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384화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연한 걸 뭘 두 번 말하느냐 중얼거립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꼰대에게 빨리 원펀치를 갈기라고 종용합니다.] 심연의 흑염룡의 말에 풍백이 어이없다는 듯 하늘을 쏘아보았다. 뭐라고 말을 붙이려던 그가 흠칫 몸을 떤 것은, 이어진 간접 메시지 때문이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구원의 마왕’의 말이 옳다 여깁니다.] 풍백의 고개가 척준경 쪽을 향해 홱 돌아갔다. [준경, 너마저······!] 척준경은 민망한 듯 그의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의외였다. 아무리 몰락하고 있다고 해도, <홍익>은 여전히 한반도의 주력 성운이다. 그런 상황에서, 척준경이 <홍익>의 뜻에 항거하여 내 편을 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와 <홍익>의 충돌에 관심을 가집니다!] 척준경의 선언 때문인지 성좌들이 나를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중립 지대에 불어오는 새로운 바람에 나를 경계하는 이들도 보였다. 나는 풍백을 보았다. “계속하실 겁니까?” 풍백의 눈꺼풀이 격렬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솔직히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아까는 <홍익>을 비난하듯 말했지만, 사실 풍백이라고 한반도 시나리오를 완전히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귀환전쟁’이 벌어졌을 때 내 어머니에게 손을 빌려준 성좌가 바로 풍백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게도 그 일로 내 어머니의 수명을 죄다 앗아가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나 열 받는 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바람은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던 풍백은 섭선을 탁 접으며 먼지처럼 사라졌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기개에 감탄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호사가들이 해당 사건을 기록합니다.] 유중혁, 한수영, 정희원, 이현성.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누구의 표정에도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남들이 우리 성운을 어떻게 보고 무어라 판단하는지는 상관없다. 그저,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이야기를 향해 나아갈 뿐. [후인 다운 선택이로군.] 우리를 지켜보던 척준경이 말했다. [후인의 그런 면모에 어떤 성좌들은 그대를 좋아하고 따르겠지. 실제로 한반도의 많은 성좌들은 이제 <홍익>보다 후인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그대를 적대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새삼 주변의 시선들이 새롭게 의식되었다. 어떤 성좌들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고, 어떤 성좌들은 우리를 부러워하듯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성좌들은, 결국 너희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우리도, 한때는 너와 같았다.」 성좌들이 겪어온 설화들이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졌다. [오래된 거대 설화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설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설화는 곧 시나리오를 극복해 낸 흔적들이다. 한때는 누군가의 유희거리였던 시간들. 이곳까지 온 모든 설화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꺾여왔다. <스타 스트림>의 현실과 타협하고, 성좌와 도깨비들의 요구를 승낙하며 자신을 연명해온 시간. 그리하여 마침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을 대표하듯, 척준경이 말했다. [<스타 스트림>은 꺾이지 않는 이야기를 싫어하지. 그대들처럼 순수한 이야기는 더욱.] 꺾이지 않는 순수······.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났다. 세상이 우릴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지금껏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을 부정하는 말이니까. “우린 이미 수십 번도 더 꺾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처음부터 두 발로 서 있지 않았다.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성좌들의 농락과 근본 모를 증오를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다른 무수한 설화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런 우리에게 ‘순수하다’라는 말은, 차라리 모욕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침착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거친 울음을 삼킵니다.] 마치 내 말에 동조하듯 두 개의 거대 설화가 반응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겁니다.” [발아 중인 세 번째 ‘거대 설화’가 태동합니다.] 거기다 곧 깨어날 세 번째 거대 설화까지. 우리를 보던 척준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이야기를 지켜보겠다.] 그 말과 함께 척준경이 돌아섰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한반도의 성좌들도 우리 쪽을 흘끔거리며 사라졌다. 척준경은 이제 위인급을 넘어서 설화급에 도달했다. 게다가 성좌로서의 연식이 나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타고난 싸움꾼인 만큼 같은 편으로 들일 수만 있다면 최고의 아군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같은 편에서 싸울 수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내가 너무 오래 폼을 잡고 있었는지, 곁에서 나를 보던 한수영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누가 보면 니가 주인공인줄 알겠어. 머쓱한 마음에 유중혁 쪽을 바라보았더니, 유중혁은 내가 아니라 지평선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작됐다.” [시나리오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해당 지역의 인근에서 ‘성마대전’의 국지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에 곳곳에 막사를 치고 있던 중립 성좌 및 화신들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분쟁 지역에 개입할 시 진영 선택지가 발생합니다!] 멀리서, 강대한 두 개의 세력이 진격하는 것이 보였다. 눈부신 갑주를 입은 새하얀 날개의 천사들이, 화신들과 환생자들을 이끌고 벌판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탁기와 마기로 물든 마왕들이 자신의 권속들을 이끌고 진격해오고 있었다. [갱신된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메인 시나리오 # 80 ―‘성마대전’> 분류 : 메인 난이도 : 측정 불가 클리어 조건 : 절대선 또는 절대악의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하여 성마대전에 참가하십시오. 소속 진영이 시나리오에서 승리를 누적할수록 진영별 ‘선악 수치’가 증가하며, 특정 진영의 수치가 100을 넘게 되면 전쟁의 승패가 결정됩니다. 제한시간 : 해당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은 ‘혼돈 수치’의 영향을 받습니다. 보상 : ‘성마대전’과 관계된 거대 설화, ??? 실패시 : 사망 + [성마대전 진행 현황] 절대선 수치 : 56 절대악 수치 : 56 혼돈 수치 : 51 [성마대전의 진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혼돈 수치가 증가합니다.] + [해당 전장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영을 선택해야 합니다.] [진영 선택 시기가 빨라질수록 시나리오 보상이 커집니다.] 우리는 시나리오 내용을 읽으며 잠시 침묵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수영이었다. “김독자, 어쩔까? 또 늘 하던 대로?” [성좌, ‘지옥의 필경사’가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음을······.] “저 양반은 저거 자기가 한 말도 아니면서 종알종알 시끄럽네 진짜.” [성좌, ‘지옥의 필경사’가 흠칫 놀라 입을 다뭅니다.] ‘지옥의 필경사’는 『신곡』의 저자인 단테였다. 그리고 단테의 저 유명한 말은, 사실 후대의 정치가에 의해 각색된 것이었다. 어쨌든 본인의 유명세를 키워준 대사니 단테는 그것을 자신의 설화로 받아들였겠지.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비되어 있다.」 듣기론 멋진 말이다. 도덕적 선택조차 누군가의 유희가 되는 세계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우리도 선택해야 돼. 언제까지 요령 좋게 빠져나가긴 힘들어.” 어쨌거나 단테의 말과는 무관하게, 우리도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성마대전’은, 선악 중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으면 애초에 참가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메시지를 보던 유중혁이 말했다. “1863회차의 ‘성마대전’은 악의 승리로 끝났다. 한수영이 악의 편을 들었지.” “왜 또 나야? 그리고 여긴 1863회차 아니거든?” 한수영의 말이 맞다. 이곳은 1863회차가 아니다. 이곳은 3회차, <김독자 컴퍼니>의 세계다. “가자.” 멀리서 두 개의 선악이 부딪치는 격전지가 보인다. 이 드넓은 ‘성마대전’의 전장 중 하나가, 지금 막 개막한 것이다. [‘성마대전’의 113번째 국지전이 발생합니다!] [해당 국지전의 참가자 명단이 공개됩니다.] 그리고 그 성마대전의 최전선에, 내가 잘 아는 성좌 하나가 서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해당 시나리오에 참가 중입니다.] * “살려, 살려 주세요.” 푸우욱! “대천사님, 제발······!”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 양자택일의 선택지에서 악을 선택한 화신들이 대천사들의 검에 목이 달아나고 있었다. 이것이 설화의 전쟁이다. 어느 한쪽의 설화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다른 한쪽에겐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 쓰러진 화신들을 뒤로 하고, 우리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장을 응시했다. 대천사 우리엘은 한때 그들을 동정했다. 거대 서사에 휩쓸려 소모되는 화신들을 안타까워했고, 그들이 겪는 불행에 분노했다. 꽤 오랫동안 그랬다. 그 일만이 그녀가 가진 삶의 전부였을 때도 있었다. ‘······밀린 성류방송 봐야 되는데.’ 밀려오는 마왕군의 인파를 보며, 우리엘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선을 전파하기 위해 태어났다 해서, 그것만을 행하며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성좌를 갉아먹는 것은 사실 육체적 위협이 아니라 정신의 마모다. 억겁의 세월 동안 지속된 감정 노동은 그녀에게 세상 자체에 대한 뿌리 깊은 환멸과 깊은 광기를 불러왔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영혼이 불완전하게 흔들립니다.] 강한 성좌든 약한 성좌든, 시나리오 속에서 안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시나리오란 애초에 그런 시스템이니까. 고오오오오! 자신들이 시나리오 속에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그리고 다시 하루를 더 살아가기 위해, 성좌들은 또 다른 설화들을 소비한다. 시나리오를 관음하고, 누군가의 상황에 분노하거나, 비난을 퍼붓거나, 동경하거나 감동한다. 그것은 대천사인 우리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 꺼져! 너희 때문에 본방 놓쳤다고!] 우리엘의 검신에서 뻗어 나온 [지옥염화]에 마왕의 권속들이 잿더미가 되어 불타올랐다. 급한 마음에 내갈긴 힘은 제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허겁지겁 진체의 절반만을 소환해 참전한 영향도 컸다. [국지전에 참가 중인 마왕들이 대천사의 힘에 경악합니다!] 물론 반신이라 해도 무려 대천사 우리엘의 반신이다. 그러니, 어지간한 마왕들은 그녀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자신의 격을 발산합니다!] [마왕, ‘용과 악취의 대공작’이 거대 설화를 개방합니다!] [마왕, ‘음속의 마왕’이 핏빛 울음을 토합니다!] [마왕, ‘예제공’이 흥분과 광기에 휩싸입니다!] 문제는, 이번에 참전한 마왕들 또한 어지간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엘은 자신의 [지옥염화]를 헤치고 다가오는 마왕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미친 대천사가 코앞에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 마왕 부에르가 너희와 함께한다!] 본래 이번 국지전에 참전 예정인 마왕들은 저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왕군 측에서 전력 편성을 변경했고, 졸지에 우리엘은 혼자서 그 마왕들을 감당해야 할 상황이었다. [■■■들아! 꺼져!] 마기를 품은 화살들이 빼곡하게 전장을 덮었고, 우리엘은 [지옥염화]를 배리어처럼 발동해 그것들을 막았다. 허겁지겁 후퇴하는 하급 천사들을 보살피는 동안, 어느새 우리엘의 몸 곳곳에도 화살이 박혀 있었다. [우습군. 천사들이여, 달아나는 건가?]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의 명성이 아깝구나.] [닥쳐! 내가 진체 전부만 강림할 수 있었더라도 니들은 죄다 죽었어.] 쏟아지는 공격에도 우리엘은 신음하나 흘리지 않은 채 씩씩거렸다. [비겁하게 다구리치지 말고 일대일로 붙어 ■■들아! ■발! 내가 일대일이었으면 아가레스든 가미긴이든 마르바스든 다 조질 수 있거든?] 흥분한 우리엘의 외침에 마왕들은 조소했다. 우리엘이 강한 것은 알고 있다. 알고 있었기에, 대천사 하나를 잡겠다고 무려 네 명의 마왕이 몰려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마왕들은 치밀했다. [이것이 전쟁이다, 천사여.] 피칠갑을 한 우리엘의 [지옥염화]가 마왕들과 격돌했다. 대천사 우리엘은 강했다. 고작 반신의 힘만으로 ‘별과 논리학의 군주’의 팔을 잘라냈고, ‘용과 악취의 대공작’이 아끼던 애완용을 으깨버렸다. 심지어 ‘음속의 마왕’은 두 다리를 잃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스산한 느낌과 함께 뒤를 돌아본 순간, 투명한 예제공의 단도가 우리엘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오늘은 대천사의 설화를 먹겠구나.] 아차 싶었던 우리엘이 뒤늦게 검을 휘둘렀지만, 상처를 입어 둔해진 화신체로는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슈슉! 새하얗게 빛나는 검신이, 예제공의 가슴을 뒤쪽에서 꿰뚫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검은 피. 검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예제공의 등을 찔렀다. 설화 파편이 그로테스크하게 튀어나오고, 망가진 화신체의 숨통이 철저하게 끊어질 때까지. 그리고 이어서 날아든 한줄기 백광검이 예제공의 목을 날려버렸다. [누군가가 마왕 ‘예제공’을 사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엘은, 쓰러진 예제공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을 보았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이 그토록 가까이 있었다. “내 성좌가 그렇게 맞고 있는 꼴은 못 봐.”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녀의 화신. 그리고. [마왕 ‘구원의 마왕’이 ‘마왕승격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마계 등급이 조정됩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50번째 마계의 마왕’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봤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우리엘.”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소속 진영을 결정하였습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