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396화 찰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왕을 상대하는 법, 다들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그들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고,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동료를 잃었다. 「“이제 마지막 시나리오를 시작해 봅시다.”」 몇 번이나 그 동료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앞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들이 살아온 삶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가십시오!” 가볍게 뛰어오른 정희원이 이현성의 손바닥에 안착했고, 이현성이 그런 정희원을 힘껏 내던졌다. 빛살처럼 쏘아진 정희원이 전장을 가로질렀다. [지옥염화]의 불길이 화려한 곡선을 그리며 쇄도하자, 마왕 하겐티가 신음을 흘렸다. 가죽 일부를 잘라내 불을 끈 하겐티가 거친 울음으로 화답했다. [거기 숨어 있었구나!] 지체없이 돌진하는 하겐티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압!” 이현성이 하겐티의 뿔을 잡고 막아내는 사이, 정희원은 쓰러진 카일을 흔들었다. “카일! 정신 차려! 카일!” 마치 다시 한번 에리히 스트라이커가 된 것처럼, 정희원은 애타게 카일의 이름을 불렀다.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다시 한번 시나리오를······.”」 그녀의 말을 듣고, <김독자 컴퍼니>의 말을 듣고 여기까지 온 존재들. 자신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그녀를 따라온 이들이었다. 그러니 절대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마침 다가온 근위 기사 중 하나가 카일을 들쳐 업었다. “부탁해요.” “맡겨 두십시오.” 근엄하게 고개를 대답한 기사는 곧장 후방을 향해 달려나갔다. 정희원은 이현성을 돕기 위해 다시 검을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섬뜩한 예감이 그녀의 전신을 흘렀다. 지금껏 몇 번 겪어본 적 없던 예감이었다. [암흑성]에서 김독자를 잃었을 때, [73번째 마계]에서 다시 한번 김독자를 잃었을 때. 그리고······. “희원 씨, 엎드리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이현성이 그녀를 안고 굴렀다. 섬광이 정희원의 팔뚝을 훑고 지나갔다. 자신의 입에서 그토록 끔찍한 비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정희원은 처음 알았다. 바르바토스의 탄환. 이현성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이현성이 말했다. “가십시오. 제가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달려드는 하겐티의 뿔을 양손으로 받아내고, 멀리서 날린 아미의 불타는 창날을 이빨로 깨물어 막았다. 혀가 녹아내리고 안구가 익는 열기 속에서도 이현성은 불굴의 극기로 모든 것을 견뎌냈다. ―어서! 전음이었다.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함께 있던 시절. 그녀와 이현성을 연결해주었던 스킬. 그 기술로, 이현성이 말하고 있었다. ―전 버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희원 씨를 지키면서 버티는 건 무립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현성은 늘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정희원은 도망칠 수 없었다. 날아드는 마왕 스토라스의 은색 발톱을 쳐내며 정희원은 이를 악물었다. [지옥염화]의 불길이 약해지고, 이현성의 강각에 균열이 커져가고 있었다. ‘유혹과 불모의 마왕’ 제파르가 웃었다. [아주 슬픈 연인이구나. 나는 그런 비극이 좋다.] “닥쳐.” [몇몇 성좌들이 화신들의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힙니다.] 정희원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삶이 이야깃거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달아나던 환생자들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정희원과 이현성은 싸웠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성마대전’의 기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유롭던 마왕들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더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군.] 그리고 다시 한번, 어두운 섬광이 불을 뿜었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날아드는 탄환. 바르바토스의 특기인 [멸성탄]이었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정희원이 몸을 웅크리며 피해 면적을 최대한 줄이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덮었다. 둔중한 충격과 함께, 뭔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퍼걱! 탄환은 한 발로 그치지 않았다. 퍼거거걱! 한 번, 두 번, 세 번. 연달아 쏘아진 탄환에 뭔가가 터지고, 부서지고, 망가지고 있었다. [설화, ‘가장 순수한 전우애’가 동요합니다.] 정희원은 몸부림치며 그것을 안고 굴렀다. 탄환에 의해 넝마가 되어버린 신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설화, ‘검과 방패’가 이야기를 멈춥니다.] “현성 씨?” [성좌, ‘강철의 주인’이 막대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현성 씨. 일어나요.” 막간의 여흥처럼 포화가 그쳤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졌다. 정희원은 다시 한번 이현성을 흔들었다. “현성 씨.” 이현성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그의 입은 아무 말도 뱉어내지 못했고, 코는 숨을 쉬지 못했다. 그의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일어나!” 아직, 대답하지 못했는데. “일어나! 일어나라고!” 그리고 마왕들이 다시 움직였다. 정희원은 이현성의 커다란 몸을 들쳐 업고 달렸다. 이제껏 내본 적 없는, 가장 빠른 속도였다. 다리의 근력이 터지도록, 심장이 부서지도록 그녀는 달렸다. 포화가 이어졌고, 상흔이 늘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달아났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김독자라면, 김독자라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김독자는 신유승도 살려냈고, 유상아도 살려냈다. 그러니 이현성도 반드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갈라놓지 못한다. 정희원은 울음을 토해내며 달렸다. 고작 시간을 버티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 시간을 버텨야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리고. 얼마나 달렸을까. 흐려진 시야 속에서 정희원은 흙탕물 속으로 엎어졌다. 환생자들의 시취로 들끓는 대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현성의 심장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엘의 화신. 어디에 숨었느냐?] 다가오는 마왕들의 기척 속에서, 정희원은 숨을 죽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녀의 격은 형편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환생자들과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오지 않겠다면 그대로 죽이는 수밖에.] 마왕 아미가 웃으며 불의 창을 흔들었다. 주변에는 아직 환생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정희원이 살려야 할 사람들이었다. 살려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정희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요.’ 자신의 알량한 정의는 여기까지다. 폭염이 타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정희원은 자신이 눈을 떴을 때 보게 될 광경을 알 수 있었다. 불길 속에서 타오르고, 부서지고, 터져 나간 환생자들의 모습. 자신을 원망하는 그 얼굴들. 그녀를 손가락질하며 달아날, 그 표정들. 정희원은 기도했다. 부디, 한 사람이라도 더 멀리 달아나길. 조금이라도 더 먼 곳에서, 김독자가 올 때까지 버텨주기를. “여기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했다. “내가 우리엘의 화신 정희원이다!” 정희원은 눈을 떴다. 그곳에 있는 이는, 그녀도 아는 사람이었다. 방금 전, 그녀가 구했던 기사 카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카일을 업고 달리던 기사도 보였다. “아니, 내가 정희원이다!” “아니다! 나다! 나를 죽여라!” [······네놈들, 돌아버린 것이냐?] 환생자들이 달아나지 않고 있었다.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함께 따라왔던 이들. 국지전을 거치며 그녀가 구해냈던 이들이, 그녀의 곁에 서서 외치고 있었다. “내가 정희원이다!” “내가 이현성이다!” 일어난 환생자들이 그녀의 이름을, 그리고 이현성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내가 유중혁이다!”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마주보고 있었다. “내가 김독자다!” “내가 한수영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이들의 이름을, <김독자 컴퍼니>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정희원이다!” 그것이, 마치 자신들이 지키는 정의이기라도 한 양. 혹은, 그들을 구해줄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으아아아아!” 그녀의 이름을 외친 카일이 마왕을 향해 달려갔다. 반대쪽을 향해 달려가던 환생자들도 되돌아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면서, 누군가는 분노하고 절규하면서. [해당 시나리오에서 <김독자 컴퍼니>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당황한 마왕들이 자신의 격을 발출했다. [이런 미친 놈들이―] 눈앞에서 환생자들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마왕의 가벼운 한 방조차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연호는 그치지 않았다. 누군가는 정희원을, 누군가는 이현성을, 또 누군가는 김독자를 외치면서. 그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아비규환의 전장에서, 정희원은 몸을 떨었다. 어째서 저들이 죽어야 하는가. 그녀는 쓰러진 이현성을 내려다보았고, 어두운 <스타 스트림>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별들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하늘에 저토록 많은 별이 있음에도.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지 않는다. 정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리고 마왕들을 향해 달려갔다. “내가, 정희원이다!” [거기 있었느냐?] 날아온 발톱이 그녀의 등을 긁고 지나갔다.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요청합니다!] 단 한 번만, 누구라도 좋으니 단 한 번만 내게 힘을 준다면.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 중 대다수가 스킬 발동에 반대했습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어째서, 그토록 원하는 대상은 심판할 수 없는가.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뭐가 ‘절대선’이야.” 어째서 그것을 너희들 마음대로 정하고. 왜 나는, 그것에 따라야 하는가. 날아오는 바르바토스의 탄환. 닳아버린 감정들이 불쏘시개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의 모든 설화가 당신의 불행에 반응합니다.] 그녀의 모든 감정이, 오직 단 하나의 감정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신의 모든 설화가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그것은 복수였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설화를 바라봅니다.] 「저들을 심판하고 싶다.」 [당신에게 새로운 설화가 발아합니다!] 다음 순간, 정희원의 전신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어마어마한 빛의 폭발에 [멸성탄]의 궤도가 뒤틀렸고, 근처에 있던 마왕들이 동시에 물러섰다. 그리고 정희원은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를 들었다. [화신 ‘정희원’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특성 진화의 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한때 ‘웅크렸던 자’는, 악을 심판하기 위해 ‘멸악의 심판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선’에게 배신당한 심판자는, 무엇이 되는가. [전설급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영롱한 흰빛의 아우라가 그녀의 검에서 터져 나왔다. 전신에서 끓어 오르는 설화의 활력. 마왕을 보는 정희원의 눈동자에 혼돈의 고리가 떠올랐다. [당신은 ‘멸망의 심판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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