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399화 Episode 76. 묵시록 ―쿠구구구구! 화면 속 선과 악의 성좌들이 서로를 향해 매서운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언제든 끊어져 버릴 듯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그 균형을 지키는 것은 가장 작지만 밝게 빛나고 있는 한 성운이었다. [선악이 모두 모인 것을 보는 건 정말 간만이군요······.] 화면을 보는 만다라의 수호자, 석존은 묘한 표정이었다. 그의 동공에 아주 오래된 기억이 흘러가고 있었다. 시나리오 이전의 시나리오, 선과 악, 그리고 중립이 모두 함께했던 시절.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모두가 함께 멸망의 용과 맞섰던 이야기······. ―저도 일행들을 돕고 싶어요. 그 말에, 석존의 시선이 곁에 놓인 작은 수조로 향했다. 그 수조 안에서, 희게 빛나는 영혼의 소체가 웅웅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 언제쯤 환생할 수 있는 거죠? [저곳은 아해의 전장이 아닙니다. 아해는 더 커다란 의미를 수행할 존재로 환생할 것입니다.] ―저들이 내 의미에요. 영혼이 되어서도, 유상아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여기서 저들을 살리지 못하면 제 환생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해요. [의미라······.] 석존은 고개를 돌려 수조 맞은 편에 놓인 또 다른 수조를 응시했다. 수조 안에는 법의를 갖춰 입은 여인의 화신체가 담겨 있었다. [그대는 내가 아끼던 아해의 몸에 깃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고요? 환생하는 게 아니었나요? [그 몸을 화신체 삼아 환생하는 것입니다.] ―그럼 본래 그 몸의 주인은요? 석존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처에게도 슬픔이 있을까? 유상아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저 사람이 당신의 ‘의미’인가요? 석존은 말없이 법의를 입은 수조 속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주의 섭리로 되돌아간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수레바퀴의 공허한 회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세요? 당신이 아끼던 사람이었잖아요. [아해도 곧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환생자가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니.] ―전 아직 환생자가 아니에요. [그런 굴레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대에게 소중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남을 저주하시는 게 취미이신가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해여.] 석존은 화면 속의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오래 살아온 성좌들이 있었다. [성좌들은 평생을 불면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시나리오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꿈에서조차 다른 이들의 설화를 탐식합니다. 그 탐식을 통해 자신이 처한 시나리오를 지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늘 불안해하지요. 자신들이 왜 불안한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그들 중 누구보다 오래된 성좌인 석존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원한 백일몽을 꾸듯 시나리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음을 외면하기에 죽음을 모르고, 죽음을 모르기에 시나리오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자신을 구원할 단 하나의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화면 속에서 <김독자 컴퍼니>를 후원하거나 적대하는 성좌들이 무수한 간접 메시지를 띄우고 있었다. 석존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런 화면의 가장자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환생자는 다릅니다.] 그곳에, 이 섬의 환생자들이 있었다. <김독자 컴퍼니>를 따라온 환생자들. 그리고 여전히 선과 악의 한쪽 측에 가담하여 거대 설화에 부려지고 있는 환생자들······. 석존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환생자는 성좌처럼 영원을 살아가지만, 죽고 다시 태어납니다. 죽음을 알기에 깨어남을 알고, 깨어남을 알기에 자신이 시나리오 속의 일개 부속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환생이란 시나리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격이 낮은 환생자들은 죽음과 함께 기억을 잃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니르바나처럼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종으로, 다양한 성별로 환생하여 시나리오를 계속했다. 인간으로. 개구리로. 오크로. 엘프로. 개미로······. 아마 저것은, 무수한 환생의 끝에 그들이 얻은 표정일 것이다. ―다들 체념한 얼굴이에요. [누가 이기든 바뀌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는 바꿀 수 있어요. 우린 늘 그래왔어요. [하지만 그것이 ‘시나리오’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하는 건가요? 뭘 해도 시나리오는 시나리오니까? 그건 도망치는 거예요. 싸워보지도 않고서 패배를 인정하는 거라고요. [아해여, 그건 환생자들의 삶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환생자들은 무수한 삶을 시나리오와 투쟁하며―] ―단 한 번의 삶도 포기 않고, 다 바쳐서 싸워보셨나요? 그 말에 석존이 입을 다물었다. 단 한 번의 삶도 포기하지 않았는가. 석존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1800번이 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싸웠던 사람도 있어요. 유상아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검은 코트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 모든 삶을 함께 지켜본 사람도 있고요. 그리고 그 옆에 선 흰 코트의 사내가,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쓰러진 이현성이었다. [숫자를 헤아리기엔, 이 몸은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헤아릴 수 있는 숫자도 있군요.] 석존이 이현성을 보며 말했다. [이 섬에 늘어날 환생자가 하나.] * “아직 아닙니다.” 나는 쓰러진 이현성의 맥박을 짚었다. 맥박은 뛰지 않았다. 코는 숨을 쉬지 않았고, 까뒤집은 눈은 흰자위만 보였다. “······정말이에요?” 정희원은 기적이라도 믿고 싶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얗게 탈색된 그녀의 머리칼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다. “확실히, 안 죽었습니다.” 일행들은 복잡한 얼굴들이었다. 이지혜는 내가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고, 이길영은 내 말이 거짓이라도 기꺼이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이제 죽음의 정의까지 바꿔버리기로 한 거냐?” “현성 씨가 죽었다면, 강철의 주인도 시나리오에서 퇴장했을 거야.”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간접 메시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직 강철의 주인은 시나리오에서 퇴장하지 않았다. 정희원이 다급히 내 팔을 붙들었다. “그럼 현성 씨는 대체―” “희원 씨가 각성하셨듯, 현성 씨도 각성한 겁니다.” 나는 이현성의 피부를 흘러 다니는 희미한 설화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강철의 설화. 겉으로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지금 이현성의 내부는 강철의 설화로 충만하게 차올라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성 진화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현성이 괜히 원작에서 ‘최강의 방패’라 불리었던 게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누군가를 지켜냈을 때, ‘강철검제’는 강철화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의식이 깨어났을 때, 이현성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방패가 되어있을 것이다. 정희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럼 살아있는 거죠?” “예.” “정말이죠? 거짓말 아니죠?” 무너진 정희원의 볼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이현성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뛰지 않는 심장. 그 무심한 침묵을 느끼며, 정희원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네?” 나는 이현성을 내려다보았다. 순도 백 퍼센트의 강철처럼 굳어버린 이현성의 심장. 이제 이현성의 심장은 다시는 뛰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지금의 정희원은 알지 못하겠지······. “하지만 현성 씨는 분명 살아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지금 당장은 도움이 안 되겠군.” 격을 개방한 유중혁이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슬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쿠구구구구! 전장의 건너편에서, 우리 성운을 노려보는 두 세력이 보였다. 한쪽은 선, 그리고 한쪽은 악. 우리에겐 그저 적일 뿐인 존재들. 양 세력의 중심에는 ‘하늘의 서기관’ 메타트론과, ‘지옥 동부의 지배자’ 아가레스가 있었다. [바르바토스를 쓰러트린 게 누구냐?] 그 물음에 전장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졌다. 마왕 서열 8위 바르바토스가 죽었다. 하지만 마왕들은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들이었다. [‘성마대전’을 건드리다니, 제정신이 아닌 녀석들이구나.] 우리 일행을 보는 녀석들의 시선에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네깟 것들이 지금까진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담긴 조소. 그들의 짐작대로, 지금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유중혁은 인드라와의 싸움으로 마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고, 한수영도 대천사들과의 전투로 몹시 지쳐 있었다. 쓰러진 이현성이나 탈진한 정희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도움이 될 만한 쪽은 ‘넥스트 시티’에 다녀온 아이들이었다. “아저씨, 걱정 마. 내가 다 쓸어버릴게.”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는 이지혜와 고개를 끄덕이는 신유승은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다. 내 예상대로, 아이들은 ‘넥스트 시티’에서 가공할 성장을 거듭해 돌아온 모양이었다. 이길영도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형, 누구부터 죽일까요? 누가 경험치 제일 많이 줘요?” 압도적으로 불리한 이 상황에도, 마치 게임이라도 즐기는 듯한 말투. [화신, ‘이길영’의 배후성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된다. 아직, 이길영을 쓸 때가 아니다. 그리고 쓴다고 해도, 승산을 확신할 수도 없다. 곁에 있던 안나 크로프트가 물었다. “정말 싸울 생각인가요? 승산이 없다는 건 알고 있죠?” 그렇게 묻는 안나 크로프트의 노림수는 뻔했다. 그녀는 이미 ‘선’의 진영에 소속된 상황. 여차하면 내 뒤통수를 까버린 뒤 그쪽에 편승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승산이야 늘 없었죠. 싸울 생각은 있고요. 이길 자신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그쪽이 배신하지 않을 때의 이야기지만.” 배신이라는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눈을 흘기며 한쪽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쪽에 도열해 있던 셀레나 킴과 이리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김독자 컴퍼니>를 지지합니다.] 대경한 성좌들과 마왕들이 고함쳤다. [아스가르드, 제정신인가?] [망치의 신이 드디어 자기 머리를 깨버린 모양이군.] [장난의 신이여! 설마 여기서도 난동을 부릴 생각인가?] 진언들이 난립하는 와중에도, 오히려 일이 흥미롭게 돌아간다는 듯 히죽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서열 5위의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 마르바스였다. [어리석은 선택이다, <아스가르드>여. 그대들의 성운은 강력하지만 참가한 성좌들의 숫자는 적어. 전장을 흔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성운 하나가 아니야.” [그럼 또 누가 있지? <김독자 컴퍼니>? 성좌라고는 그대 하나뿐인 작은 동아리를 ‘성운’이라 칭하고 싶은 것인가?] 마왕들 사이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성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합니다.] [성운 <명계>가 <김독자 컴퍼니>를 지지합니다.]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명계>?] [<올림포스>여!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저쪽은 그대들의 하위 성운 아닌가!] 그 말과 함께 전장 한쪽이 개방되며 <올림포스>가 나타났다. 역시, 저들도 이 시나리오에 참전했었던 모양. 선두에 선 이는 우리에겐 익숙한 성좌였다. [으음, 이거 곤란한데······. 여기서 <기간토마키아>를 재현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처하다는 듯 나를 보며 웃는 ‘술과 황홀경의 신’인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 우리와 싸우실 겁니까?” [후, 술 땡기게 하네 진짜.] 품속에서 병을 꺼낸 디오니소스가 벌컥벌컥 포도주를 들이켰다. [아 몰라. 일단 좀 취한 다음 생각하지 뭐. 구원의 마왕, 너도 와서 한잔해. 우리 할 얘기가 많잖아. 안 그래?] “감사한 제안이지만, 지금은 조금 곤란할 것 같군요.” 피식 웃은 디오니소스가 나를 향해 건배를 했다. 그것으로 <올림포스>는 충분한 대답을 한 셈이었다. 우리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적의를 보이지도 않는다. 거대 성운 하나가 갑자기 참전을 보류하자, 선악의 진영에서 당혹스러운 분위기가 번져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대충 선수 소개는 끝난 것 같으니, 슬슬 싸워보자고.” 내 도발에, 양 세력의 성좌와 마왕들이 분노를 토해냈다. 설마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곁에 있던 안나 크로프트가 제정신이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수영이 말했다. “예언자가 생각보다 눈치가 없네. 가만히 보기나 해.” 한수영의 핀잔에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왕 하나가 새카만 칼을 뽑으며 앞으로 나왔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아가레스와 메타트론은 침묵할 뿐이었다. [다수의 마왕이 당신에게 강렬한 적의를 보입니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마왕의 검이 나를 향해 움직인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같은 진영의 소속원들이 충돌했습니다!] [혼돈 수치의 상승이 가속화됩니다!] [혼돈 수치가 1 올랐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 : 76] 놀란 마왕이 눈을 끔뻑였다. 멀리서 표정이 굳어진 메타트론과 아가레스의 표정이 보였다. 그들은 <스타 스트림>의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성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진언을 발했다. [지금 너희가 싸우려는 대상은, 선도 악도 아니야.] <김독자 컴퍼니>에는 선과 악, 둘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우리 성운에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선과 악의 전쟁인 ‘성마대전’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 [우릴 죽이려 든다면 죽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어떻게 될까?] 하늘 저편에서 혼돈의 기운을 품은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혼돈 수치가 80을 넘기면, 이제 멸망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치킨 게임인 셈이다. [가장 오래된 선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가장 오래된 악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먼저 겁을 먹고 물러나는 쪽이, 확실히 패배하는 게임. [우리가 다 죽는 게 빠를까, 아니면 너희가 묵시룡에게 멸망하는 게 빠를까? 궁금하지 않아?]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며 웃었다. [나는 몹시 궁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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