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397화 [특성 진화로 인해 스킬이 진화합니다.] [전용 스킬 ‘귀살’이 ‘신살(神殺)’로 진화합니다!]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의 발동 효과가 변경됩니다!] 정희원은 아우라로 덮인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은 눈부신 백색, 그리고 다른 한 손은 검은색으로 물들어가는 모습. [‘환생자들의 섬’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지금 그녀를 응원하는 이는 성좌들이 아니었다. [‘환생자들의 섬’의 구성원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지켜온 자들이었다. 마왕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정희원을 노려보았다. [······특성 진화?] [제법이군. 시나리오의 가호가 네게 깃들었구나.] 그러나 당황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봤자 정희원은 화신일 뿐. 우리엘의 힘도, <에덴>의 가호도 빌리지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정희원은 그런 마왕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정희원의 행동을 눈치챈 마왕 하겐티가 비웃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네 특성이 무엇으로 진화하든, 대천사들은 네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절대선의 개연성을 빌리는 스킬인 [심판의 시간]은, 해당 성좌들이 허가하지 않으면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심판의 시간’이 더 이상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시간’이 더 이상 절대 선 계통의 성운들에게 개연성을 빌리지 않습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의 변화에 크게 당황합니다.] “이제 그들 동의 따윈 구하지 않아.” 이젠 선도 악도 아닌 정희원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심판할 대상은 우리가 정해.” [심판자의 검]을 쥔 정희원의 몸에서 스파크가 몰아쳤다. 그 심상치 않은 기색에 마왕 하겐티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무슨······?]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이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를 받습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인원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됩니다.] [일부 인원은 현재 투표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투표 가능한 인원만이 투표에 참가합니다.] 그리고 표결이 시작되었다. [화신 ‘이지혜’가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신유승’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이길영’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화신 ‘정희원’이 심판에 찬성합니다.] [현재 투표 가능한 모든 인원이 당신의 심판에 찬성하였습니다.] 정희원은 쓰러진 이현성을 내려다보았다. 차갑게 식은 이현성의 몸. 이것은 그를 위한 심판이었다. 츠츠츠츠츳! [‘심판의 시간’이 발동합니다!] [충분한 인원이 참석하지 않아 스킬 사용 시간이 제한됩니다.] [4분간, 당신의 신체 능력이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초월합니다!] [4분간, 당신의 모든 설화가 시나리오의 개연성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정희원의 검이 움직였다. 마왕조차 볼 수 없는 빠르기로, 오직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 순간 정희원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였다. 겨우 이런 속도로, 너희는 별을 자칭하고 있었나. 믿을 수 없다는 듯 끔뻑이는 마왕 하겐티의 눈동자. 과도한 개연성의 소진으로 허공에 그려진 스파크가, 정희원의 검이 무언가를 심판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 으, 컥······?] 도려내진 그의 심장이 [심판자의 검]의 검극에서 펄떡거리고 있었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마왕의 피를 뒤집어쓴 채,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너흰 살아 돌아갈 수 없어.” 주어진 시간은 4분. 그 4분은 정희원에게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치솟은 핏줄기와 함께, 하겐티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마왕, ‘황금 뿔의 수소’가 사망했습니다.] [마왕, ‘황금 뿔의 수소’가 국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경악한 ‘불의 총통’ 아미가 중얼거렸다. [······하겐티?] 48위 마왕을 일격에 즉살시키는 힘. 어떤 마왕도, 고작 화신 하나가 그런 이적을 행사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미친 개연성이 가능할 리가······!] 충격에 빠진 마왕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쪽의 비극은 다른 한쪽에 희극이 된다. 마왕들의 폭력에 위축되어 있던 환생자들이 눈앞의 이적에 몸을 싣고 있었다. “가자!” “이길 수 있다! 우리도 가세하자!” “정희원 님을 보호해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환생자들을 보며 마왕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어느새 정희원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처럼 나타난 검의 잔영이, 아미의 창을 부쉈다. 빠가각! 지금껏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었던 불의 창날이 망가진 모습에 아미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부릅뜬 눈 그대로, 아미의 세상이 일격에 부서졌다. [마왕, ‘불의 총통’이 사망하였습니다.] [마왕, ‘불의 총통’이 국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당연한 결과였다. 48위의 하겐티마저 일격에 당한 마당에, 그보다 서열이 낮은 아미가 정희원을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환생자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고, 전장의 사기는 더욱 올라갔다. 웅웅. 정희원은 눈이 타버릴 것 같은 통증 속에서 내달렸다. 달려드는 ‘어둠 투사’들을 베고, 또 베며 오직 마왕의 목만을 노리며. [화신이여, 정말 어리석구나. 지금 너는 단순히 ‘성운’의 힘만을 빌리고 있는 것이 아니야!] 36번째 마계의 주인, ‘은빛 발톱의 올빼미’ 스토라스. 그는 전투력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마계에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마왕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정희원의 눈동자에 떠오른 혼돈의 고리를 포착하며 외쳤다. [그것은 혼돈의 힘이다. 선도 악도 아닌 태초에서 비롯된, 시나리오의 바깥에서 온 힘이란 말이다! 그 힘을 사용하면―] “닥쳐.” 허공을 향해 뛰어오른 정희원이 스토라스의 날갯죽지를 찢었다. 스토라스가 포효했고, 은빛 발톱이 정희원의 허벅지와 어깨를 찔러댔다. 자신의 몸을 도외시하는 그 격전에 부서진 살점이 허공을 날았고, 망가진 설화가 핏물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하지만 정희원은 아랑곳 않고 검을 휘둘렀다. 내장이 흐르든, 뺨이 뜯기든 상관하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저 눈앞의 마왕의 골격을 박살내고, 목줄기를 끊는 것만이 그녀가 생각하는 전부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오십여 합의 검을 휘둘렀을 때, 그녀의 손에는 죽은 올빼미의 머리가 쥐어져 있었다. [마왕, ‘은빛 발톱의 올빼미’가 사망하였습니다.] [마왕, ‘은빛 발톱의 올빼미’가 국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 “허억, 허억······.” 단신의 힘으로 세 명의 마왕을 격살시킨 전투력.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의 힘에 경악합니다!]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을 불길하게 여깁니다!] [절대 악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정희원’에게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늘을 양분한 선과 악의 별들. 그리고 그 균열의 너머로, 그녀를 보는 또 다른 시선들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존재들이었다. [이계의 신격들이 화신 ‘정희원’에게 눈독을 들입니다.] 무수한 별들의 시선을 받으며, 정희원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남은 마왕은 둘. [······미안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은 좋아하지 않아서, 이만.] 그 말을 한 것은 정희원이 각성한 그 순간부터 긴 주문을 영창하던 마왕이었다. [마왕, ‘유혹과 불모의 마왕’이 막대한 개연성을 지불하고 국지전에서 이탈합니다.] 뒤늦게 정희원이 검을 내던졌지만, ‘유혹과 불모의 마왕’ 제파르는 이미 자리에서 사라진 뒤였다. 으드득 이를 간 정희원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마왕은 하나. [16번째 마계의 주인이란 놈이 화신에게 꽁무니를 빼다니, 한심하군.] 이현성을 죽인 마왕. 8번째 마계의 주인,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 바르바토스. 비정상적인 정희원의 활약에도, 바르바토스는 달아나지 않았다. [마왕, ‘무지비한 역천의 사냥꾼’이 자신의 격을 개방합니다!] 바르바토스는 [심판의 시간]을 발동한 정희원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녀와 똑같은 속도로 판단하고, 그녀와 똑같은 속도로 공격을 가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하고 파괴적인 공방. 정희원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즐기는 듯,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파괴적으로 아름다운 설화군.] 공방이 이어질수록 정희원은 바르바토스의 강함을 깨달았다. 마왕은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어떻게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세월의 격차. 터진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정희원은 [지옥염화]의 불길로 상처를 지졌다. 빈틈을 놓치지 않은 바르바토스가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입으로 한바탕 피를 게워내며, 정희원은 간신히 버티고 섰다. [‘심판의 시간’의 지속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정희원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으로는, 무리인가.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가 강화됩니다!] 무언가가, 그런 정희원에게 힘을 보탰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살아온 역사들이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을 함께 사랑한 이들. 까가가가각! 정희원은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바르바토스의 총검술을 받아냈다. 총검술. 그녀가 아는 사내도, 총검술에 능숙했다. 「군대에서는 힘들수록 더 큰 소리를 지릅니다. 매일 아침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면, 어떻게든 그날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아아아아압!” 정희원은 이현성처럼 기합을 터트렸다. 바르바토스의 총검이 정희원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지만 정희원은 오히려 그 총검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쥐었다.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총검이 그녀의 옆구리를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정희원은 한발짝을 더 내딛었다. 「······저도 일단 지르고 볼 때가 있습니다. 항상 모든 걸 계산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김독자처럼 용기를 냈고. 「그렇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유중혁처럼, 검을 휘둘렀다. 스팟! [심판자의 검]이 바르바토스의 팔뚝을 베어냈다. [······아?] 붉게 물든 설화 파편이 튀어 오르는 것을 보며, 바르바토스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언뜻 한수영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알지?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놈이 승자야.」 그런 한수영처럼, 정희원이 말했다. “뼈를 원한다면 뼈를 주고, 심장을 원한다면 심장을 주겠어.” 자신이 무슨 공격을 받든 상관없다는 태도. 오직, 상대방을 함께 파멸시키기 위한 전투법. “하지만, 너도 네 설화의 절반은 걸어야 할 거야.” 한계까지 끌어낸 설화의 모든 국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황한 바르바토스가 물러나며 [멸성탄]의 포화를 퍼부었다. 하지만 정희원은 가볍게 그 탄환들을 피했다. 탄환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는 정희원을 따라오지 못했다. 서서히 밀려온 개연성의 후폭풍이 그녀의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정희원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세었다. 자신의 격을 뛰어넘는 힘을 쓴 대가였다. 그럼에도 정희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직 저 마왕을 죽이는 것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다. 섬광처럼 움직인 정희원의 검이, 바르바토스의 왼쪽 손목을 베어냈다. 총을 받칠 수 없게 된 바르바토스가 신음을 토했다. 그는 자신이 몰고 온 전함의 갑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죽여주마.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 주겠다.] 바르바토스의 전함이 새파란 빛을 뿜으며 장전을 시작했다. 그런 바르바토스를 올려다보며 정희원은 웃었다. 저 [설화 병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그녀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자체가, 이미 바르바토스의 패배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지, 바르바토스는 격노한 표정이었다. [사라져라.] 정희원은 검을 바닥에 꽂은 채 섰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배도 부수고 싶다. [‘심판의 시간’의 발동이 종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정희원에겐 이제 남은 시간이 없었다. 전함의 독수리상이 녹빛으로 물들며 포신이 불을 뿜는 것이 보였다. 이 국지전장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을 법한 위력. 정희원은 바닥에 늘어져 있는 이현성의 몸을 끌어안았다. 현성 씨. 나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이제는 정말 한 줌의 여한도 없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더라도. 나는, 제대로 이 순간을 살아냈다. 느려진 지각 속도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희원은 마력탄이 쏟아지는 전장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바라보았다. 자꾸만 시야가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일까.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정희원은 분통함에 울음을 터트렸다. 여한이, 없을 리가 있는가. “우리 성운 사람들은 왜 다 이 모양이지?” 누군가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분노합니다!] 익숙한 성좌의 간접 메시지에 놀란 정희원이 시야를 닦았다. 눈을 감지 않았기에, 그녀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 바르바토스의 함선보다도 더 큰 함선이 전장의 하늘을 장악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117번째 국지전에 참여하였습니다!] 미래 세대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북 형태의 등. 그 함선의 선수상(船首像)에, 그녀가 사랑하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때맞춰 바르바토스의 포화가 날아들었다. 다급해진 정희원이 손을 뻗으며 외쳤다. “피해!” 정희원의 외침은 포성에 묻혀 사라졌다. 전장 전체를 삼키는 파열음에 정희원은 주저앉았다. 부연 연기가 걷힌 자리에, 전함은 상처 하나 없이 버티고 있었다. [해당 시나리오에서 <김독자 컴퍼니>의 영향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매캐한 전장의 포연 속에서 이지혜와 아이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이지혜가 검을 치켜들었다. “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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