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401화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5]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우리는 동시에 망연해졌다. “······대체 누구야?” 쥐어짜 내듯 던져진 한수영의 물음.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애들이 사고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걔들이 넌 줄 아냐.” 아무리 애들이라고 해도, 상황이 상황인데 그렇게 경거망동할 리 없었다. 길영이가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나는 안나 크로프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나 크로프트.” “찾고 있어요.” 아무리 미래의 페이지가 찢어졌다고 해도, 그 페이지가 사라지기 이전까지의 일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파본으로 인쇄된 책이라고 해도 폐기되기까지 딜레이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처럼. [혼돈 수치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한가하게 기다릴 시간 없다.” 먼저 몸을 날린 것은 유중혁이었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힌 안나 크로프트는 열심히 미래의 페이지들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결국, 나와 한수영도 움직이기로 했다. “안나, 알게 되면 전음으로 알려 줘요.” 우리는 안나 크로프트를 뒤로 하고 선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갑판에는 이미 이상 징후를 느끼고 바깥으로 나온 일행들이 있었다. “독자 씨, 무슨 일이죠?” 정희원의 물음에 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같은 진영을 공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엥? 왜 그런 짓을 해?” 이지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혼돈 수치 더 올리면 다 죽는다며? 그래서 천사랑 마왕들도 저기 들어간 거고······.” “우리랑 같은 목적을 가진 이들이 있는 걸까요?” “같은 목적이었다면, 하필 지금 혼돈 수치를 올리지는 않겠죠.” 내가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일행들은 벌써 해답을 찾은 듯했다. “그럼 설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못 막으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어떤 미친놈들이······ 아니, 대체 왜?” 어째서 세계에 멸망을 초래하려 드는가. 나는 그에 적확한 대답을 내놓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스타 스트림>에는 모든 불가해한 상황에 만능적으로 쓰일 수 있는 대답이 하나 존재한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설화’가 있으니까요.” 이 세계에는 ‘선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선도 악도 아닌 <김독자 컴퍼니>가 존재하듯, 세상에는 우리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설화를 추구하는 자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멸망을 막기 위해 살아가지만, 어떤 이들은 멸망을 위해 살아간다. 츠츠츠츠츠츠······! 허공의 개연성이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장 곳곳에서 튀어 오르는 스파크. 이미 선수상에 올라 있던 유중혁은 개중 제일 큰 스파크의 위치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총 다섯 군데다. 흩어져.” 말을 마친 유중혁의 신형이 북쪽을 향해 사라졌다. 나는 일행들에게 지시했다. “한수영은 동쪽. 유승이랑 지혜, 길영이는 남쪽으로. 희원 씨는 혹시 모르니 함선을 맡아주세요.” “독자 씨는요?” “저는 서쪽으로 갑니다.” 스파크는 모든 방위에서 터지고 있었다. 북쪽에 한 개, 동쪽에 한 개, 서쪽에 한 개, 그리고 남쪽에 두 개. “혼란을 일으킨 게 어느 쪽 진영인지 모릅니다. 만약 같은 진영의 소속원이 저지른 짓이라면, 절대 싸우지 말고 다른 일행들을 부르세요.” 이제 상황이 거꾸로 되어버렸다. 지금까지는 ‘선’에 ‘선’으로, ‘악’에 ‘악’으로 대처해서 혼돈 수치를 키웠다면, 이젠 ‘선’에 ‘악’으로, ‘악’에는 ‘선’으로 대처해야 한다. ‘성마대전’ 본래의 규칙을 지켜야만, 더 이상의 혼돈 수치가 상승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젠장, 상황이 바뀌니까 갑자기 짜증나네. 성좌들 열받을 만도 해.” “출발할게요!” 이지혜와 아이들이 먼저 출발했고, 나와 한수영도 움직였다. 흑염을 흩뿌리며 도약하는 한수영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많이 나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말했다. “조심해.” 슬며시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동쪽을 향해 날아갔다. 자식이, 걱정을 해줘도. ―너나 조심해, 멍청아. 한 박자 늦게 날아오는 [한낮의 밀회]에 기분이 묘해진다. 유중혁도 한수영도 많이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하면, 내가 오버하는 걸까. [혼돈 수치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6]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해 허공을 주파했다. [마왕화]를 발동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킬의 가속력은 굉장했다. 순식간에 창공을 가르고 스파크의 근원점에 도착한 나는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숨어 있군. 전장 곳곳에는 환생자들의 시신이 너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시신들을 보며 공포에 질린 환생자 몇이 주저앉아 있었다. 분명 누군가가 여기서 같은 편 학살을 벌인 것이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사건 정황을 수집해 상황을 진단하는 통찰력이 상승합니다!] 나는 주변에 떨어진 설화 파편들을 읽었다. 학살이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도주의 흔적은 감지되지 않는다. “사, 살려 주세요. 마왕님!” 무릎을 꿇은 여섯 명의 환생자들이 바닥에 부복한 채 엎드렸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여섯 명의 환생자들은 대부분 전투에서 중경상을 입고 피와 설화를 질질 쏟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 설화가 매우 안정된 녀석이 있었다. “너.” 천천히 고개를 드는 남성의 눈에 사이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그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종말의 구도자’냐?” 순간, 사내가 나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었던 나는 가볍게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목을 틀어쥐었다. “컥, 커헉······!”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예상대로, 이 녀석이 내가 찾던 범인이었다. 마왕의 권속. 굳이 특성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녀석도 아니었다. “벌써 활동을 시작한 건가? 아직은 때가 아닐 텐데?” 내게 목을 틀어 잡힌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을 발했다. “위, 위대한 종말이 온다. 이미 모든 시나리오는 정해져 있다. 숭고한 절대 설화가 실현될 것이다!” 광신도처럼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살짝 질리는 기분이었다. 맞다. 원작에서도 ‘종말의 구도자’의 대다수는 이런 녀석들이었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단 하나의 ‘절대 설화’가 이미 만들어져 있으며, 모든 시나리오는 그 설화의 의지가 실현되는 것이라 믿는 녀석들. 「킥 킥킥」 머릿속에서 [제4의 벽]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종말의 구도자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설화가, 내가 읽었던 한 권의 소설이란 것을. 「원 래다 멸 망 할 운명 인 건 맞 지」 ‘운명 같은 건 없어.’ 머릿속에, 유중혁이 살았던 수많은 회차들이 스쳐간다. 수백 번이나 반복되어온 ‘성마대전’. 그리고 그 ‘성마대전’의 마지막은 항상 비슷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작’일 뿐이다. “말해. 몇 명이나 ‘성마대전’에 참가한 거지?” 그륵, 그르륵. 사내의 입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묵시룡을 해방할 셈인 거냐? 그런 짓을 하면 모든 게 끝장난다. 너희가 생각하는 설화의 결말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설화 자체가 끝장나버린다고.” 사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낄낄거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격의 파동에 주변의 환생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내 격을 정면에서 받아낸 사내가 부르르 떨더니 칠공에서 피를 쏟았다. 나는 입을 열지 않고 말했다. [전장에 참가한 녀석들의 명단을 읊어라.] 아득한 격의 위협에도, 사내는 공포에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구, 원의, 마, 왕······.” 쾌락과 환희에 젖은 표정. 입으로 피를 질질 흘리는 녀석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 죽여줘! 죽여줘어!” 이 미친놈들은 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명단을 알아낼 수 없다면 직접 몸으로 뛰어 찾는 수밖에. 망설임 없이 녀석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 [현재 혼돈 수치 : 87] 아차, 이 녀석은 ‘악’이었지. 재빨리 목줄을 틀어쥔 손을 뗀 찰나, 녀석의 칠공에서 흘러나오는 설화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몸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괴이쩍게 웃는 사내의 얼굴. ······자폭 시퀀스. 피하기엔 늦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디선가 섬광이 날아와 사내의 몸을 일직선으로 꿰뚫었다. 콰지지지직! 마치 태양을 깎은 듯 눈부신 섬광으로 만든 창. 환한 빛살 속에서, 종말의 구도자는 감전이라도 된 양 몸을 떨었다. 외부로 팽창하던 폭발의 힘이 섬광의 창을 통해 흡수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생기를 잃어버린 종말의 구도자는 새까만 재가 되어 사멸했다. 나는 사방으로 흩뿌려진 빛의 설화를 바라보았다. ······이거 익숙한 설화인데? [이런 축제에 나를 부르지 않다니. 섭섭하군, 구원의 마왕.] 진언을 듣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수르야!”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 그는 한때 <베다>의 성좌였으나, 지난 올림포스 전을 계기로 우리와 ‘거대 설화’를 공유하게 된 성좌였다. [못 본 사이 대단한 격을 이루었구나. 그대가 인드라를 해치웠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얼빠진 인드라가 가끔 동네북처럼 여겨지긴 하지만, 운만으로 이길 수 있는 녀석은 아니지.] <베다>를 탈퇴했기 때문인지, 수르야는 인드라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멸한 종말의 구도자의 파편을 살피며 말했다. [거대 설화 상태가 좀 묘하다 싶었더니, ‘종말의 구도자’가 벌써 여기까지 온 모양이군.] “이들을 알고 계십니까?” [<베다>에도 이 녀석들이 침투했었다.] ······<베다>에도? 그러고 보니 베다 안에서도 내분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쩌면 그게 종말의 구도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츠츳, 츠츠츳. 전장 곳곳에서 번쩍이던 스파크가 급속도로 잦아드는 것이 보였다. 아마 다른 일행들도, 무사히 진압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대충 정리는 된 것 같군요. 생각보다 침투한 녀석들이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종말의 구도자가 나타난 것치고는 싱거운 결말이었다. 그런데.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8] ······뭐? 나는 황급히 전장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전장 어디에도, 스파크가 튀는 곳은 없었다. 같은 진영이고 다른 진영이고 할 것 없이, 전투 자체가 없었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9] 그런데도 혼돈 수치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등줄기로 서늘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잠깐만, 이거 설마. [아래쪽이 아니다.] 수르야의 말과 함께, 나는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위에 떠오른 회색 빛 구체. 대천사와 마왕들이 회담을 위해 들어가 있던 그 구체가, 무지막지한 스파크를 뿜어대며 진동하고 있었다. ······‘종말의 구도자’가 저 안에 있다고?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90] 혼돈 수치는 오직 같은 진영끼리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만 상승한다. 그런데 저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려면······. [대전장의 기후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에 모여든 구름들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서 재앙의 기운이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빌어먹을. 쿠구구구구! 수르야도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어쩌면 오늘 내 무덤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돈 수치가 90을 넘어섰습니다!] [종말의 거대 설화가 준동합니다.] [거대 설화, ‘묵시록의 최후룡’이 이야기의 시작을 준비합니다!] 대전장 전체를 뒤흔드는 지진. 95번 시나리오에서 느꼈던 아득한 절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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