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381화
“저 두 사람, 약혼했어요.”
“예?”
그 어마어마한 뒷북에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이현성 쪽을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이현성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유중혁과 한수영.
제도 카이제닉스의 1왕자와 백작가의 영애.
키 차이가 좀 심하긴 한데······ 계속 보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이 성격은 잘 안 맞겠지만 은근히 닮은 점도 많으니까.
나는 불쑥 치밀어 오른 장난기에 입을 열었다.
“어이, 너네 그렇게 보니 흑곰과 아기 새 같기도―”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죽여버린다.”
“한 마디만 더하면 입을 찢어버리겠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정희원이 내게 속닥거렸다.
“도발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렇겠군요. 그런데······ 뭔 일이 있었던 건 희원 씨 쪽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네?”
나는 어리둥절하는 정희원에게 씩 웃어 준 뒤 유중혁과 한수영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내 장난에 기분이 상했는지 둘 다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한수영. 네 역할이 중요해. 알지? 네가 먼저 잘 말해야―”
한수영은 대답이 없었다.
“한수영?”
츠츠츠츠츳!
한수영의 몸에서 기이한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곧바로 눈치챘다.
유리 디 아리스텔의 자아가, 한수영을 밀어내고 있었다.
「널 보내주지 않을 거야.」
유리 디 아리스텔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면, 언젠가 너희들은 후회하게 될 거야!」
「너희가 가진 설화들은 언젠가 인적이 끊어진 유적지처럼 낡아버릴 것이고, 누구도 너희의 설화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래서 결국엔, 이 섬에 박제되지도 못한 채 소멸해갈 거라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뭐?」
유리 디 아리스텔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유리 디 아리스텔.
이 시나리오의, 본래 주인공.
본래의 시나리오였다면 그녀는 지금쯤 평범한 여식으로 자라나 왕의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세계에 남아 있으면 너희는 안전해.」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녀를 이해하지만 그걸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녀와 같은 설화를 살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읽어도, 어쩌면 그건 그냥 읽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건방진 설득이 아니라 상상이다.
한수영이라면 나라면, 어떻게 말해줬을까.
「내가 ‘환생자들의 왕’에게 청할게. 그냥 다 함께 이곳에 남아. 그리고 윤회의 벽에 몸을 맡겨. 그러면―」
“매번 똑같은 시나리오를 수행하며 살아가게 되겠지.”
「뭐?」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유리 디 아리스텔. 처음으로 왕이 된 기분이 어땠어?”
유리 디 아리스텔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나는······!」
‘환생자들의 섬’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낡은 설화들의 박물관.
이 세계의 근간은 오래된 3세대의 중세 판타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유리 디 아리스텔은, 이 거대 설화의 양식에 알맞은 배역과 행동만을 수행하며 삶을 반복해왔을 것이다.
한수영은 그것을 알았기에, 유리에게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알려주고 싶었겠지.
우리는, 설화에 지배당하는 노예가 아니라고.
「나는, 그저······!」
아마 유리 디 아리스텔도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한수영은 뛰어난 작가니까.
“한수영을 좋아하지?”
「······.」
“그러면 한수영을 믿어봐. 그 녀석은, 절대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유리 디 아리스텔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츠츠츳, 하고 가볍게 스파크가 튀며 하얗게 물들었던 한수영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현기증이 나는지 가볍게 휘청거린 한수영이 감탄했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김독자, 제법인데?”
“너한테 배웠다.”
“유리가 진짜 너랑 결혼하고 싶어할지도······.”
“헛소리 말고 준비해. 이제 진입할 거니까.”
우리는 곧장 알현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위협적인 기세가 알현실의 양 옆에서 쏟아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정희원이 내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땐 미안했어요, 독자 씨.”
뭐가 미안했다는 건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신 이번엔 잘 지켜줄게요.”
“믿겠습니다.”
이현성과 정희원이 내 양옆에 서자, 내게 쏟아지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최고의 검과 방패가 한자리에 모이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나는 알현실의 양 옆으로 도열한 인파들을 살폈다.
한쪽에는 혁명단의 대표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귀족들과 그 기수들이 서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쳐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왕좌를 코앞에 둔 순간, 도열한 인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왕은 누구입니까?”
왕은 누구인가.
그 물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들은 이곳에 모였다.
“소문대로 검은 마법사가 왕이 된 것인가?”
“적법한 왕을 가려내시오!”
“왕자들이여! 진실을 알려 주십시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깨닫는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들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이 세계의 설화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나와 유중혁은 동시에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수영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제도 카이제닉스의 왕이다.”
군중들이 들고 일어났다.
“감히!”
“카이제닉스의 정통 계승자는 어디에 있는가!”
“저 여자를 죽여라!”
한수영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이 검이 바로, 왕의 증거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눈부신 백광을 토해냈다. 그 검을 알아본 몇몇 군중들이 무릎을 꿇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중혁이 나섰다.
“그녀가 제도의 왕이 맞다.”
1왕자가 나서자, 1왕자의 지지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혁명단에서 곧장 거센 항의가 튀어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은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소!”
“뭐든 처음이 있는 법이지.”
“우리 가문은 이런 결과를 인정할 수······!”
급기야, 자신의 역할을 벗어난 발언을 하는 존재도 나타났다.
“당신들의 선택은 이 세계관에 맞지 않소이다!”
“우리 세계관은 그저―”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의 세계관? 그게 뭐지?”
사람들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말없이 허공의 메시지를 올려다보았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는 ‘김독자 컴퍼니’입니다.]
김독자 컴퍼니. 세상에 그런 장르는 없다. 하지만 그런 장르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어떤 장르도 아니야.”
유중혁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김독자 컴퍼니>는, 그냥 <김독자 컴퍼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치켜든 한수영이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카이제닉스 제도>가, 그저 <카이제닉스 제도>인 것처럼.”
[성유물,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효과가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은 세 가지 속성의 에테르를 사용하는 검.
[에테르 속성이 ‘불’로 변환됩니다.]
한수영이 쥔 칼날의 끝에서 새하얀 홍염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한수영이 쥔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에테르 속성 ‘어둠’이 중첩 발동합니다.]
그 위에, 다시 유중혁의 손이 겹쳐진다.
[에테르 속성 ‘신성’이 중첩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세 가지 속성. 불, 어둠, 빛의 에테르가 한꺼번에 타올랐다. 그런 기적을 본 적이 없는 제도의 백성들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한수영이 말했다.
“왕? 왕이 되고 싶다면 얼마든지 와서 해 봐. 이 검을 쥘 자신이 있다면 말이지.”
누구도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그곳의 군중 모두가 알았던 것이다.
이 영롱한 빛에 손을 대는 순간, 자신의 몸은 먼지처럼 스러져버린다는 것을. 압도된 좌중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물어왔다.
“당신들, 대체 이러는 의도가 뭡니까?”
“······이 제도를 어쩔 셈입니까?”
이제껏 없었던 전개. 그들은 이제 이 세계의 끝이 두려워졌다.
그에 대답한 것은 유중혁이었다.
“우리는 겨우 ‘카이제닉스 제도’ 따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해방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덧붙인 내 말에 몇몇 군중들이 중얼거렸다.
“그게, 그게 무슨······.”
「다들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요.」
그 말을 한 것은 나도 한수영도 유중혁도 아니었다.
「우리도 언제까지 같은 시나리오만을 반복할 수는 없어요.」
유리 디 아리스텔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이 시나리오의 결말을, 그녀는 눈치챈 것이다.
「나는······ 이들과 함께 가보려고 합니다.」
유리 디 아리스텔의 말에, 군중들은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심을 한 것은 유리만이 아니었다.
순간 심장이 강하게 뛴다 싶더니, 누군가가 내 입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함께한다면, 나 역시 그럴 것이다.」
그것은, 내 빙의체인 4왕자 리카르도의 말이었다.
뒤이어 유중혁에게서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약한 동생을 혼자 보낼 수는 없지.」
1왕자 슈바이첸.
뒤를 이어 이현성과 정희원 쪽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이 가는 곳에, 저의 검이 있을 것입니다.」
「폐하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빌스턴 프레이머와, 에리히 스트라이커까지.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유리 디 아리스텔만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살던 원래의 주인공들 또한,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포효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세계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성마대전에 참가할 겁니다.”
모든 군중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컴퍼니의 대표로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섬의 모든 존재를, ‘환생’으로부터 해방할 겁니다.”
하나둘, 군중들이 무릎을 꿇었다.
오랫동안 거대 설화의 시나리오에 종속되어 있었던 군중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함께 갑시다.”
그 말과 동시에 세계에 거친 진동이 일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였고.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울부짖습니다!]
하나의 거대 설화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제도의 모든 백성들에게 통제권을 발동합니다!]
커다란 이야기는 존재를 소비하여 자신의 생을 연명한다.
하지만 결국 그런 거대 설화를 만드는 것은.
[제도 ‘카이제닉스’의 모든 환생자들이 거대 설화의 통제를 거부합니다.]
바로 존재들이다.
[세계관이 당신의 대답을 납득합니다.]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장르 선택’이 종료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을 정산 중입니다.]
[해당 시나리오 지역에 ‘성마대전’의 시공간에 동기화됩니다.]
[‘성마대전’의 포탈을 개방합니다!]
허공에 눈부신 빛을 흩날리는 광대한 포탈이 만들어졌다.
성마대전으로 가는 문이었다.
“먼저 가겠다.”
제일 먼저 유중혁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유중혁을 따라, 결심을 마친 환생자들이 포탈 안을 기웃거렸다.
누군가는 내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우리가 정말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직하군.”
머쓱하게 웃은 환생자가 포탈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밀려 나가는 인파들. 나와 한수영은 그 대열의 끝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한수영이 말했다.
“너 먼저 들어가.”
아마 한수영은 이 세계에 꽤나 애정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여운을 즐길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포탈 안으로 발을 들이미는 순간, 한수영이 나를 붙잡았다.
“야, 김독자.”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 눈이었다. 잠시 녀석을 보고 있자, 한수영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사래 쳤다.
“됐어, 아무것도 아냐.”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한수영이 투덜거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뭔가 불안해진 나는 한숨을 쉬며 포탈에서 발을 빼냈다.
“그냥 말해. 전에도 이런 식으로 의미심장하게 헤어져서 뭔가 불길하니까.”
“별 거 아냐.”
“그럼 말해도 되잖아.”
“······집요하네 진짜.”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바닥을 보던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시 소설을 쓰고 싶어질지도 몰라.”
한수영이 그렇게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 것은 처음이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한수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내 소설을 읽어줘.”
“네 소설을?”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먼저 읽을 기회를 주는 거야.”
“난 그렇게 좋은 독자는 아닌데.”
“토 달지 말고 읽으라면 읽어.”
“알았어. 읽을게.”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뭐, 읽어준다고 나쁠 것도 없지.
난 소설 좋아하기도 하고.
하지만 한수영은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재차 물어왔다.
“······진짜로?”
“진짜로.”
한수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쩌면 3천 편 넘을지도 몰라.”
“딱 내 취향이겠네.”
“재미 없을지도 몰라.”
“네가 쓰는데 재미가 없겠냐?”
내 말에 한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뭔가 머쓱해진 내가 말을 덧붙였다.
“무슨 장르로 쓸 건데?”
“그건 그때 봐서······.”
“로맨스는 어때?”
“······로맨스를 어떻게 3천 편이나 쓰냐?”
우리는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포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포탈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이현성과 정희원이 있었다. 뭔가 미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느껴지는 것이 보기 좋았다.
“저쪽은 3천 편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그 순간, 하늘에서 반가운 메시지가 들려왔다.
[간접 메시지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훈훈한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경악합니다!]
아무래도 시나리오가 종료되며 채널이 다시 활성화된 모양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보호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성좌 ‘강철의 주인’을 경계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억울해합니다.]
피식 웃은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로맨스라······.”
나는 한수영과 함께 포탈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멀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왔군, <김독자 컴퍼니>.]
마침내, 성마대전의 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