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화

400화 내 선언을 해석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를 죽이면, 너희도 반드시 죽는다. 성좌들은 처음에는 동요했고, 그다음에는 웅성거렸으며, 마지막으로 침묵했다. 누군가는 아가레스를, 누군가는 메타트론을 바라보았다. 이 전장의 가장 큰 결정권자들. 하지만 결정권자들은 그저 알 수 없는 눈으로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떤 명령도 떨어지지 않자, 뜻밖에도 전운은 가장자리에서부터 천천히 감돌기 시작했다. [<김독자 컴퍼니>.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겠다.] 진언을 터트린 것은 <파피루스> 쪽 성좌였다. [그런데 우린 너희들에게 빚이 있어.] “글쎄, 빚이 있는 게 대체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군.” 내 대꾸와 함께, <파피루스>의 성좌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너희는 선도 악도 아니라고 했지. 하지만 그 말은, 선이기도 하고 악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성운 <파피루스>는 소속 진영으로 ‘악’을 택했다. [적어도, ‘선’을 택한 놈들은 모두 죽여주마.] 현명한 선택이었다. 혼돈 수치가 오르는 것은 선이 선과 싸울 때, 그리고 악이 악과 싸울 때뿐이니까. 지금 <파피루스>는 이 전장의 규칙에 위배되지 않고 우리를 심판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가장 오래된 악이 당신을 배제하길 원합니다.] [가장 오래된 선이 당신을 배제하길 원합니다.] 이 ‘성마대전’에서, 우리는 그저 바이러스에 불과하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훼방 놓고, 병균을 퍼뜨리는 숙주. <파피루스>를 중심으로 모여든 선악의 파도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를 향해 반감을 불태우던 성좌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적의를 돌리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경직된 일행들의 표정. 유중혁이 태세를 바꾸며 말했다. “김독자.” 유중혁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명계>와 <아스가르드>가 함께하고,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이 한데 모였다 한들. 저들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순간 인지 능력이 가속화되며, 시간이 미미하게 느려졌다. 「생각보다 밀려드는 속도가 빠르다.」 「다수의 성좌들이 너무 빨리 결정을 내렸어.」 「혼돈 수치 80을 먼저 찍었어야 했나.」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무수한 문장들. 나는 ‘멸살법’을 떠올렸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명계>에 있을 양부모님? 아직 참전하지 않은 제천대성? 아니면, 이계의 신격인 은밀한 모략가? 척준경과 한반도의 성좌들? 스승님들과 장하영의 얼굴도 떠올랐다. 특히 장하영. 도움이 절실하긴 하지만, 장하영은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악과’가 당신의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책임감인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이 세계에 태어난 장하영이 시나리오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오롯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이야기를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 장하영에게 <김독자 컴퍼니>를 권유하거나 미래 정보를 좀처럼 제공하지 않는 것은 그런 양가감정 때문이었다. “아아아아악!” 최전방에서 적을 맞이한 환생자들의 대열이 무너지고 있었다. 쓰나미에 휩쓸려버린 환생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찢어졌다. [죽어라!] 진부한 대사들을 늘어놓으며 달려드는 성좌와 마왕들을 보며, 한수영이 긴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가 이겼네. 원래 저런 대사 먼저 지껄이는 쪽이 빨리 뒈지거든.” 한수영의 농담에 일행들이 힘껏 입꼬리를 움직였다. “온다.” 대사는 진부했으나, 그들의 격까지 진부한 것은 아니었다. 선악은 이 세계에서 가장 진부한 설화지만, 가장 강력한 설화 중 하나였다.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긴장감은 지금껏 겪었던 어떤 전장과도 달랐다. 이것은 실제다. 이것이 성마대전이고, 성좌들의 진짜 힘이다. 콰콰콰콰콰! 대전장을 덮어버릴 선악의 격. 격의 해일은 순식간에 우리의 코앞까지 밀려왔다. 300미터. 200미터. 100미터. 유중혁이 말했다. “지금.” 모두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가 동시에 격을 발출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담화자가 모였습니다.]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계의 봄」이 우리를 보호하듯 감쌌고,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다가오는 모든 것을 물어뜯을 기세로 포효했다. 이것만으로 저들을 막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같은 ‘거대 설화’라고 해도 쌓아온 세월이 다르다. 카이제닉스의 50년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격차. 그럼에도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였다. 30미터. 포신의 장전을 마친 이지혜가 검을 치켜들었다. 해상전신의 가호와 함께, 용머리 선수상이 붉게 달아오른 바로 그 순간. “잠깐!” 내가 이지혜를 말렸다. 놀란 이지혜가 입을 벌렸고, 나는 허공에서 헤매는 그녀의 칼을 움켜쥐었다. 발사 직전의 포신이 에너지를 회수했다. “무슨 짓이야 아저씨!” 기행에 놀란 것은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둥 살 둥 싸워도 죽을 판에, 갑자기 방해라니. 나는 그에 대답하는 대신 반대편을 가리켰다. “어?” 정확히 10미터를 남겨놓고, 거짓말처럼 선악의 파도가 멈춰 있었다. 츠츠츠츠츳! 마치, 무언가에게 강력한 통제를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씨근덕대는 성좌들, 욕설을 지껄이는 마왕들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누군가는 불만스런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굳어버린 해일의 꼭대기로, 하나의 성좌와 하나의 마왕이 떠오르고 있었다. 메타트론과 아가레스. 이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두 존재가, 처음으로 진언을 발했다. [모든 성좌들은 적의를 거두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오라!] [전투를 잠시 중단한다.] 갑작스런 휴전 선언에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그 휴전의 이유가 새겨져 있었다. [혼돈 수치가 80을 넘어섰습니다.] [멸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 혼돈 수치 80.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우리를 구한 것은 성좌들도, 마왕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 전쟁에서 가장 영향력이 약했던 이들이었다. “아마 전방의 환생자들이 죽는 과정에서 같은 진영끼리의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약한 선도 선이고. 약한 악도 악이다. 우리를 죽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선악은, 그런 ‘약자’를 경시한 대가로 멸망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부터 30분에 1포인트씩, 혼돈 수치가 상승합니다.] 혼돈 수치는 80을 넘기는 순간부터 증가 속도가 빨라진다. 지금부터는 아무 충돌이 없더라도 혼돈 수치가 오르게 되고, 정확히 10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임계점에 도달한다. 즉, 묵시룡의 부활이 확정된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래된 재앙들이 즐거워합니다.] <스타 스트림> 역대 최악의 재앙 중 하나, 묵시룡. 선이든 악이든 묵시룡을 부활시키고 싶은 쪽은 없었다. 묵시룡이 부활하면,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 중 사분의 일은 죽어 나갈 테니까. 이 전장의 누구든 그 사분의 일에 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성마대전’의 대전장이 일시적으로 동결됩니다.] [현재 선과 악의 대표들이 긴급 회담 중입니다.] 그러니 지금 허공에 떠 있는 저 메시지는,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선과 악의 발버둥이었다. [당신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신화급 설화가 발아 중입니다!] [당신의 새로운 수식언에 이 설화가 반영될 것입니다.] “칫,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나는 투덜거리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일행들은 함선 [터틀 드래곤]의 선실에 모여 앉아 있었다. 정희원과 신유승이 죽은 듯 누워 있는 이현성을 간호하고 있었고, 이지혜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진짜 이게 끝이야? 우리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이지혜는 안도한 표정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성공을 축하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미안함을 가집니다.] “······우리엘? 진언으로 말씀해 주셔도 되는데요.” 선실의 모퉁이에 쪼그려 있던 우리엘이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그런 우리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 우리엘은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성운이 <김독자 컴퍼니>를 공격한 것. 그리고, ‘절대 선’이라 자칭하는 작자들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걱정 마세요, 우리엘.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덴>도······ 솔직히 별생각 없습니다. 지금껏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정말이냐고 묻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증오를 드러내 봤자, 우리엘은 상처만 입을 뿐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서기관은 사실 그렇게 나쁜 존재는 아니라고 말······.] “저도 압니다. 메타트론이 어떤 성좌인지는. 조금 쉬고 계십시오.” 나는 그렇게 말한 후 선실 밖으로 나왔다. [30분이 경과했습니다.] [혼돈 수치가 1만큼 상승합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2] 들려오는 메시지와 함께, 전장의 창공에 회색빛의 거대한 구체가 떠 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구체. 아마 저 구체 안에, 최상위권의 마왕들과 대천사들이 모조리 들어가 회담을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선과 악이 한마음 한뜻으로 <김독자 컴퍼니>와 ‘구원의 마왕’의 뒷담을 까고 있겠지. “김독자.” 흠칫 돌아보자,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요즘은 네가 내 이름 부르면 겁부터 나. 또 뭔가 사고 쳤을까봐.” “사고는 네가 치겠지.” 투덜거린 한수영이 허공의 구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뭐가.” “너무 순순히 전개되잖아.” “자기들도 죽기 싫으니까 그렇겠지.” “정말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지속합니다.] 하얗게 떠다니는 설화의 파편들을 보니, 아무래도 한수영은 저 회담이 시작될 무렵부터 줄곧 「예상표절」을 가동 중인 모양이었다. 내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데?” “쟤들 너무 조용해. 아무리 묵시룡이 두렵다고 해도······ 뭔가가 찜찜하다고.” 확실히 작가의 감이란 날카로운 데가 있다. 사실 나도 한수영에 말에 동의했다. 선과 악의 회담. 말은 좋다. 하지만······ 내가 아는 메타트론은, 절대로 이런 타이밍에 물러날 존재가 아니었다. 절대 선의 온전한 실천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존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나는 회색 구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낼 방법은 있지.” “뭔데?” 나는 한수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수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 “빌어먹을, 그런 방법이 있었지 참.” 회담이든 전쟁이든 결국 앞으로 9시간 안에 결판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단기 미래라면,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잘 읽어낼 수 있는 존재를 우리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후미 쪽의 선실로 달려갔다. 우리가 찾는 존재는, 이미 우리와 함께 있었으니까. “야, 예언자!”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뜻밖에도 선객이 있었다. 사나운 얼굴의 유중혁이 안나 크로프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지?” “말 그대로예요.” 놀란 한수영이 외쳤다. “미친놈아! 지금 뭐하는 거야?” 유중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더니 멱살을 놓았다. 우리를 발견한 안나 크로프트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살려줘서 고마워요. 역시 ‘구원의 마왕’이군요.” “뭐, 딱히 구해 드리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쪽도 같은 이유로 저를 찾아온 거겠죠?” 한수영과 내가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뭘 보느냐는 듯 마주 노려보는 유중혁. 역시 유중혁이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 저 녀석은 우리보다 빠르게 이 상황의 해결책을 찾아냈던 것이다. 한수영이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하지만 유중혁은 전혀 승리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래는 읽을 수 없었어요.” “무슨 말이야?”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안나 크로프트는 나와 관련된 미래는 좀처럼 예지하지 못했다. 아마 [제4의 벽]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뭐랬더라, 누군가가 낙서를 한 것처럼 미래에 노이즈가 꼈다고 그랬던가. 그런데 안나 크로프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미래에 노이즈가 낀 게 아니라, 아예 읽을 수가 없어요. 누군가가 페이지에 낙서를 한 게 아니라, 낙서한 페이지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한수영과 내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아주 천천히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 “김독자, 이거······.” 페이지에 낙서를 한 게 아니라, 페이지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종류의 미래는 하나뿐이다. “······설마?”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혼돈 수치가 1만큼 상승합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3] “아직 30분 안 지났는데?” “시간이 경과해서 오른 게 아니다.” 굳어진 유중혁의 목소리. 시간이 안 지났는데도 혼돈 수치가 오른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84] 누군가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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