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383화 갑자기 나타나선 대뜸 무릎을 꿇으라니······. 곁에 있던 한수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고, 유중혁은 벌써 칼자루로 손이 가고 있었다. 이마를 짚은 척준경은, 아무래도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안하다, 후인이여. 어떻게든 말려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하긴, 저 양반이 이런 상황을 좋아할 리가 없지. 척준경은 <홍익>에 빚진 게 있으니 이 자리 주선을 거부하지도 못했을 테고······. ―그대의 뜻에 맡기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인 쪽을 바라보았다. [반도의 바람을 지배하는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냅니다!] [성좌, ‘천제의 풍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천제의 풍신. 그는 천왕(天王)과 함께 <홍익>을 창시한 성좌. 우리에겐 바람의 신으로 익숙한 ‘풍백(風伯)’이 바로 그의 진명이었다. 쿠구구구구! 자신의 수식언을 드러낸 성좌의 격. 거대한 봉황이 날갯짓을 하듯 가공할 강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바깥의 환생자들이 이쪽을 향해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가 내 주변의 소리를 모두 끊어버린 것이다. 지금부터 할 대화를 알리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겠지. [반도의 후예여, 너의 용맹은 익히 들어왔다. 그대의 명성이 널리 울려 퍼지며 반도의 위상도 올라갔다. 본신은 그런 상황을 무척 흡족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기세를 끌어올리는 유중혁에게 눈짓을 했다. 잠깐만, 일단은 좀 들어보자고. [그런데 최근, 그대가 타국의 성좌들과 부적절한 연대를 쌓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더군.] ······계속 들어야 할까 싶기는 한데. [대천사나 마왕은 반도나 동아시아에 유래를 둔 성좌들이 아니다. 즉, 그들은 외세(外勢)라는 이야기다.] 한수영이 눈치를 주었다. ―야, 저거 두고 볼 거야? ―내가 베겠다. ―뭐야, 혼선인가? 왜 유중혁 목소리가 들리지? ―내가 밀회방 통합했어. 내 말에 한수영과 유중혁의 메시지가 폭발했다. ―야, 장난쳐? 이제 머릿속에서까지 저 건방진 말투를 들으라고? ―내가 할 말이군.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 다 그만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단톡방으로 싸우는 와중에도 풍백의 따분한 훈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즉, 후예의 친외세적인 행동은 반도의 명예에 큰 누를 끼쳤으며, 본신은 그것을 심각한 죄악이라 여기는 바이다. 하지만 만약 후예가 그 일을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여······] 심지어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성좌도 등장했다. [성좌, ‘쇄국정책의 창시자’가 ‘천제의 풍신’의 말에 일부 동의합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작은 반도에는 놀라울만치 다양한 성좌들이 있으니까.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머리를 닦습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혀를 찹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하품을 합니다.] [한반도의 일부 성좌들이 ‘천제의 풍신’의 발언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합니다.] [누가 감히 익명의 수식언 뒤에 숨어 입을 놀리는가!] 쩌렁쩌렁 울리는 풍백의 진언과 함께, 하늘의 기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가공할 위세에 눌린 몇몇 성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그는 반도의 조상신에 가까운 존재. 각자 정도는 다르지만 <홍익>의 수혜를 받아온 반도의 성좌들은, 그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저 척준경조차도. [그런데 그대는 왜 아직도 서 있는 것이냐?] 그리고 풍백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무릎을 꿇으라 했을 텐데?] 거대한 압력이 나를 내리눌렀다. 나뿐만 아니라, <김독자 컴퍼니> 전체를 내리누르는 압력이었다. [성운 <홍익>의 설화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응시합니다!] 늙은 거목이 허리를 숙여 이쪽을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막 자라난 새싹의 양분을 탐하는 거목. 나는 그런 시선을 가만히 마주 보다가 대답했다. “싫은데요.” [그래, 싫······ 무어라?] “싫다고 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태도를 좋아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일단 원펀치를 먹이고 시작하라 종용합니다.] “저는 ‘성마대전’에 참가하러 온 거지, 당신에게 무릎을 꿇으러 온 게 아닙니다.” [아주 오만하구나. 내 너의 용맹함을 높이 사 지은 죄를 용서해주려 했거늘―] “용서해준 다음에는요?” 내 언사에 풍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홍익>의 권위로 <김독자 컴퍼니>를 흡수 합병하려는 생각이셨겠죠. 아닙니까?” 정곡을 찔렸는지, 저 고고한 성좌의 표정에도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너희가 <홍익>의 휘하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째서죠?” [태초에 <홍익>이 힘을 쓰지 않았더라면, 너희 성운은 태어나지도 못했다.] 마치 자식에게 배반이라도 당한 부모처럼, 풍백이 나를 향해 외쳤다. [<홍익>은 반도의 창시자다! 우리가 너희를 낳았고, 너희가 따를 뜻을 정하고 규율을 입법했다. 지금 너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다. <홍익>의 설화가 있었기에 너희가 존재하고, 그 설화를 통해 너희는 살아남을 수―] “지구 시간으로 4년 전, 한반도에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풍백의 말을 끊어버렸다. “반도가 위기에 빠졌을 때 <홍익>은 무얼 하셨습니까?” [······!]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절대 왕좌]가 나타나고, 이계의 신격들과 재앙들이 강림하고, 그래서 반도의 화신들과 성좌들이 일제히 힘을 모았을 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 극복한 시나리오들. 눈먼 왕좌를 향해 내리 꽂히는 [사인참사검]과, 그 검에 개연성을 빌려준 반도의 성좌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천제의 풍신’을 노려봅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은 [절대 왕좌]의 붕괴와 함께 태어난 설화였다. 나는 설화를 이야기하고, 설화는 나를 통해 자신을 말한다. “그때 당신과 <홍익>은, 그 잘난 성좌들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지?” 츠츠츠츠츳······! [네놈!] 피라도 토할 것 같은 얼굴로 풍백이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당신과 <홍익>이 초창기 반도를 이롭게 만드는 데 힘썼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설화가 가진 가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도의 모두가 당신에게 충성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풍백의 콧수염을 보며, 나는 말을 마쳤다. “각자 ‘시나리오’를 수행하는 방식이 있는 겁니다. 당신이 반도의 최상위격 성좌라 해서 <김독자 컴퍼니>의 행사에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내 맹랑한 말투에 척준경은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풍백이 이런 식으로 당하는 모습은, 아마 그로서도 처음 보는 것일 터다. [감히, 감히―] 말문이 막힌 풍백을 대신해, 그의 뒤에서 떠오른 것은 설화의 기백이었다. [성운, <홍익>의 거대 설화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운, <홍익>이 <김독자 컴퍼니>를 향해 뿌리를 뻗습니다!] 하나둘 떠오르는 <홍익>의 거대 설화들이 하늘을 향해 가지처럼 솟아오르더니, 이내 거대한 나무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이자, <홍익>이 실천하는 설화들의 총체, 그 모든 설화들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설화.」 「설화목(說話木) 신단수(神壇樹).」 <홍익>의 모든 설화는, 바로 저 나무와 함께 시작되었다. 신성한 기운을 흩뿌리며 설화의 가지를 뻗어오는 신단수. 훈화만으로는 안 되니, 이제 실력 행사라는 거겠지. 씁쓸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씁쓸했던 것은― “확실히 <홍익>의 최상위 신격들이 사라진 게 맞나 보군요.” [······무슨 뜻이냐?] 신단수는 내가 아는 그것과는 달리 훨씬 남루하고 조그만 소체에 가까웠다. 게다가 우리를 향해 뻗어오는 신단수의 뿌리는, 모두 그 끝이 흉측하게 상해 있었다. 오래도록 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는 거대 설화들. 심지어 그 뿌리를 통해 돋아난 가지와 나무들은 대부분 말라 있었다. 저것이 지금의 <홍익>이 가진 전부였다. “당신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원작의 ‘풍백’은 이런 꼬장꼬장한 노인네는 아니었다. 그는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품격 있고 정의로운 성좌였다. 그런데 <홍익>에 무언가 일이 발생했고, 성운의 세력이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풍백이 이처럼 구차해진 것은, 분명 그 일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감히 본신을 능멸하려는 것이냐?] 괴성을 지른 풍백이 바람의 힘을 발산하자, 주변에 거대한 폭풍의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대를 압박하는 엄청난 격에, ‘카이제닉스 제도’ 출신의 환생자들이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한수영이 다시 한번 채근했다. ―김독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익>의 모습이 안타깝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저쪽 사정이었다.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곁에 있던 유중혁이 검을 뽑아 들었고, 한수영이 왼팔의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억눌렀던 ‘거대 설화’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심지어는.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못마땅한 듯 이야기를 거듭니다.] 우리의 ‘거대 설화’가 아닌 거대 설화까지도 함께. 쐐애애애액! 우리를 향해 날아들던 거목의 뿌리가 설화들이 일으킨 파랑에 부서지고 있었다. [거대 설화, ‘신단수’의 소체가 고통스러워합니다!] 우리를 당장이라도 삼킬 듯 뻗어오던 뿌리들이 주춤거리며 흩어지고 있었다. 삼킬 수 없는 이야기에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멀쩡한 뿌리들이 뒤늦게 되돌아갔고, 말라비틀어진 앙상한 가지들이 비명을 질렀다. [거대 설화, ‘신단수’의 소체가 ‘천제의 풍신’의 명을 거부합니다.] [이런······?] 뿌리를 거둔 신단수의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가 가진 거대 설화의 격이 그 정도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지, 경악한 풍백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중립 지대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성좌들이 놀라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바앗!] 기다렸다는 듯 내 머리 위에 나타난 비유. 그와 동시에 비유의 채널이 활짝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수의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비유의 채널은 비형의 중계 채널과 연결되어 있다. 비형 녀석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녀석이 무슨 의도로 이런 상황을 유도했는지는 뻔하다. 내키지는 않지만, 분명 언젠가 해야 할 일이기는 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목소리에 주목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당신을 지켜봅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과 악과 중립 계통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무수히 떠오르는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 나는 풍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홍익>에게 하는 경고가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정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갈 선택지는 우리 스스로 정할 겁니다.” 세상의 성좌들을 향해, 나는 선언했다. “누구도, 그 선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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