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385화 누군가의 표정이 날것 그대로 느껴질 때가 있다. 저게 바로 저 사람이 갖고 있던 진짜 표정이구나, 하고 느껴지는 순간. [김독자―!] 지금의 우리엘의 모습이, 바로 내겐 그랬다. 힘껏 팔을 뻗은 우리엘은 정희원과 나를 부둥켜안은 채 한참이나 뺨을 비벼댔다. 결국 정희원이 핀잔을 줬다. “우리엘, 숨 막혀요.” [미, 미안.] 당황하며 물러서면서도 반짝이는 눈동자. 이런 푼수 대천사가 어떻게 ‘악마 같다’는 수식언을 받게 되었는지, 가끔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응? ‘카이제닉스 제도’ 시나리오는 잘 끝났어? 나도 간신히 몇몇 부분 보긴 했는데 볼 시간이 많지가 않아서······ 진짜 미안해! 후원 안 해줘서 기분 상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표정만이 아니라 나오는 대사도 전부 날것 그대로다. 우리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희원과 서로 마주 보았다. 내 기분을 아마 정희원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세련된 표현도 곡진한 퇴고도 없는 말들. 하지만 어떤 말은, 날것 그대로일 때 가장 큰 감동을 준다. “우리엘.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응? 앗, 맞아. 이럴 때가 아니었지.] 나를 보던 우리엘의 시선이, 건너편에서 우리를 노려보는 마왕군을 향해 꽂혔다. 순식간에 식어버린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내 생각이 기우였음을 깨닫는다. 이 천사는, 틀림없는 ‘악마 같은 불의 대천사’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당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대천사와 맞서 대적하는 마왕들이 있었다. 마왕 서열 10위, 별과 논리학의 군주 ‘부에르’. 마왕 서열 18위, 음속의 마왕 ‘바신’. 마왕 서열 29위, 용과 악취의 대공작 ‘아스타로트’. 내 손에 명을 달리한 예제공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마왕은 셋이나 남아 있었다. 하나하나가 상대하기 쉽지 않은 적이었다. 특히 ‘별과 논리학의 군주’나 ‘음속의 마왕’은 더욱. 만약 부에르의 양팔이나 바신의 양다리가 멀쩡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구원의 마왕!]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어째서 같은 마왕을 대적하는 것인가.] 나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둘러댔다. “전 그냥 승격전을 한 것뿐인데요.” [그게 지금 말이 되는 변명이라고······.] “‘성마대전’이 진행 중이라고 해서 마왕 승격전을 시도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1차 성마대전’에서도 그런 일은 빈번히 있었고요.” [무슨······!] 내 말에 격분한 바신이 당장이라도 내 목을 따버리려는 듯 흉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두 다리가 사라진 그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당신은 ‘1차 성마대전’의 일부를 재현하였습니다!]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당신의 돌발행동에 흥미를 보입니다.] 실제로 내가 한 짓은, 1차 성마대전에서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저지른 짓과 똑같은 것이었다. 표정을 굳힌 ‘별과 논리학의 군주’ 부에르가 물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나?] “물론 안 괜찮겠죠.” 나는 마왕들의 기세에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격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 걱정해야 할 쪽은 제가 아닐 겁니다.” [마왕의 격을 해방합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5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상이합니다.] [당신의 ‘격’이 육체 조건의 패널티를 극복합니다.] 피부를 뚫고 나온 날개의 감각에 어깨가 간지러웠다. 그에 더해 전인화의 짜릿한 감각까지 겹치면서, 내 몸은 하나의 전격으로 뒤덮였다. 급격하게 치솟는 내 ‘격’에, 세 마왕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별과 논리학의 군주’는 한쪽 팔을 잃었고. ‘용과 악취의 대공작’은 애완용을 잃고 상처투성이였으며. ‘음속의 마왕’은 두 다리를 잃은 상태니 이미 전력에서 논외인 상태. 곁에 있던 정희원이 [심판자의 검]을 꺼내며 [귀살]을 발동했다. “안 그래도 전에 마왕이랑 붙다가 말아서 아쉬웠는데······.” 마왕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자, 금세 의기양양해진 우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 ■■들, 아깐 잘 나불댔잖아? 어디 또 지껄여 보시지?] “······.” [독자야, 희원아. 가자! 저 마왕 ■■들 다 조져버리자고······!] 나는 분기탱천한 채 망가진 화신체를 이끌고 나아가는 우리엘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무나 연약해진 어깨. 내 손에 힘없이 붙들린 우리엘이 토끼 눈을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엘, 뒤로 물러나십시오.” [응? 아······ 나 걱정하는 거야? 괜찮아. 나 우리엘이야!] 우리엘은 감동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조금 서글퍼서, 나는 가만히 미소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소속 진영을 결정하였습니다.] 허공에, 나의 참전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아마 우리엘은 저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윽고 의아해하던 우리엘의 몸이 뻣뻣이 굳기 시작했다. 천천히 커지는 우리엘의 눈동자. 나는 그런 우리엘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우리엘. 금방 끝날 겁니다.” 어쩌면 우리엘도, 지금쯤 내가 보고 있는 메시지를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선택한 진영은 악(惡)입니다.] * “김독자가 또 김독자했네.” 멀리서 전장의 풍경을 지켜보던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소강상태로 접어들던 전장은 김독자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인해 혼돈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왕을 죽인 마왕. 그럼에도 자신이 ‘악’임을 숨기지 않는 마왕. 김독자를 포위하는 하급 천사들의 움직임과 함께 곤란해하는 정희원의 얼굴도 보였다. 걱정되었는지, 이현성이 물었다. “정말 저래도 괜찮은 겁니까?” “안 괜찮으면? 이제와서 <에덴> 편 들라고 할까? 김독자는 태생이 마왕이야.” 한수영은 투덜대며 유중혁 쪽을 보았다. “그냥 두고 볼 거 아니지?” “물론.” “물어보나 마나, 나는 악(惡)이야.” 한수영의 배후성은 ‘심연의 흑염룡’. 애초에 그다지 선택지가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넌 어쩔 거야 유중혁.” “······.” “네 배후성은 어떻게 하래? 답 없냐?” 유중혁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전장에 너부러진 화신체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천사와 마왕의 시체들도 보였지만, 기실 대부분의 시체는 인간─ 즉, 환생자들이었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어?” 유중혁은 말없이 쓰러진 환생자들을 내려다보았다. 꿈틀거리는 환생자 몇몇이 유중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상세가 심각해 구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이들. 유중혁은 허리를 숙여 그들의 목에 단검을 꽂았다. 그러자 그들은, 이내 평안한 얼굴로 잠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유리 디 아리스텔이 말했다. 「수영.」 ‘걱정마, 유리. 널 저렇게 만들진 않을 거야.’ 죽은 환생자들의 영혼이 흩어지는 것이 보인다. 만다라의 굴레에 갇힌 환생자들은 이 섬에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불멸한다고 해서, 그들이 죽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름을 잃은 거대 설화가 소멸합니다.] 다른 시나리오에 동원될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잃어간다. 본래의 그들이 살았던 삶을 잊고, 이내는 죽음마저 잊는다. [가장 오래된 선(善)이 환생자들에게 선을 종용합니다.] [가장 오래된 악(惡)이 환생자들에게 택일을 강요합니다.] 죽은 이들 중 대부분은 선악이라는 거대한 개념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자들일 것이다. 한수영은 죽은 환생자의 눈꺼풀을 감겨주었다. 눈을 감은 환생자의 얼굴은, 당연한 말이지만 선도 악도 아니었다. [해당 전장에 개입하기 위해선 진영을 선택해야 합니다!] “진영을 선택하겠다.” 유중혁이 입을 여는 순간, 한수영이 실눈을 뜨고 물었다. “너 혹시 딴 생각하는 거 아니지? 카이제닉스 제도 가기 전에 너네 대판 싸웠었잖아.” 유중혁은 대답없이 한수영을 응시했다. 그 답답한 표정에 드러나는 생각이 뭔지 알 것 같았던 한수영이 빽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유중혁이 대답했다. “이 전쟁은 ‘성마대전’이 아니라 우리의 싸움이 되어야 한다. 이곳이 다른 이들의 전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성마대전이 아닌 김독자 컴퍼니의 싸움. 그게 무슨 의미인지, 한수영은 바로 눈치챘다. “그래야 선도 악도 승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김독자가 원하는 전개일 거다.”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건 아주 힘든 길이야.” 한수영은 곧장 태클을 걸었다. “그렇게 되면 우린 마계와 에덴을 동시에 적으로 돌리게 된다고.” “이곳이 1863회차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너다.” 한수영은 한 방 먹은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김독자······ 진짜 지독한 놈. 이런 상황에서 저딴 방법을 해결책이랍시고 제시하는 녀석은 저놈뿐이겠지.”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다.” “너도 마찬가지고. 둘이 아주 똑같아.” 그 말에, 유중혁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도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는군.” “뭐래, 난 너희 같은 멍청이들이랑은 달라. 그만 떠들고 슬슬 움직이자.” 멀리서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김독자가 두들겨 맞는 모습이 보였다. 하긴, 저 진영에서 갑자기 악을 선언했으니 <에덴>의 천사들이 배신감에 몸을 떨 법도 하다. 유중혁이 선언했다. “대충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뭐래? 나도 수틀리면 너 죽일 생각인데?” “좋군, 그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겠지.” “카이제닉스에서 못다한 승부를 여기서 보자고.” 두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전장을 향해 사라졌고, 졸지에 홀로 남겨진 이현성이 울부짖었다. “자, 잠깐만요! 수영 씨! 중혁 씨! 저는 어떡합니까!” “알아서 해!” [화신, ‘한수영’이 자신의 소속 진영을 결정하였습니다.] [화신, ‘유중혁’이 자신의 소속 진영을 결정하였습니다.] [화신, ‘한수영’이 선택한 진영은 악(惡)입니다.] [화신, ‘유중혁’이 선택한 진영은 선(善)입니다.] 마침내, 그들의 ‘성마대전’이 시작되었다. * 천계의 모든 병력이 집결된 본섬의 대평원. 천계(天界)의 수장인 메타트론은 자신의 집무실을 본따 만든 막사 안에서 다른 주천사들의 현황 보고를 듣고 있었다. ―<올림포스> 쪽에서 참가 의사를 밝혔습니다. ―<베다>도 참가하겠다고 타전해왔습니다. ―<파피루스>도 일부 성좌들을 보내겠답니다. ―<아스가르드>도 참전 선언을 했습니다. 이쪽은 자기들 거대 설화 때문에 다수 성좌가 참전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 연락은 없었지만, <황제> 쪽에서도 움직임이 보입니다. 이쪽이야 예전부터 화전양면을 펼치기로 유명하니······. ―‘지옥의 필경사’가 중립 지대에서 성실히 활동 중입니다. 덕분에 성좌와 환생자를 막론하고 참여율이 부쩍 올라가고 있다 합니다. 메타트론은 그러한 보고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메모한 뒤, 그에 적당한 응대를 덧붙여 송신했다. 이번 ‘성마대전’ 시나리오는 말 그대로 선악의 명운을 건 전쟁. 그런 만큼 메타트론은 이번 시나리오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현재 해당 진영의 절대선 수치는 56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쟁은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딱 하나, 이번 ‘성마대전’ 한정으로 특수하게 따라붙은 제약을 제외하면. [현재 혼돈 수치는 51입니다.] 혼돈 수치. 이것에 관해 물었을 때 대도깨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낡은 거대 설화의 대립에 이만한 규모의 무대를 제공하는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그러니 개연성에 의거하여 마땅한 위험 부담도 있어야겠죠. ―무슨 뜻이지? ―자세한 설명을 드리면 재미없으니 길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명심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혼돈 수치를 100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대도깨비들이야 성운의 명운 따위엔 관심이 없다. 오직 더 자극적인 시나리오를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자들. 혼돈 수치는 그처럼 사악한 구상의 발로일 것이다. [지루하군, 서기관.] 그 말을 한 것은 막사의 구석에서 검을 갈던 미카엘이었다. [내가 아가레스의 목을 따오겠다. 날 내보내줘.] 중섬 시나리오에서 김독자와 유중혁에게 당해 두 번이나 치욕을 맛보았던 미카엘은, 부활의 권능을 통해 화신체를 복원, 본섬 시나리오에 진출한 상태였다. 메타트론은 의지를 불태우는 미카엘을 향해 옅게 웃어주었다. [그러면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버립니다.] [지루한 전쟁이야 빨리 끝날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전쟁은 지금껏 존재했던 그 어떤 시나리오보다 더 길고 처절해야 합니다.] 메타트론은 각지에서 전송되어온 화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선택으로 선 또는 악을 선택한 이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들이대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용병으로 전쟁에 참전한 자들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양상이 달라지리라는 것을 메타트론은 알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선(善)이 위대한 성전을 독려합니다.] 이 전쟁에 참전한 성좌들은 언젠가 선악의 이름으로 서로를 증오하게 될 것이고, 그 증오는 다시 불타올라 후대의 설화를 만들게 되리라. 전황을 지켜보던 미카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김독자 컴퍼니> 녀석들이라도 해치우게 해주든가. 놈들에겐 갚아야 할 빚이 있어.] 메타트론이 고개를 저었다. <김독자 컴퍼니>는 이 시나리오의 중요한 변수. 이용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용해야 할 세력이었다.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안 됩니다. 그들은 따로 쓸 곳이 있습니다. 미카엘이 나서버리면―] 시나리오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성마대전’의 113번째 국지전이 강제 종료되었습니다.] 메타트론은 메시지에 첨부된 내용을 확인했다. 113번째 국지전은 우리엘이 참전한 전장이었다. [······강제 종료되었다?] 지금껏 그런 메시지가 뜬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혼돈 수치가 5만큼 증가했습니다.] [현재 혼돈 수치는 56입니다.] [경고합니다! 혼돈 수치가 55를 넘었습니다!] . . .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에서 무언가가 몸을 뒤틉니다.] [모든 것의 종말을 결정하는 묵시록의 재앙이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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