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380화 “······한수영?” 언뜻 한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했으나, 기운은 금방 사그라졌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의 선택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세계관이 이상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엉겁결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쥔 유리 디 아리스텔이 몸을 떨며 외쳤다. “감히,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당신은 그룬시아드 제도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입니다.] [당신의 왕위가 등장인물 ‘한수영’에게 이양됩니다.] [세계관이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리 디 아리스텔의 몸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것이 아닌 설화. 내가 잘 알고 있는 한수영의 설화였다. 유리 디 아리스텔은 그 설화를 하나라도 놓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수영이를 빼앗길 수는 없어!” 츠츳, 츠츠츳!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책임진다고 했잖아!” 그것은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런 전개를 원했던 게 아냐! 나는, 나는 그저 네가 계속 이 섬에 머물렀으면······!” 유리 디 아리스텔이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활성화 중입니다.] 유리 디 아리스텔과 한수영이 보낸 시간들이 파편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같이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내 수호령이 되어 주겠다며! 나는 네가 보여준 시나리오가 좋아. 이대로 너를 보내줄 수는 없다고! 나는······!”」 「“미안, 유리.”」 꾸르륵 피거품을 문 유리 디 아리스텔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마 지금쯤 그녀의 안에서는 한수영과 유리 디 아리스텔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그녀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거대 설화들이 싸우고 있었다. 느닷없는 혼란에 빠진 것은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그러니까 지금, 적법한 왕이 나타났다는 건가?” 근위대와 백성들이 복잡한 눈으로 서로를 보며 수군거렸다. “그럼 우리 세계의 장르는 어떻게 되는······.” “쉿, 그런 발언은 금지인 거 잊었나? 자네 배역에나 충실하게!” 하긴, 나라도 갑자기 이 세계의 장르가 [김독자 컴퍼니]라는 말을 들으면 저런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내 곁에선 유중혁이 말했다. “김독자, 너무 서둘렀다.” “알아.” “이 제도는 아직 한수영을 왕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한수영이 지반을 잘 다져 놨길래 가능할 줄 알았어. 얼마 전까지 이 녀석이 왕이었잖아.” “적법한 왕은 아니었지. 그녀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기에 ‘혁명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강제적인 정권 교체는 반드시 진통을 유발하게 되어 있다. 심지어 이번 시나리오에서 발생한 유리 디 아리스텔의 ‘왕위 찬탈’은 본래의 ‘카이제닉스 제도’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일. 왕의 돌발행동에 이어진 우리의 돌발행동은 똑같은 시나리오를 무수히 반복해 온 ‘카이제닉스 제도’의 환생자들에겐 낯선 것이었다. [장르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당 장르의 클리어 조건 충족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는, 아직 우리가 만든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 * [<스타 스트림>이 해당 시나리오의 클리어 여부를 논의 중입니다.] “곤란하게 됐군.” 유중혁과 나는 호화스러운 침대 위에 놓인 한수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성 바깥에서는 아까부터 소란스러운 폭음이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새로운 왕에 찬성하는 세력과, 새로운 왕을 거부하는 백성들이 혈투를 벌이는 소리였다. “어차피 유리 디 아리스텔의 왕권은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유중혁은 힐난하는 목소리였다. “먼저 제도 곳곳의 유력 가문에 흩어진 왕의 기수들을 모았어야 했어. 그다음에 서서히 왕권을 무너뜨리고, 마지막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선보였어도 될 일이었다. 그랬으면 지금처럼 제도가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게 최선이었겠지.” “그걸 잘 아는 놈이―” “하지만 그 계획대로 진행했다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한수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의 50년이, 더 길어졌을 거야.” “······.” “녀석의 50년을 1분이라도 더 늘리고 싶지 않았어.” 진심이었다. 처음 이 세계로 빙의되고, 한수영의 50년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줄곧 한 가지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 나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되었다. 50년의 세월을 견딘 한수영은,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녀는 정말 내가 알던 한수영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을까. “모두, 내가 ‘환생자들의 왕’과 거래했기 때문이야.” 「차 라리 내가 희 생하 는 편 이더 나았 어」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은 몇 번인가 나를 향해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화를 참는 듯 눈을 꾹 감은 채 구석의 소파에 등을 완전히 기대었다. “한마디하고 싶지만, 다른 녀석이 대신 해줄 것 같군.” “뭐?” 다음 순간, 화끈한 통증이 내 뒤통수를 물들였다. “야, 김독자.” 돌아보자, 익숙한 미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때문에 다 망했잖아!” 부스스 머리를 털며 일어난 한수영이 다시 한 번 내 머리통을 갈겼다. * 한수영이 깨어난 후, 우리는 긴급회의에 돌입했다. 한수영은, 안색이 파리한 것만 빼면 무척 괄괄한 상태였다. “내가 쓰라고 적어둔 방법 있었잖아. 너흰 어떻게 된 게 매뉴얼대로 하라는 것도 못하냐? 너넨 이현성 보다 못해! 알겠어?” 정희원과 함께 방의 문을 지키고 있던 이현성이 문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미는 것이 보였다. “김독자. 내가 써둔 세 가지 방법 읊어봐.” “첫 번째 방법, ‘퓨전 판타지’ 루트.” “내용은?” “이계의 신격의 힘을 빌려서 시나리오를 클리어······ 야,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방법이잖아.” “그래서, 두 번째는?” 나는 알 수 없는 억울함 속에서, 교과서를 읽듯 한수영의 책을 읽었다. “두 번째 방법, ‘판타지’.” “내용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을 살해한다. 아니, 왜 내가 이걸 읽어야 하는······.” 한수영의 손바닥이 다시 한 번 내 뒤통수를 갈겼다. 제기랄, 이 자식이. “세 번째 방법, ‘로맨스’.” “내용은?” “유리 디 아리스텔과 결혼한다.” “그래서 네가 택한 건 뭐지?” “세 번째 방법.” “너 나랑 결혼했어?” “아니.” “왜!” 나는 날아오는 한수영의 손바닥을 피하며 외쳤다. “야, 이딴 게 진짜 제대로 된 방법일 턱이 없잖아. 이걸 진짜 실천하라고 써둔 거냐?” “그럼 감상하라고 써놨겠냐!” 한수영은 씩씩거리며 손가락질했다. “네가 혼인을 받아들였으면 다 해결됐을 거라고! 네 적법성과 유리 디 아리스텔의 무력이 혼인을 통해 결합했다면, 제도가 지금처럼 분열될 일은 없었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짓을 하면 넌 이곳에 남게 되는―” “유리는 내가 설득할 수 있었어! 내 본래 계획은 너와 유리가 결혼한 다음에 이어지는 거였다고!” “······아깐 용케도 방법을 찾았다고 칭찬하지 않았냐?” “네 빌어먹을 오독에 감탄한 거지.” 젠장, 그런 거였나. 한수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어쩔 거야.” 혁명단과 근위대. 어느 쪽 편을 들더라도,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세계관이 해당 시나리오의 결말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세계관이 등장인물 ‘한수영’에게 왕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해당 시나리오의 클리어 여부를 논의 중입니다.] 백성들은 싸우고 있고, 우리는 시나리오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한수영을 보며 말했다. “내가 또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한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길었지, 50년.” 나는 그 태연함에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내 짐을 덜어주려는 듯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사실 잘 기억도 안나.” “그럴 리가 없잖아.” “넌 내가 진짜 50년을 살았을 거라 생각해?” “그럼?” “대부분은 잊었어. 정확히는 일부러 지웠지.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으면 나도 미쳐버렸을걸.”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녀석에겐 [아바타] 스킬이 있다. 그리고 [아바타] 스킬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자신이 가진 기억을 소거하기에 유용한 스킬이다. “그 책을 남겨 둔 건 내가 잊은 것들을 기록해두기 위함이었어.” “현명한 선택이었네.” “비겁한 방법이지. 그리 칭찬받을 만한 건 아냐.” 한수영이 방의 한쪽 구석을 흘끗거리며 말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도, 아무것도 잊지 않는 괴물도 있으니까.” 그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과장스러운 제스처로 입을 열었다. “자, 그보다 지금부터 해결책을 생각해보자고.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건대, 다음 전개는―” 내 의도를 눈치챈 한수영도 끼어들었다. “아니지, 작가의 입장에서 판단하건대,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수영과 나는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도깨비를 불러서 항의해보자든가, 만만한 하위격의 이계의 신격을 불러 보자든가, 그냥 시나리오고 뭐고 다 때려 부수고 여기서 탈출하자든가······. “모두 닥쳐라.” 유중혁의 말에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눈치를 살피던 한수영이 내 쪽으로 붙으며 중얼거렸다. “가끔은 주인공의 직감을 믿어보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 제도의 기수들이 왕성으로 모일 것이다. 그때, 승부를 본다.” “정공법이군.” “방법은 그것뿐이다.” 유중혁의 말이 맞다. 때로는, 정공만이 최선의 방책일 때도 있다. * 밤은 금방 찾아왔다. 유력한 가문의 귀족들이 모두 알현실로 모였고, 우리도 알현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제도 전체가 알 수 없는 적의로 들끓고 있었다. 적법한 왕을 가리자는 세력. 검은 마법사에 동조하는 세력. 그리고 우리 일행 모두에게 적의를 보이는 세력까지. 흉흉한 기세가 느껴지는 회랑을 돌며,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아이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확실히 테이밍 스킬을 가진 아이들이나, 대군 전투 능력을 보유한 이지혜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애들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 다른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있을 거예요.” “하영 씨는 어떻게 됐죠?” “하영이는 엄밀히 따지면 <김독자 컴퍼니>의 소속원이 아니라서, 같은 시나리오로 소환되지 않았을 겁니다.” 원작대로라면 장하영도 지금쯤 자신의 역할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는 정희원과 이현성의 호위를 받은 채 회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내 앞쪽으로는 마치 경보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한수영과 유중혁이 있었다. 황새와 뱁새의 대결을 보는 느낌이었다. 나와 같은 광경을 보던 정희원이 슬그머니 내게 귓속말을 했다. “독자 씨.” “네?”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독자 씨가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뭘 말입니까?” 정희원이 앞서가는 유중혁과 한수영의 뒷모습을 보며 은근히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저 두 사람 관계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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