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390화 둥. 둥. 둥. 게이트 너머로 들려오는 전장의 북소리. 119번 국지전으로 향하는 게이트 앞에 서서, 한수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준비됐지?” 이번 전장은 유중혁과 함께였다. 성격은 좀 안 맞지만, 같은 편일 때는 이만큼 든든한 아군이 없다. 문제는, 그런 유중혁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는 것이다. “유중혁?” 유중혁은 119번 게이트로 돌입하는 대신 새로 열린 123번 게이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유중혁을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유중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강한 척력이 한수영의 등을 밀쳤다. [119번 게이트에 진입합니다.] “······어?” 마지막으로 그녀가 본 것은, 유중혁의 메마른 표정이었다. “거긴 너 혼자 가라. 나는 가야 할 전장이 있다.” “야! 그걸 왜 네 멋대로―” 갑작스런 선언에 한수영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주변의 공간이 휘몰아치며 새로운 전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런 씨······.” [화신 ‘한수영’이 119번 국지전에 진입했습니다.] [화신 ‘한수영’의 소속 진영은 ‘악’입니다.] 이미 게이트를 통과해버려서 돌아갈 수도 없는 판.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전장을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허허벌판처럼 탁 트인 ‘악’의 진영에 남겨진 것은 한수영 혼자뿐이었다. 반면, 반대편 진영에서는 무시무시한 성좌들의 시선들이 연달아 쏟아지고 있었다. [성좌, ‘방주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신과 마주하는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수영은 그 시선의 주인들을 확인하며 침음했다. ‘방주의 주인’ 노아는 그렇다 쳐도,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대천사 라파엘에 <수호의 나무>의 여신인 바카리네. ‘신과 마주하는 자’ 대천사 카마엘과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대천사 우리엘까지······. 거기다 그들 뒤로 빼곡하게 늘어선 발키리들의 향연.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함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전력 격차가 나는 전장이라니. 아니, 애초에 이건 전장조차 아니지 않은가. “······김독자가 내 장례식은 챙겨주려나 모르겠네.” [작은 악이여.] 새벽별의 여신의 진언을 듣는 순간, 한수영은 진짜로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수의 선이 당신을 심판하길 원합니다!] 입술을 꾹 깨문 한수영이 왼손의 붕대를 푸는 순간, 그녀의 곁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악의 진영에 참가합니다!] ······이런 불리한 전장에 참가했다고? 누가? [원래는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저도 빚을 갚아야 할 상대가 있어서 말이죠.] 특유의 재수 없는 목소리. 한수영은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아스모데우스?” [오랜만이군요. 흑염룡의 화신.] 순간, 언젠가 김독자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라파엘이랑 아스모데우스는 서로 은원 관계야. 혹시 전장에서 둘을 마주친다면, 그걸 잘 이용해보도록 해. 자신의 클로를 꺼내든 아스모데우스는, 딱히 한수영이 자극하지 않아도 이미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라파엘. 드디어 지난 전쟁의 빚을 갚을 때가 되었습니다!] 흑빛 잔영을 남기며 달려가는 아스모데우스와 함께, 두 개의 강대한 마력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믿을 수 없는 놈인 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같은 편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좀 나았다. 콰아아아아! 한수영은 폭발을 피해 위쪽으로 솟구쳤다. 위쪽에서 내려다본 전장의 풍경은 말 그대로 까마득했다. 아스모데우스가 라파엘을 상대한다고 해도, 남은 성좌들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다. ‘빌어먹을 김독자! 빌어먹을 유중혁!’ 저 정도의 병력을 상대하려면, 결국 아껴두었던 카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나 흑염의 주인 한수영이 오래된 봉인의 용을 깨우노니! 어둠보다 더 어두운 성좌여, 흐르는 밤보다 더 깊은 심연이여―” 죽어도 외우기 싫었던 주문이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입에서 저절로 술술 외워졌다. 그녀의 주문에 반응한 왼팔이 꿈틀거리며, 어디선가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지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반신강림(半神降臨)을 준비합니다.] * 한편, 홀로 123번 게이트로 진입한 유중혁은 흩날리는 수풀로 덮인 전장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틀림없다. 그 녀석의 기운이다.’ 김독자의 부탁마저 거절한 유중혁이 무리하며 123번 게이트로 진입한 이유. 그 이유가 바로,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유중혁, 나의 동료가 되어주세요. 오래전 처음으로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을 유중혁은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선이 고운 코와 가지런히 정돈된 금발. 세상 모든 것을 조롱하는 듯 불길한 적색으로 소용돌이치는 눈. “안나 크로프트.” 그녀는, 유중혁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왔군요, 유중혁.” [화신 ‘유중혁’이 123번 국지전에 진입했습니다.] [화신 ‘유중혁’의 소속 진영은 ‘선’입니다.] 유중혁이 123번 전장에 참가한 것은, 이 전장에 ‘안나 크로프트’가 참전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알려준 성좌는······.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기묘한 웃음을 머금습니다.] 유중혁은 이를 으드득 깨문 채 말했다. “2회차의 은원을 갚을 때가 되었다.” 고요히 뽑아 쥔 [흑천마도]가 새카만 울음을 토했다. 오래도록 기다려온 복수의 순간. 평온히 선 안나 크로프트를 향해 유중혁이 검을 겨누었다. “무기를 꺼내라.” “나는 당신과 싸울 마음이 없어요.” “그럼 이대로 죽어라.” 성큼 다가간 위협에도 안나 크로프트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2회차의 복수를 하러 온 건가요?” “······.” “당신의 복수는 무의미해요. 2회차의 ‘안나 크로프트’는 제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어제의 너는 네가 아닌가?” “무슨 말이죠?” “너는 2회차의 ‘안나 크로프트’의 기억과 의지를 계승했다. 너는 그 녀석과 같은 이상, 같은 목적을 가졌다. 너는 틀림없는 ‘안나 크로프트’다.” “······하나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 존재가 가진 설화다. 당신의 사상은 2회차나 지금이나 여전하군요.” 다가오는 유중혁의 검을 보면서도, 안나 크로프트는 여전히 무방비한 상태였다. 반쯤 체념한 그 눈빛을 보며 유중혁이 표정을 굳혔다. “‘차라투스트라’들은 어디에 있지?” “그들은 이곳에 없어요.” “웃기지 마라. 네가 혼자 이곳에 왔을 리 없다.” “당신이 아는 ‘안나 크로프트’라면 그렇겠죠.” 성큼 다가온 유중혁의 격에 안나 크로프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훤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 곳곳은 상처로 가득했다. 제일 눈에 띄었던 것은 [대악마의 눈동자]를 둘러싼 상흔.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도려내려 했던 것 같은 흔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많은 일이 있었죠.” 유중혁의 손을 뿌리치며, 안나 크로프트가 쏘아붙였다. “당신이 아는 그 잘난 안나 크로프트는, 이미 오래전에 몰락했다는 뜻이에요.” 그 말과 동시에, 전장의 반대쪽에서 뭔가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악’의 진영을 택한 성좌들이, 자신의 격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전장을 질주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안나 크로프트를 인질로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성운, <아스가르드>의 일부 성좌들이 해당 국지전에 참전했습니다!] [성운, <베다>의 일부 성좌들이 해당 국지전에 참전했습니다!] [성운, <파피루스>의 일부 성좌들이 해당 국지전에 참전했습니다!] 자신의 목을 겨눈 검을 보며, 안나 크로프트가 웃고 있었다. “멍청한 짓 마시죠 유중혁. 우린 같은 편이니까.” [화신 ‘안나 크로프트’의 소속 진영은 ‘선’입니다.] “······아스가르드는 네 배후 성운이 아니었나?” “당신의 원한은 이해하지만, 복수는 다음으로 미뤄주겠어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서로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는 누구보다 과거를 잘 이해하는 회귀자였고, 다른 하나는 줄곧 그런 회귀자와 맞서 싸워온 예언자였으니까. 검을 거둔 유중혁이 말했다. “네게 걸맞은 최후로군, 예언자.” “그 최후에 당신도 함께하게 되겠군요.” 쿠구구구구······.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온 <아스가르드>의 대군이 멈춰섰다. [성좌, ‘공정함과 친절함의 신’이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성좌, ‘무스펠하임의 불꽃’이 전장의 모든 것을 태우고 싶어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마치 최후의 배려라도 되는 듯 진군을 멈춘 병력의 선두에는 셀레나 킴과 이리스가 있었다. 유중혁은 그들의 얼굴에 적힌 여러 감정들을 읽어냈다. “최후의 배려인가 보군.” 하지만 그들이 멈추었다 해서, 다른 모든 성좌들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피해요.” 안나 크로프트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사라졌다. 전장을 뒤덮는 굉음. 가공할 크기의 크레이터가 그들이 있었던 자리를 잠식했다. 콰르르르릉! 허공을 잠식하는 전격의 기류. 음습한 성좌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성좌, ‘검은 늑대 사신’이 ‘악’의 진영을 택합니다.] [성좌, ‘뇌전의 신왕’이 ‘악’의 진영을 택합니다.] 성좌들의 수식언을 확인한 안나 크로프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검은 늑대 사신’은 <파피루스>의 강력한 성좌인 ‘아누비스’였다. 그리고 ‘뇌전의 신왕’은······. “맙소사, ‘인드라’가······.” <올림포스>에 12신좌가 있다면, 성운 <베다>에는 여덟 명의 로카팔라들이 있다. 그리고 그 여덟 로카팔라의 왕으로 군림하는 단 하나의 성좌가 있으니. [성좌, ‘뇌전의 신왕’이 전격의 비를 소환합니다.] 그가 바로 ‘뇌전의 신왕(神王)’ 인드라였다. [다수의 성좌들이 ‘뇌전의 신왕’의 개입에 불공평을 호소합니다!] 비난이 있을 법도 했다. 인드라는 한낱 국지전에 나타날 법한 수준의 성좌가 아니었으니까. 인드라는 <베다>에서 ‘3대 주신’을 제외하고는 제일 강력하다해도 무방한 존재였다. [성좌, ‘뇌전의 신왕’은 현재 ‘반신강림’ 상태입니다.] 게다가 화신체도 아닌 반신체의 강림.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레의 비를 피해내며, 안나 크로프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그녀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리고 유중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지금 저 성좌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유중혁이 물었다. “왜 날 배신했었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땐가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안나 크로프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게 최선이었어요. 그렇게 해야, 내가 생각하는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 결말에 도달했나?” 안나 크로프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멸살법’에도, 그리고 1863회차의 기록에도, 2회차의 안나 크로프트가 몇 번째 시나리오까지 갔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그녀의 결과를 아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분한 듯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미 다 알면서 뭘 물어보는 거죠?” ‘검은 늑대 사신’이 움직였다. 새카만 자칼의 마스크를 쓰고 검은 창을 휘두르는 설화급 성좌, 아누비스. 아누비스의 창은 정확히 뇌전의 비를 꿰뚫고 안나 크로프트의 심장을 노렸다. 그리고. 쿠드드드득! “그 녀석을 죽이는 것은 나다.” 그 창을 맨손으로 쥔 유중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좌, ‘검은 늑대 사신’이 경악합니다.] 유중혁의 몸에서 강력한 격이 발출되었다. 초월좌의 격. 황금빛으로 덮인 유중혁의 몸에서 마력이 들끓자, 아누비스의 창이 경련이라도 하는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 힘에 반발하듯, 아누비스가 선언했다. [죽음에 저항하는 자여, 나는 사신 아누비스다. 이곳에서 너의 삶을 거두겠다.] “사신?” 유중혁이 말했다. “너는 사신이 아니야.” 그와 동시에 유중혁의 오른팔에서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왔다. 아누비스가 비명을 흘리며 물러서는 순간, 그의 손에 깃든 [흑천마도]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진짜 사신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유중혁이 지금껏 숨겨온 기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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