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382화 Episode 73.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눈부신 헤드라이트에 신유승은 눈을 떴다. 허공을 누비는 새하얀 불빛들. 떠다니던 드론 한 기가 신유승의 얼굴 근처에서 팽그르 돌더니 검은 하늘 속으로 멀어졌다. “으, 머리야······.” 어질어질한 현기증 속에서, 신유승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고철 폐기물 더미뿐. 함께 있었던 일행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혼자 외따로 떨어진 건가? “신유승?” 폐기물 더미 속에서 소년이 꼴뚜기처럼 머리를 내밀었다. “이길영?” 신유승이 반가움에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그런 이길영의 머리통을 짓누르고 폐기물 더미 속에서 솟아난 한 여인이 있었다. “비켜! 냄새나잖아!” “지혜 언니!” 대충 누구와 함께 오게 된 건지는 알 것 같았다. 일행들은 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폐기물을 털어내며 일어섰다. “뭐야, 우리뿐이야?” “그런 거 같아요.” “부산 연합 재결성이네.” 이지혜는 약간 신이 난 듯한 목소리였지만, 신유승은 그렇지 않았다. 하필 이지혜와 이길영이라니. 이지혜와 이길영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신유승은 속으로 결심했다. ‘여기서 어른은 나뿐이야. 내가 잘해야 돼.’ 그런 신유승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지혜와 이길영은 서로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서열 정리를 시작했다. “흠흠, 얘들아 늘 그랬듯 대장을 정해야지?” “부산 연합 땐 누나가 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나야.” “야, 내가 유치원 입학했을 때 넌 태어나지도 않았어.” “아 그게 뭔 상관인데.” “쉿. 둘 다 조용해요!” 신유승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반사적으로 담벼락에 붙었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허공에서 벌레처럼 날아다니던 드론이 방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골목을 비추었다. 기이이이잉······. 드론은 잠시 그 자리를 맴돌더니, 이내 센서를 기우뚱하며 골목 바깥으로 사라졌다. 이지혜가 긴장하며 물었다. “저거 드론 아냐?” 그때, 허공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시나리오 시스템에 누군가가 개입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미증유의 힘에 의해 ‘본섬’의 ‘넥스트 시티’로 강제 소환되었습니다!] [‘넥스트 시티’는 현재 ‘성마대전’의 분쟁 지역과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해당 지역의 서브 시나리오를 해결하면, ‘성마대전’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넥스트 시티?” 이길영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얼른 가보자!” “애처럼 굴지마 이길영. 이거 게임 아니라고.” 신유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길영은 달려나갔다. 다행히 근처에 드론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숨어 있던 담은 생각보다 고지대에 있었다. “와, 이거······.” 도시가 한눈에 보이는 절경. 밤거리를 휘황하게 밝히는 광전자. 머리에서 푸른 빛을 내뿜는 안드로이드들이 마치 시위대의 행렬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세계관인지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었다. 이길영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여기서 겁나 쎄져서 독자 형 깜짝 놀라게 해줘야지.” “네가 여기서 죽으면 제일 놀랄 걸.” “······누나 나 왜 그렇게 싫어해?” 티격태격하는 이지혜와 이길영을 내버려둔 채, 신유승은 도시 아래의 전경을 관찰했다. 시위로 인한 약간의 소요를 제외하면, 도시는 정연한 시스템에 따라 체계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수준의 질서가 갖춰진 SF 세계관. 환생자들의 섬은 쇠락한 설화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이런 세계가 멸망한 걸까. 물론 신유승이 그런 고민을 하거나 말거나, 이지혜와 이길영은 신나서 떠들기 바빴다. “혹시 광선검 같은 것도 있나?” “하여간 도검 오타쿠······.” “시끄러워.” “어, 저기 쟤들 진짜 광선검 같은 거 차고 있는데?” “뭐? 어디?” 도시를 순찰하는 가드들이 인근 지역을 배회하는 것이 보였다. 세계관의 영향일까.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자 정보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Lv.12 순찰용 안드로이드] [해당 유닛은 지금의 당신보다 약 4배 강합니다.] 기겁한 이지혜가 중얼거렸다. “뭐야, 쟤들 왜 저렇게 세?” “우리가 약해진 것 같은데요.” 실제로 이 세계관으로 들어온 뒤, 주변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해당 세계관에서 당신들의 주요 능력치는 초기화됩니다.] [이 세계관은 ‘레벨 시스템’의 보정을 받습니다.] “빌어먹을, 이쪽으로 온다!” 어떻게 눈치챈 것일까. 갑자기 이쪽을 향해 가드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허공을 올려다 보니 몇 기의 드론들이 그들의 위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설화 에너지 반응 탐지!] [설화 에너지 반응 탐지!] 경고성과 함께, 가속도를 붙인 가드들이 등에서 부스터를 뿜으며 일제히 날아들었다. 이지혜와 신유승, 그리고 이길영은 제각기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망할, 여기 벌레도 없는데······ 신유승, 키메라 드래곤 소환할 수 있어?” “아직 쿨타임 안 돌아왔어.” [현재 당신의 레벨은 1입니다.] [레벨이 낮은 적을 사냥하여 경험치를 쌓으세요.] 이지혜는 죽을상을 하며 장도를 꺼내 들었다. 일행들 중 근접전에 특화된 것은 이지혜뿐. 재빨리 [귀살]과 [귀신 걸음걸이]를 발동한 그녀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가드와 맞섰다. 가드의 광선검이 그녀의 장도와 충돌하려는 바로 그 순간. 기이이이잉! 광선검이, 이지혜의 검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뚝을 베었다. “아아악!” [안드로이드 ‘이지혜’가 중상을 입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설화 에너지를 투여하세요.] 이지혜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비켜요!” 이지혜를 밀치며 끼어든 것은 신유승이었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이지혜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고, 이길영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광선검은 이미 신유승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중이었다. ‘아저씨.’ 그 순간, 신유승은 자신의 짧은 생을 반추했다. 고작 이런 곳에서 끝나게 된다는 억울함. 그럼에도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는 만족감. 신유승은 생각했다. 이것이, ‘구원의 마왕’의 화신다운 최후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해당 공격은 당신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츠츠츠츳, 튀는 스파크와 함께, 무형의 벽에 막히기라도 한 듯 가드의 광선검이 코앞에 멈췄다. “어?” 연달아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 [시나리오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거대 설화 ‘넥스트 시티’가 화신 ‘신유승’의 존재에 의문을 표합니다.] 상황은 이길영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공격을 시도하던 광선검의 전원이 일제히 꺼지고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던 이길영이 중얼거렸다. “······뭐지?” 시야의 오른쪽 상단에 옅은 회색으로 빛나는 폰트가 보였다. [이 시나리오는 18세 이용가입니다.] [해당 세계관은 심의에 따라 아동 및 청소년 유닛에 대한 살해 행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신유승과 이길영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개 이득인데?’ 어떻게 그들이 이곳에 소환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이라면. 뒤쪽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이지혜를 향해, 이길영이 씩 웃었다. “누나, 공짜 쩔 받을 준비해.” 가드의 대퇴부에 단검을 박아 넣는 이길영을 보며, 신유승은 생각했다. ‘어쩌면, 조금만 더 어린애로 있는 것도······.’ 이 시나리오의 끝에 무엇이 기다릴지 신유승은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도 하나 있었다. 이 시나리오가 끝나면, 아마 그들은 김독자가 깜짝 놀랄 만큼 강해져 있을 것이다. * 포탈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성좌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얼핏 세어봐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설마,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건가? “독자 씨.” 긴장한 이현성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 한수영, 이현성, 정희원.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일행은 하나의 별자리처럼 뭉쳐 섰다. 곧이어 시나리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성운은 ‘성마대전’의 중립 지대에 입장하였습니다!] [당신은 ‘성마대전’의 진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하늘을 오색으로 물들이는 알림 메시지도 있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성마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보나마나 도깨비 놈들 짓이겠지. 오자마자 동네방네 홍보를 다 하는군.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일부 성운들이 당신들의 행보를 주목합니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는 성좌들을 마주 보았다. 꽤 쟁쟁한 격을 뿜어대는 성좌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성좌도 보였다. [후인이여, 너무 늦었군.] 이쪽을 향해 중후한 미소를 짓는 사내. 나는 반가운 마음에 외쳤다. “고려제일검!” 그는 ‘중섬 시나리오’에서 우리와 이별했던 척준경이었다. 과연 설화급에 오른 성좌답게, 그는 무난히 본섬으로 진입한 모양이었다. [제법 장대한 시나리오를 수행한 모양이지? 일행이 많아졌군.] 척준경의 시선이 우리를 따라 포탈에서 나온 환생자들을 응시했다. 나와 함께 본섬으로 건너온 ‘카이제닉스 제도’의 사람들이었다. “‘성마대전’을 함께할 사람들입니다.”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은 많을수록 도움이 되겠지. 그보다······ 후인은 뭔가가 달라진 것 같군.] 마치 탐색이라도 하듯, 척준경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대들의 설화에서 묘한 깊이가 느껴진다.] “······그렇습니까?” 척준경의 시선이 나를 지나쳐 한수영을 향했다. 한수영은 뭘 보냐는 듯 불경한 시선으로 척준경을 마주 보았다. 척준경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과연.] 문득 ‘만다라의 수호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살이여, 시간을 견뎌 보십시오. 카이제닉스 제도를 클리어한 뒤 우리 성운의 설화들은 모종의 변화를 겪었다. 이현성, 정희원, 특히 한수영. 그들이 카이제닉스에서 견뎌낸 시간들은, 결코 허투루 보낸 세월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설화로 기록되고, 그 설화는 다시 우리의 격을 키운다. 척준경의 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쪽에서 우리를 염탐하던 성좌들이 한층 더 노골적으로 우리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성좌, ‘양다리 전문가’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성좌, ‘신궁왕’이 당신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성좌, ‘입은 셋 머리는 하나’가 ‘카이제닉스 제도’의 환생자들을 비웃습니다.] 그 격의 향연에 ‘카이제닉스 제도’ 출신의 환생자들이 뒷걸음질 쳤다. ‘카이제닉스 제도’ 바깥으로 벗어난 그들은, 이제 세계관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으르렁거립니다!] 환생자들을 보호하듯 나선 것은 한수영이었다. 대기가 꿈틀거리며, 한수영의 배후로 흑염룡의 기세가 떠올랐다. ‘카이제닉스 제도’의 환생자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존경의 염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과연, 저게 바로 왕의 면모라는 거겠지. 하지만 성좌들은 그런 한수영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성좌들의 기세가 흉흉해진 것은 삽시간이었다. 쿠구구구구! [감히 소성운의 화신이······!] 어쩐지 귀찮은 마음에, 나는 이쯤에서 흐름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성좌들을 노려봅니다!] 거대 설화의 준동에 성좌들이 흠칫 놀라며 몇 발짝을 물러섰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척준경을 향해 물었다. “그쯤 해두고, 저희를 기다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척준경은 조금 곤란한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말해도 될지 아닐지를 그 스스로 가늠하는 눈빛. 몇 가지 떠오르는 가정이 있었고, 나는 그중 하나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곳은 중립 지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려제일검께서는 성마대전의 진영을 결정하셨습니까?” [아직이다.] ······그렇군. 아직도 편을 고르지 않았다? 척준경이 말을 이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성좌들의 선악(善惡)이란 필멸자의 그것과 같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나처럼 필멸자로 시작해 혼자만의 힘으로 성좌위에 오른 척준경은, 대천사나 마왕들이 주장하는 선악의 개념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러니 그의 고민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척준경에 한정된 이야기. 나는 뒤쪽의 성좌들을 일별하며 물었다. “저분들도 편을 고르지 않은 상태겠군요.” 척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척준경의 뒤쪽으로, 드넓은 평원 곳곳에 천막을 치고 흩어져 있는 성좌들의 무리가 보였다. [현재 전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대충 알아본 바로는······.] 곳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진언들.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아직까지 자신의 진영을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 속이 뻔한 일이었다. 이곳 중립 지대의 성좌들은, 눈치를 보며 때를 기다리다가 유리한 편을 골라 ‘성마대전’에 참전하려는 것이다. 유중혁과 한수영이 동시에 [한낮의 밀회]를 걸어왔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것 같군. ―이 새끼들 지금 그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을 선택하지 않은 ‘중립’의 힘이 강해질수록, 진영을 선택했을 때 얻을 이득도 커진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중립 지대의 성좌들을 경멸합니다.] [성좌, ‘지옥의 필경사’가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에게 예약되어 있음을······.] 선이든 악이든, 이들은 때가 되었을 때 자신들의 세력을 최상의 거래 조건하에 팔아 치울 생각인 것이다. 한수영이 피식 웃었다. ―목적이 뻔하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척준경이 한숨처럼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대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 [누굽니까?] [성운 <홍익>의 고위급 성좌다.] 역시나. 아무래도 척준경은 지금 우리들을 포섭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듯했다. 나는 옅은 실망감을 감추며 물었다. “<홍익>의 고위급 성좌들은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오래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별자리의 연회’에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암흑성]에서 ‘시조의 어머니’를 상대하면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바로 너의 앞에 있으니.] 고고한 격이 담긴 진언. 성좌들의 대열이 갈라지며, 새하얀 섭선을 쥔 신선(神仙)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마다 느껴지는 웅혼한 바람의 힘. ······이거, 누구신지 알 것 같은데. [무릎을 꿇고 예를 보여라, 반도의 후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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