의 거체가 대기권을 관통했다.
묵시룡이 사라진 하늘의 바깥에서 어마어마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 중입니다!]
[재앙의 개연성이 시나리오의 한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자동 조정됩니다.]
[재앙의 난이도에 알맞은 시나리오가 재할당됩니다.]
그럴 줄 알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원작에서 ‘묵시룡’은 85번 메인 시나리오의 재앙이다. 그리고 ‘성마대전’은 80번 메인 시나리오다.
[시나리오 도약이 발생하였습니다!]
[재앙의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과도한 시나리오 도약으로 화신체에 이상이 발생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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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89 ― 묵시록의 최후룡>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 불가
클리어 조건 : ‘묵시록의 재앙’을 막아내십시오.
제한시간 : 해당 시나리오는 제한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상 : ‘묵시록의 최후룡’과 관계된 거대 설화, ???
실패 시 : <스타 스트림>의 멸망이 가속화됩니다.
* 이 시나리오는 페이즈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참고하여 재앙에 대비하세요.
+
나는 침중한 마음으로 시나리오 메시지를 읽었다.
······89번 시나리오라.
시나리오 번호가 원작보다도 더 후반부였다.
시나리오는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허용되는 개연성이 커진다.
즉, 지금부터 강림할 묵시룡은 원작보다도 더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스타 스트림>의 전역에 재앙 경고가 울려 퍼집니다!]
[곧 부활한 묵시룡이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스타 스트림>의 모든 지역이 89번 시나리오의 대상이 됩니다.]
“독자 씨. 모두 데려왔어요.”
뒤를 돌아보자 정희원과 <김독자 컴퍼니>, 그리고 우리를 따르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몇 시간 전까지 치고받으며 싸우던 이들. 나와 흑염룡이 시간을 버는 동안 유중혁이 규합해 온 아군들이었다.
[미안하다. 생각보다 많이 모아오진 못했어.]
디오니소스가 민망한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의 뒤쪽으로 <올림포스>의 신좌들이 도열해있었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흉포의 군신, 아레스.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 아테나.
하늘 걸음의 주인, 헤르메스.
화산의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
순결한 달빛의 사냥꾼, 아르테미스······.
모두, 우리와 함께 <기간토마키아>를 만들었던 장본인들이었다.
[아버지나 생선 아찌한테도 연락은 해봤는데······.]
‘번개의 좌’ 제우스나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 포세이돈은 참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간토마키아>에서 신화급 성좌들이 보여줬던 위용을 생각하자면 아쉬운 일이었다.
[이걸론 부족하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올림포스>는 강력했지만, 이들만으로 묵시룡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초의 꼬리짓’이 원작의 묘사 그대로라면, 지금의 전력만으로는 꼬리짓의 첫 번째 충격파를 견뎌내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진언이 들려왔다.
[내 옛 동료들도 돕겠다는군, 구원의 마왕.]
북쪽의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일었다.
[성운 <베다>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황홀한 불길과 함께, 먹구름을 꿰뚫고 나타난 성좌들이 있었다. 그들의 외양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넘어갔다.
언젠가 만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몰랐던 존재들.
‘야차신왕(夜叉神王)’, 쿠베라.
‘정화의 불꽃’, 아그니.
거기다 ‘그치지 않는 폭풍’, 바유까지.
모두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와 함께 <베다>의 ‘로카팔라’에 소속되어 있던 설화급 성좌들이었다.
[묵시룡이란 녀석은 어디에 있지?]
[간만에 괜찮은 설화를 얻을 기회로군.]
[인드라 녀석은 부상이 심해서 오지 못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성운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동쪽의 하늘에서.
[성운 <수호의 나무>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다시 서쪽의 하늘에서.
[성운 <아스가르드>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성운 <십이지>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에 현현했습니다!]
······.
한때의 적이었던 성좌들이 <스타 스트림>의 재앙 앞에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그 눈부신 별들의 현현에 유중혁과 한수영을 비롯한 <김독자 컴퍼니>의 동료들이 내 곁에 붙어섰다. 다들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우리도 이제 저들 중 하나니까.”
실제로 우리를 보는 성좌들의 시선은 예전과는 달랐다. 처음 <김독자 컴퍼니>가 만들어졌을 때 우리에게 쏟아진 시선이 경멸이나 멸시에 가까웠다면, 이제 그들의 눈빛은 시기에 가까웠다.
<김독자 컴퍼니>는 자신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마지막 시나리오’까지 나아갈 것이다.
아직까지 대전장에 합류하지 않고 있던 국지전장의 성좌들까지 합류하자, 이제 모여든 숫자들은 오백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새로 합류한 녀석들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
[고작 용 한 마리에 무려 거대 설화라니. 한참이나 남는 장사로군.]
[모두 꺼져라. 묵시룡은 우리 성운에서 사냥하겠다.]
[아뇨, 저 묵시룡은 우리 <수호의 나무>가 사냥하겠습니다.]
[수르야, 우릴 저 묵시룡까지 태워주겠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수르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들이군.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지 못한 건가?]
[아아, 봤죠. 그 이상한 시나리오 연출.]
그 말을 한 것은 국지전장에서 막 합류한 ‘새벽별의 여신’ 바카리네였다.
[고작 일개 괴수종이 그런 격을 가질 턱이 없잖아요, 수르야. <베다>에서 탈퇴하더니 코인이 궁했던 모양이죠?]
[그건 연기가 아니었―]
[열차 기관장께선 겁먹으신 것 같으니 우리끼리 공략 들어가죠.]
<스타 스트림>의 모든 성좌들이 묵시룡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묵시룡이 부활한 것은 이미 수만 년도 더 전의 이야기였으니까.
어떤 신화는, 성좌들에게도 까마득한 옛날의 일인 것이다.
재앙을 겪었던 이도, 재앙 후에 태어난 이도. 모두 재앙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
메타트론이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독단적인 행동은 곤란합니다. 저 묵시룡은―]
[당신은 찌그러져 있어. 당신이 한 짓 때문에 ‘성마대전’의 설화가 통째로 날아갔으니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묵시록의 최후룡’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