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391화 유중혁의 동공 속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해안가의 전장이 스쳐갔다. 「그날,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 부유한 밤과 부딪쳤다.」 언젠가 보았던 <기간토마키아>의 전장. 그곳에서 유중혁은 거대한 바다와 아득한 밤이 겨루는 것을 보았다. 포세이돈과 하데스. 눈앞에서 펼쳐지던 신화급 성좌의 격돌. 이 드넓은 <스타 스트림>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성좌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격의 향연. 그 사투를 보며 유중혁은 전율했고, 감동했고, 절망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그 아득한 적을 뛰어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했다. 이 일검은, 아직은 뛰어넘지 못하는 그 적을 모방하여 만든 기술이었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오의(奧義). 암해참(暗海斬). 마치 새카만 바다가 갈라지는 듯한 환영과 함께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해역의 창과 부딪치던 하데스의 낫을 흉내낸 검. 새파랗게 타오른 에테르 블레이드의 빛깔이 한순간 까맣게 물들었고, 폭발한 초월좌의 마력이 <명계>의 어둠을 대신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중혁의 [파천강기]가 아누비스의 몸통을 베었다. 그아아아아아아! 그 가공할 검격에 몸이 찢어진 아누비스가 비명을 지르며 낙하했다. 아무리 80번대 시나리오라고 해도, 설화급 성좌를 쓰러트릴 정도의 힘.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신위에 경악합니다!] 마침내 성좌를 넘어선 한 인간의 힘에, 성좌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덤벼라!] [쏴라! 해치워버려!] 누군가가 외쳤고, 그것을 신호로 폭격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마력이 깃든 화살비가 쏟아졌다. 유중혁은 정면에서 그것을 받아냈다. 푸슛! 푸슈슛! 옆구리와 어깨, 허벅지에 화살이 꽂히면서도, 그는 안나 크로프트의 앞에 서서 그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안나 크로프트가 물었다. “······왜죠?” “너는 죽을 거다.” “그럼 죽게 내버려 두시죠.”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그건, 김독자의 계획에 없으니까.” 안나 크로프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김독자. 안나 크로프트도 그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대체 뭐길래. 그 존재가 대체 무엇이길래, 이 자존심 강한 사내가 자신의 신념조차 굽히는 것인가. 마치 그녀의 의문에 대답하듯,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아주 먼 미래 회차의 기억을 엿본 적이 있다.” 아주 먼 미래. 안나 크로프트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더군.”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엿본 모양이군요. 3회차의 결말도 봤나요?” “그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미래의 네가 어떻게 되는진 보았지.” 흠칫 놀란 안나 크로프트가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미래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엿볼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미래뿐. 세계선을 넘어갈 정도의 먼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이 물었다. “알고 싶나?” “전혀요.” 그런 안나의 말을 무시하고,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지금의 네가 2회차의 기억을 계승했듯, 다음 회차의 너는 3회차의 기억을 계승하게 된다. 그렇게 끊임없이 전회차의 기억 일부를 [과거시]로 엿보며, 너는 조금씩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마치 지금의 내가 그러고 있듯이.” “뻔한 소리군요. 그 정도는 미래를 보지 않은 사람도 말할 수 있겠어요.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안나 크로프트가 피식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유중혁의 표정이 묘했다. “700회차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너도, 나도. 지난 회차를 기억한다는 저주 속에서, 우리는 약해지게 된다.” “······‘우리’는? 아니, 잠깐만요.” “다시 900회차, 그리고 1000회차를 넘긴 후, 어느 날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군.”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1863회차의 기록에서 읽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유중혁, 나는 다음 회차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송하지 않을 거예요.」 「더이상은 안 되겠어요. 나는 당신과 달라서, 이 모든 걸 짊어지고 계속해서 싸울 수는 없어요.」 「이제 당신은 혼자가 되겠죠.」 「그 모든 걸, 감당할 자신 있나요?」 정색한 안나 크로프트가 외쳤다. “그건 내가 아냐. 나는 무너지지 않아! 나는······!” “너는 변한다.” 마치 예언처럼 파고든 그 말이, 안나 크로프트를 흔들었다. 텅 빈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떨렸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하기도 전에, 유중혁이 먼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 안나 크로프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너를 계속 증오하고 싶다. 네가 내게 저질렀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너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파르르 경련하는 안나 크로프트를 뒤로한 채, 유중혁은 자신의 격을 방출하며 앞으로 나섰다. “너는 다음 회차로 가서는 안 된다.” 끝없는 화살비를 헤치며 나아간 평원에, 한 명의 성좌가 서 있었다. 이 전장에서 가장 강력한 성좌. [모두 물러나라, 저 인간은 내가 상대한다.] 뇌전의 신왕, 인드라. <베다>의 격을 상징하는 그 무력 앞에서, 수많은 성좌들이 전율했다. 쿠구구구구! [성좌, ‘목요일의 천둥’이 ‘뇌전의 신왕’을 경계합니다.] 같은 번개를 상징하는 성좌인 ‘목요일의 천둥’은 유난히 전의를 불태우는 듯했다. “유중혁, 멈춰! 아무리 당신이라도―” 유중혁은 안나 크로프트의 말을 무시하고 뇌전의 신왕을 향해 달려갔다. 인드라의 격은 유중혁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맞서 싸웠던 수르야조차 뛰어넘는 힘.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부족해.’ 인드라는 유중혁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싸워야 할 신화급 성좌들이나 이계의 신격들에 비하면 인드라의 존재는 그저 지나쳐야 할 건널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유중혁이 무엇보다 넘고 싶은 존재는······.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투지에 감탄합니다.] [5,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유중혁의 신형이 인드라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오만한······!] 뇌전의 신왕이 쏘아 보낸 전격이 대지를 갈랐다. 마치 해일이 갈라지듯 찢어지는 평원 사이로 잿빛의 전류가 튀었다. 튀어오른 전류가, 유중혁의 팔을 찢었다. 다리를 찢고, 배를 꿰뚫었다. 허공 속에서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유중혁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다시 살아갈 세월을 생각했다. 41회차. 362회차. 김독자가 보여주었던 시간들. 그리고 1863회차. ‘은밀한 모략가’를 통해 엿보았던 미래가 유중혁의 머릿속을 흘러갔다. 유중혁에게 이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경지들. 그 시간들을 넘어서기 위해 발버둥치고, 또 발버둥친 3회차의 자신. 콰콰콰콰콰!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고 살아갔을 모든 가능성을 빌려 쓰듯이 유중혁은 앞으로 나아갔다. 파천검도(破天劍道). 파천검성은 말했다. 하늘이 네 위에 존재하는 것을 허락지 말라고. 그 모든 것을 부수고, 파괴하고, 능멸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부순 하늘 위에, 또다른 무엇이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전오의(秘傳奧義). [성좌, ‘뇌전의 신왕’이 당신을 비웃습니다.] 하늘 바깥에서 화신들을 내려다보는 성좌들. 이 일검은, 그 성좌들을 베기 위해 만들어졌다. [흑천마도]에 흐르는 마력을 느끼며, 유중혁은 척준경의 검을 떠올렸다. 한 자루의 검으로 산을 베고, 바다를 벨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검. 한 자루의 검이 별을 베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투콰아앙! 허공에서 유중혁의 다리 한쪽이 터져 나갔다. 인드라가 쏜 뇌전 때문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뭉친 유중혁의 근육이 폭발하는 소리. 그 근섬유에 올올이 담긴 설화가 폭발하며 발생한, 추진력이 만든 굉음이었다. [멈춰라! 네놈······!] 경악한 인드라의 눈동자. 유중혁은 일대의 시간이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시간이 느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가 빨라진 것이었다. 「하나의 별을 파괴하기 위해선, 그 스스로가 별이 되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그가 성좌에게 도달하기 위한 해답. 하나의 생명체가 버틸 수 없는 속도가 유중혁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그것이 별이 아닌 자가 별이 되는 대가였다. 흑색의 초신성처럼 쏘아진 유중혁의 몸은 순식간에 뇌전의 격을 꿰뚫고, 그를 막는 성좌들을 모조리 깨부수며, 마침내 인드라의 심장에 도달했다. 유성참(流星斬). [흑천마도]의 끝에 확실한 감각이 있었다. 갈라지는 별의 목소리. 아득히 먼 우주에서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은 자신의 몸이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두 눈의 시야가 흐려져 그는 베어진 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사지의 근육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전신에는 단 한 방울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흐릿한 오감을 통해 누군가가 자신을 받아내는 것만은 느꼈다. 그가 제일 증오하는 이가, 그를 안고 달리고 있었다. “유중혁, 당신은 진짜 미쳤어.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꺽꺽거리는 피를 토해내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인드라는?” “죽었을 거예요. 반신체 그대로 폭발했으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겠죠.” 그 말을 하는 안나 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묘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말투에서 전해지는 감정만으로, 유중혁은 자신이 한 일을 이해했다. 별을 부쉈다. 고작 작은 인간이, <로카팔라>의 가장 빛나는 여덟별 중 하나를 파괴한 것이다. [성운 <베다>의 모든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에게 진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늘에 별은 많았다. “방금 내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당신은 거기서 죽었어요.” 그 말이 사실일 것을 안다. 안나 크로프트는 [미래시]로 유중혁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기껏 구했어도 그 시간을 늘린 것에 불과하지만······.” 뚫린 옆구리에서 하염없이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다리 한쪽은 잃어버렸고, 검을 쥘 힘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안나 크로프트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유중혁은 그 행동의 의미를 알았다. 이제, 이 전장 어디에도 그들이 달아날 곳은 없다.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유중혁, 나는 당신과 700회차까지 살아갈 생각은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4회차까진 같이 살아야 할 것 같네요.” “그럴 일은 없다. 나는, 여기서 죽지 않는다.” 유중혁에게는 안나 크로프트와 같은 [미래시]가 없다. 그렇기에, 그는 이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꺼져가는 목소리였지만, 결코 죽음을 결심한 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먼 허공의 건너편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인드라의 뇌전이 아니었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게이트의 너머로 뭔가가 넘어오는 소리. 유중혁은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해서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은 안나 크로프트였다. 새카만 어둠으로 휩싸인 군대. 오랜 신화 속에 묻혀 있던 하나의 세계가 이곳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유중혁, 이 새끼야! 그 군대의 선두에서 소리치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이 말했다. “이번 회차에는, 배신하지 않는 동료가 있으니까.” [성운, <명계>가 ‘성마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