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392화
<명계>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121번 국지전에 진출한 <명계>의 병력은 해당 국지전에 참가한 선과 악의 전력을 쓸어버리고, 전장의 모든 선악을 무(無)로 돌려놓았다.
[진격하라!]
전장을 잠식하는 저승의 군대에, 121번 국지전에 참가했던 성좌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121번 국지전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해당 국지전은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해당 전장의 참가자들에게 전투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국지전은 ‘성마대전’의 분류에서 제외됩니다.]
정리된 전장을 일별한 나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다음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현재 117번 게이트가 활성화 중입니다.]
[현재 119번 게이트가 활성화 중입니다.]
[현재 123번 게이트가 활성화 중입니다.]
예정대로라면 117번과 119번에서 남은 일행들이 흩어져 난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117번은 정희원과 이현성이, 그리고 119번은 한수영과 유중혁이 있겠지.
그렇다면 아무래도 119번 보다는 117번부터 도와야······.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은 123번 게이트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123번?
거긴 아무도 없을 텐데?
나는 게이트 너머로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전장의 광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런 개······.”
나는 곧장 진격 명령을 내렸다.
“모든 병력은 123번 게이트로 향한다!”
내 명령과 동시에 3만에 달하는 명계의 군사가 게이트로 돌입했다.
새카만 먹구름을 탄 명계의 대군이, 게이트를 넘어 123번 국지전의 창공에 상륙하고 있었다.
“유중혁 이 새끼야!”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유중혁. 그리고 그런 유중혁을 업은 안나 크로프트의 모습.
왜 저 빌어먹을 녀석이 작전을 깨고 이곳에 참가한 것인지,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구원의 마왕!”
안나 크로프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녀와 유중혁을 쫓아오는 적들이 보였다.
분노한 <베다>와 <파피루스>의 성좌들. 대개는 위인급이었고, 종종 설화급도 있었다.
[당신의 소속 진영은 ‘악’입니다.]
유중혁과 안나 크로프트의 소속 진영은 ‘선’이었다.
말인즉, 지금 그들을 쫓고 있는 적들은 ‘악’이라는 이야기. 이것이 본래의 ‘성마대전’이었다면 그들은 내 아군이었을 것이다.
“모두 죽여라.”
하지만 이 전장에서 내 아군은 ‘선’도 ‘악’도 아니다.
[<명계>를 위하여!]
거대한 함성과 함께, 불타는 지옥마를 탄 세 명의 심판관이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자비와 정의의 아이아코스.
지혜와 입법의 미노스.
엄정과 강직의 라다만티스.
살아생전 왕의 길을 걸었고, 이제 저승의 심판관이 된 그들은 설화급 성좌의 위용을 뽐내며 다가서는 적들의 수급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어째서 <명계>가······!]
[크아아아악!]
설화를 토해내며 죽어가는 적들을 보며, 나는 유중혁과 안나 크로프트의 곁에 내려섰다.
유중혁의 전신은 깊은 화상으로 뒤덮여 있었다. 강력한 내구도를 가진 유중혁의 코트조차 고열을 견디지 못해 절반 이상 녹아내린 상태였고, 숨소리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사라진 녀석의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내부의 팽창력으로 인해 사라진 흔적.
······이 자식, ‘유성참’을 썼구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가히 놀라울 정도의 성장력이었다.
본래 ‘유성참’은 유중혁이 천 번 이상의 회귀를 거듭해야 간신히 익힐 수 있는 비기였다. 그런데 이 녀석은 고작 3회차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것이다.
“아직 숨은 붙어 있어요.”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절 구하려다가······.”
“유중혁이 당신을?”
나를 가만히 들여보던 안나 크로프트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씁쓸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당신의 계획에, 내 죽음은 없다고 말하더군요.”
아주 잠깐, 망연한 기분이 들었다.
유중혁 이 자식은 대체······.
나는 안나 크로프트에게서 유중혁을 넘겨받았다. 혈도를 짚어 출혈을 막고, 자리에 눕힌 뒤 상세를 살폈다.
유성참은 지금의 녀석이 감당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추진력을 견뎌낸 왼쪽 다리는 회생불능이었다. 사지 절단은 [엘라인 숲의 정기]를 사용해도 쉽게 치유할 수 없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품속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아이템은 거무튀튀한 오징어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오징어 김독자의 일곱 번째 다리 조각]
안나 크로프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이템을 보았다.
“그건 뭐죠?”
“얼마 전에 받은 겁니다.”
“받았다고요? ······그걸?”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사실 이 아이템은 ‘성마대전’이 열리기 전 ‘양산형 제작자’의 《김독자 컴퍼니 콜라보레이션》 이벤트에서 비매품으로 제공한 것이었다.
아마 신형 [페라르기니]를 구매한 이들에게 선착순으로 지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양산형 제작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지금도 선명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이번 시즌은 아주 대박이야. 오징어 김독자 다리는 1분 만에 전부 소진됐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다리를 얻기 위해 [페라르기니]를 구입한 성좌들이 있다고?
‘양산형 제작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왜, 누군지 알고 싶나?
―······아뇨. 그보다 제 다리 조각은 어떻게 입수하신 겁니까?
―엥? 진짜 자네 다리일 리가 없잖은가. 이건 [크라켄의 다리]일세. 여기 자네도 하나 기념으로 가지게.
안나 크로프트에게 그런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았던 나는, 그냥 아이템을 그녀에게 건네며 의문을 일축했다. 그러자 안나 크로프트의 눈이 더욱 미심쩍게 변했다.
“왜 [크라켄의 다리]에 당신 이름이 붙어 있는 거죠?”
“자세한 건 알 거 없고, [영약 제조사] 특성이나 사용하세요. 당신 피랑 이걸 섞어서 녀석에게 먹여요.”
[크라켄의 다리]에는 사지 절단에 준하는 중상을 치유하고 사용자의 기초 회복력을 극대화시키는 효능이 담겨 있다. 거기에 안나 크로프트의 피에도 영약의 효과가 있으니, 두 재료를 잘 섞는다면 그 어떤 중상이라도 빠른 치유가 가능할 것이었다.
하지만 안나 크로프트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제 피를 먹으면―”
“권속화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말한 것 같지만, 안나 크로프트의 피에는 피를 먹은 대상을 자신의 권속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지금의 유중혁은 당신보다 격이 높으니까.”
그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몸을 움찔했다.
나는 의식을 잃고 잠든 유중혁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유중혁은 안나 크로프트의 부하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사회생]의 사용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마지막까지 그 힘은 아껴둘 생각인 것 같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여기서 [기사회생]을 잘못 사용하면, 정말 필요할 때 녀석의 힘을 빌릴 수 없게 된다.
“······하여간 개복치 자식.”
투덜거리며 돌아서자, 밀물처럼 적들을 쓸어버리는 <명계>의 병사들이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전열의 파도가 주춤거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댐에 가로막힌 것처럼 무너지는 첨단. 그 첨단의 중심부에서 가공할 스파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분노의 일갈을 터트립니다!]
······뇌전의 신왕?
안나 크로프트가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그럴 리가······ 분명 반신체가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대강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유중혁이 잘라낸 ‘별’은 저 녀석인 모양이다.
“인드라는 화신체를 꽤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개연성을 감수하고 새로운 화신체를 불러들인 것이겠죠.”
인드라는 <베다>의 성좌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많은 화신체를 보유하고 있다.
<베다>의 삼신들이 인드라에게 “너는 몇 번째 인드라냐?”라고 물은 것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 중 하나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성유물 ‘금강저’를 소환합니다!]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명계>의 선두가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금강저. 가공할 마력을 담은 번개를 쏘는 인드라의 주력 무기.
나는 날아든 번개를 손으로 잡아챘다.
츠츠츠츠츠츳!
그리곤 잡은 번개를 도로 던져버렸다.
놀란 인드라의 표정이 보였다.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이르다.
[네가 구원의 마왕이군.]
“넌 인드라로군.”
[왜 <명계>가 그대를 돕는 것이지?]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는 없지 않나?”
인드라는 신기한 생물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악’이다. 시나리오에 걸맞은 행동을 해라. 다른 마왕들을 봐서 이번 결례는 넘어가 줄 터이니―]
“내 동료를 저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그렇지?”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 건방진 인간이 성좌에게 대항한 대가다. 저 인간의 복수라도 할 셈인가?]
복수라.
“저놈은 남이 대신 복수해 주는 걸 싫어해. 자신의 원한은 곧 죽어도 자신이 갚아야 하는 놈이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 너를 죽이려는 것은 유중혁 때문이 아니야.”
[혓바닥이 긴 마왕이로군.]
콰아아아아앙!
눈부신 전격의 빛살이 하늘을 덮으며 나에게 내리꽂혔다. 몇 개는 튕겨냈고, 몇 개는 받아냈다. 몇 개는 맞았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인드라는 많은 화신체를 갖고 있지만, 그만큼 힘의 분산도 크다.
더군다나 반신체인 상태로 유중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으니, 지금의 녀석은 평소 실력의 절반도 내기 힘들겠지.
그런데, 인드라가 웃고 있었다.
[어리석은 마왕이여, 후회할 것이다!]
[성운 <베다>가 ‘뇌전의 신왕’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성운이 내린 개연성.
뇌전의 신왕을 감싸는 힘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인드라의 화신체가 급격한 변이를 일으키더니, 이내 녀석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거대해진 몸 곳곳에서 인드라가 가진 천 개의 눈이 하나둘 뜨이고 있었다.
“저대로 둬선 안 돼요!”
[미래시]로 뭔가를 본 듯, 안나 크로프트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거, 아무래도 인드라와 <베다>가 제대로 결심을 한 모양이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성흔 ‘모든 것을 감시하는 눈’을 발동합니다!]
저 눈들이 모두 뜨이면, 인드라는 화신체를 통해 자신의 진체가 가진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뜬 눈의 개수는 약 절반 정도.
쿠구구구구구!
이대로 두면, 123번 시나리오에 참가한 모든 화신들이 범람한 전격에 쓸려나가고 말 것이다.
<베다>의 개연성이 충만하게 담긴 그 전격을 보며, 나는 오히려 즐거워졌다.
“나는 당신의 성운에 빚이 있어. 그것도 아주 큰 빚이.”
나는 성운 <베다>가 내게 저질렀던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독한 일을 당하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내 쥐며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들 때문에 나는 ‘마왕’이 되어야 했지.”
[암흑성]의 마지막 시나리오.
그곳에서 나는 73번째 마왕이 되었다.
“내 동료들에게, 나를 죽이도록 명령해야 했고, 그들에게 끔찍한 기억을 안겨 주어야만 했어.”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마왕이 되며 얻은 격이 내 심장을 중심으로 범람했다. 어깻죽지를 찢고 나온 검은 날개와, 머리를 뚫고 나온 뿔.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동료들의 검에 목숨을 잃고, 시나리오의 지평선으로 추방되었을 때.
나는 하늘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그 빌어먹을 하늘에서 너희들을 모두 떨어트려 줄 테니까.」
그 어떤 설화를 쌓아도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하늘의 별들.
너무나 아득하여 절망적이었던 거리.
이제 그 드높았던 별들의 자리가 보인다.
나는 진언을 발했다.
[그때는 정말 높아 보였는데······.]
웃으며, 인드라를 본다.
[너희들, 생각보다 낮은 곳에 걸려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