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395화
“할 수 있어요. 싸워보기 전엔 모르는 거니까.”
지금으로부터 3시간 전, 정희원은 그렇게 말했다.
“마왕이든 뭐든 덤벼 보라고 해요. 우리 이제 그렇게 약하지 않잖아요.”
그 말을 듣는 이들은 환생자들이었다.
이제껏 헤쳐온 국지전에서 ‘선’을 택했던 이들. 그리고 <김독자 컴퍼니>에 의해 무효화된 전장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
자신의 세계관을, 잃어버린 이들.
[117번째 국지전이 시작됩니다!]
[당신의 소속 진영은 ‘선’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오지 말 걸 그랬어······”
“······본래 세계로 돌아갈 순 없을까요?”
몇몇 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 중얼거리자, 파란은 순식간에 번졌다.
“저, 저런 거랑 어떻게 싸우라고!”
“아, 아아아아······.”
‘악’의 함선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분명, 강력한 기능을 장착한 설화 병기임에 틀림 없었다.
기에에에에엑―!
배를 받치고 밀려오는 파도는, 7급 악마종인 ‘어둠 투사’의 대군이었다. 수를 세기도 버거운 숫자. 족히 수만은 되어 보이는 대군.
도저히 ‘국지전’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으아아아아아―!”
공포에 젖은 환생자들의 눈동자를 보며, 정희원은 생각했다.
모두에게 용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
이들의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평생 자신의 세계관에 갇혀 살다가, 외부에서 나타난 침략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자들. 그런 피해자들에게는 용기를 강요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정희원은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긴 어떻게든 자신이 해결해보겠다고.
“다들 뒤쪽에 숨어 계십시오.”
그런 그녀의 심경을 대신한 사내가 있었다.
“제가 막겠습니다.”
이현성이었다.
그녀의 가장 오래된 동료이자,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역경을 제일 앞에서 맞아왔던 사내.
“혼자 막을 수 있겠어요?”
“물론 혼자선 무리죠.”
넉넉하게 웃는 이현성의 얼굴을 보자, 그래도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예전에는 손끝만 닿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이현성이었는데, 이제 정말 친해지긴 친해졌구나 싶었다.
“포지션을 하나씩 담당합시다. 모든 공격은 제가 맞겠습니다. 희원 씨는―”
“공격하면 되는 거죠? 카이제닉스에서 처럼.”
두 사람은 카이제닉스 제도에서도 지금처럼 함께 싸웠던 적이 있었다.
몰려오는 침공군에 맞서서 싸웠던 기억.
<김독자 컴퍼니>의 가장 단단한 방패와, 가장 날카로운 검.
단순하지만 가장 서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전략.
“갑시다.”
[설화, ‘검과 방패’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먼저 달려간 것은 이현성이었다.
“하아아아아압!”
기합이 클수록 힘이 세진다는 미신을 믿는 사람답게, 이현성은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파도를 맞았다.
[화신 이현성이 성흔 ‘강철화 Lv.10’을 발동합니다!]
이제 완숙한 경지에 오른 강철의 갑각이 그의 전신을 덮었다. 눈부신 백광을 띤 강철의 표피와 충돌한 ‘어둠 투사’들이 마치 볼링핀처럼 넘어지며 짓이겨졌다.
[화신 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 Lv.10’을 발동합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친 강철의 주먹이 바닥을 찍자, ‘어둠 투사’가 만들던 파랑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쇄도하던 배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이현성은 마지막 성흔까지 발동했다.
[화신 이현성이 성흔 ‘태산 밀기 Lv.10’을 발동합니다!]
처음에는 닫힌 지하철 문을 여는 게 고작이었던 성흔.
그 성흔이, 이제 전함 규모의 배를 받아내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츳―!
[강철화]를 발동한 양손이 새카맣게 물들며, 피부를 덮고 있던 강각(鋼殼) 일부가 벗겨졌다. 하지만 이현성은 더 커다란 기합으로 고통을 이겨냈다.
“하아아아아아압!”
범람하는 스파크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파고든 뒷발이 바닥에 푹 패인 이현성은 바닥에 박힌 작은 못처럼 보였다. 그 작은 못이, 전함의 움직임을 막아서고 있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는 기분 나쁜 파찰음. 그리고 굉음의 끝에서, 마침내 전함의 움직임이 멎었다.
“머, 멈췄다!”
“이현성 님이 전함을 멈췄어!”
믿을 수 없는 기적 앞에 환생자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승부는 지금부터였다. 방패가 자신의 일을 다했으니, 이젠 검이 움직일 때다.
이현성의 어깨를 밟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정희원은, 그대로 배의 갑판으로 뛰어올라 [심판자의 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아악!]
[귀살]과 [지옥염화]의 콤보. 처음부터 힘을 아끼지 않은 공격에 방심하고 있던 위인급 성좌 하나가 화신체 통째로 도살당했다.
푸른 귀화를 흩뿌리며 순백의 섬광을 터트리는 정희원의 모습은, 그 자체로 고결했다.
[일부 성좌들이 ‘검과 방패’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까가가가각!
하지만 그녀의 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막혔다.
거무튀튀한 흑빛으로 덮인 손. 음침한 웃음을 흘린 한 존재가, 그녀의 검을 잡고 정희원을 창공으로 내던져버렸다.
정희원은 허공을 밟으며 몸을 회전시켜 다시 갑판 위로 착지했다.
어느새, 전열을 갖춘 성좌들이 그곳에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아니, 성좌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성흔을 보아하니, 네가 바로 그 ‘대천사’의 화신이구나.]
[함정이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어리석구나. 제 발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오다니.]
시커먼 마기를 전신에 둘둘 감은 존재들. <스타 스트림>의 하늘에서 어둠을 차지한 존재들.
정희원은 자신의 눈앞에 선 다섯 명의 마왕들을 살폈다.
―이건 희원 씨가 싸워볼 만한 존재와,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되는 존재들의 명단입니다. 이들의 인상착의를 꼭 외워두세요.
정희원은 김독자가 설명해 준 내용들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제일 먼저 시선이 간 것은 불타는 창과 인간의 머리를 쥔 마왕이었다.
―얘는 싸워 볼만 해요. 지금의 희원 씨라면, [심판의 시간]만 발동한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58번째 마계의 주인, ‘불의 총통’ 아미.
―얘까지도······ 괜찮습니다. 근데 갑자기 뿔 세워서 달려들면 위험하니까 무조건 선빵 때리세요.
48번째 마계의 주인, ‘황금 뿔의 수소’ 하겐티.
―이놈부터는 위험해요. 컨디션이 괜찮을 때, 그리고 일대일로 싸울 수 있을 때만 붙으세요.
36번째 마계의 주인, ‘은색 발톱의 올빼미’ 스토라스.
흘러나오는 격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상대할 법하다.
문제는 그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두 존재였다.
먼저 붉은 갑옷을 입고, 다리를 절뚝이며 그녀를 보는 훤칠한 마왕.
―10위권대로 진입하면 솔직히 승산이 낮습니다. 우리엘이 반신강림이라도 해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16번째 마계의 주인, ‘유혹과 불모의 마왕’ 제파르.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무조건 피하셔야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섯 마왕의 제일 끝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존재.
저 마왕은, 지금의 그녀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8번째 마계의 주인, ‘무자비한 역천의 사냥꾼’ 바르바토스.
웨스턴 스타일의 모자에 장총. 흘러내린 금발을 가진 마왕이 그녀를 향해 웃었다.
[가장 맛있는 절망은 ‘불가능한 희망’이지.]
정희원은 투지를 불태우며 칼날을 굳게 쥐었다.
이미 마왕들과는 한 번 싸워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본실력을 내기 힘든 상태였지만······ 지금은 어떨까.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준비합니다!]
그녀의 특성은 ‘멸악의 심판자’.
과거 ‘성마대전’에서 싸웠던 발키리들의 수장, 대천사가 사용하던 힘.
아무리 상대가 강력하다고 해도, 그 존재가 ‘악’인 한 그녀는 지지 않는다.
그런데.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 중 대다수가 스킬 발동에 반대했습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바르바토스가 웃었다.
[어리석구나, 우리엘의 화신아. 아직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냐?]
김독자는 말했다. 이 ‘국지전’들은 함정이라고.
우리는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 이곳에 참전해야 한다고.
[천사들은 유독 ‘희생양’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이번에는 그게 너인 것 같구나.]
<에덴>의 목표는 ‘성마대전’에 승리하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도모하기 위해, <김독자 컴퍼니>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정희원이 ‘선’이든 ‘악’이든, 그쪽 입장에서는 그저 배제해야 할 존재일 뿐인 것이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른 천사들은 몰라도, 우리엘마저 나를 배신했다고?
[편히 보내주마.]
바르바토스의 장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정희원은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과 동시에, 배 바깥으로 몸을 내던졌다.
콰아아아아아아!
하늘을 향해 쏘아진 탄환이, 시공간을 찢어버리며 창공에 검은 구멍을 내었다.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저런 괴물을 상대로, 방금 자신은 싸우려 했던 것이다.
―절대로, 10위권의 마왕과 일대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도망치세요. 그리고 다른 일행을 기다리세요.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평소였다면 김독자의 그 말에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성 씨!”
선두 아래쪽에서 어둠 투사들을 쳐죽이던 이현성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오고 가는 것만으로도 이현성은 전장의 상황을 이해했다.
조롱하는 마왕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하! 현명한 선택이다.]
[전장은 넓지. 하지만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허공에서 마기의 폭풍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검과 방패는 달렸다.
맞설 수 없는 적과는 싸울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죽을 수도 없다.
“독자 씨와 유중혁 씨가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팁시다.”
정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일행이 모두 모인다면 이길 수 있다. 이보다 더한 전장도 헤쳐온 그들이다. <김독자 컴퍼니>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다친 환생자들을 챙기며, 그리고 달려드는 ‘어둠 투사’들을 뭉개며 계속해서 전열을 물렸다.
[배후성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엘의 가호까지 약해졌다.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지만, 정희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우리엘도 다른 국지전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우리엘이,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다.
마왕의 광포한 진언이 전장을 휩쓸었다.
[비켜라, 쓰레기들.]
달아날 타이밍을 놓친 환생자들이 곳곳에서 학살을 당했다.
용기 있게 달려드는 환생자들은 제일 먼저 목이 달아났고, 두려움에 뒷걸음치던 환생자들은 심장이 꿰뚫렸다.
하지만 마왕의 힘을 견디고 맞서 싸우는 이들도 있었다.
[호오, 소드마스터? 제법 싸우는 놈이구나.]
누군가가 하겐티의 황금 뿔을 받아내고 있었다.
검신에 흐르는 에테르 블레이드.
검을 쥔 노인은 정희원도 아는 이였다.
“······카일?”
카일 베르트.
그는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자신을 수행하던 수석 근위 기사였다.
「대장님, 당신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바깥 세계로 나가기엔 너무 늙었습니다만.」
「이 미력한 힘이, 그곳에서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카일은 잘 싸웠다. 그는 마왕 하겐티의 뿔을 몇 번이나 받아냈고, 심지어 수소의 팔뚝에 작은 생채기도 남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소드마스터의 검은 부러졌고, 무릎은 꺾였다.
애초에 늙은 소드마스터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목줄을 잡힌 카일의 몸이 장난감처럼 들어 올려졌다.
[등장인물 ‘에리히 스트라이커’가 동요합니다.]
정희원의 안에서, 에리히가 감정을 드러냈다.
저대로면 카일은 죽는다.
정희원의 사고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김독자 컴퍼니>의 이름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고 있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유중혁이었다.
「“어차피 환생자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유중혁은 카일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환생자들의 섬’은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기억을 잃고,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해도 어쨌든 영혼은 살아남으니까. 그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카일을 죽게 내버려뒀을 것이다.
이어서 떠오른 것은 김독자였다.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희원 씨가 죽게 될 겁니다.」
김독자는 올바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의 목숨을 걱정하기에 카일을 외면했을 것이다.
「뭘 고민해? 그놈을 이용해서 마왕을 쳐 죽여버려야지.」
한수영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녀는 애초에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엔 큰 관심이 없으니까.
최악의 상황을 최고의 효율로 끌어올리기 위해, 한수영은 곧바로 마왕의 목줄을 노렸을 것이다.
그리고, 죽어가는 카일의 입이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십시오.’
하지만 카일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희원 씨.”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희원과 이현성은 <김독자 컴퍼니>의 누구보다도 닮았다.
가진 성격도 융통성도 다르지만, 적어도 단 하나의 상황에 한해서, 그들은 늘 똑같은 결정을 내린다.
[전용 스킬, ‘지옥염화 Lv.10’을 발동합니다!]
망설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그렇게 구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