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377화
Episode 72. 세 가지 방법
나는 책을 받아들고 멍하니 있다가, 집사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이 책을 주신 게 언제라고?”
“처음 원고를 주신 건 40년 전입니다. 그 뒤로도 10년 정도 제게 꾸준히 원고를 주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그걸 책으로 엮은 것뿐입니다.”
“내용을 읽었나?”
“맹세코 단 한 줄도 읽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그저 장정 편집만 도맡았을 뿐입니다.”
나는 책을 펼쳤다.
그러자, 말끔하게 정리된 책의 목차가 나타났다.
······.
Episode 13. 반격의 왕자들
Episode 14. 1왕자의 난
Episode 15. 세 가지 방법
······.
나는 책의 페이지를 정신없이 넘겼다.
두꺼운 장정이었지만, 특성 효과를 받는 내겐 읽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내 속독에 불만을 갖는 녀석도 있었다.
“지나치게 빨리 읽는군.”
“형이 느린 거겠지.”
“무슨 내용이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정을 넘기는 내내, 묘한 탈력감이 밀려왔다. 페이지마다 묻어 있는 세월의 피로감과 절박감. 그것이 한수영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한수영은 내가 자신의 책을 읽게 되는 순간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읽던 페이지를 잠시 멈춰두고 장정의 맨 마지막 부분을 펼쳤다.
그곳에는 <작가 후기>가 있었다.
「하여간, 꼭 책 읽으면 작가 후기부터 펼쳐보는 인간들이 있어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를 맞이하는 문장들. 그럴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아마 네가 이 책을 읽을 때 쯤이면 나는······.」
나는 비감 어린 마음으로 다음 문장을 읽었다.
「여전히 잘 살아 있겠지. 하하, 쫄았냐?」
이 자식이.
「그나저나,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너는 김독자겠지. 왕자 김독자라. 그 꼴을 구경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네.」
한수영 특유의 비아냥거림이, 그녀가 쓴 문장 사이사이에 선명하게 배어 있었다.
「너인 줄 어떻게 알았냐고? 뭐······ 사실 나도 확신하는 건 아냐. 내 예상 창작도 한계란 게 있으니까. 다만 네가 이 세계에 왔을 때의 경우의 수와 클리셰 조건들이 있고, 나는 그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을 짐작했을 뿐이야. 아, 물론 내 예상이 틀릴 수도 있겠지.」
장난치듯 서술된 문장들.
하지만 그 문장에 서술된 내용까지 장난은 아니었다.
「사실은 틀렸으면 좋겠어. 내가 몇십 년이나 누굴 기다리다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냐 미친놈아.」
한수영의 <작가 후기>는 한 번에 쓰인 것이 아니었다. 아마 한수영은 이 세계에 빙의된 그 순간부터, 조금씩 이 기록들을 모아 왔을 것이다. 그리고 직접 글을 쓸 수 있게 된 후부터 기록들을 축적했겠지.
한수영의 기록은 계속되었다.
「예상했겠지만, 나는 이 여자 몸으로 태어났어. 처음에는 내가 환생한 줄 알았다니까······. 첫 1년 정도는 답답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머릿속 [아바타]를 활용해서 기억 정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맛이 가버렸을 거야. 그나마 네 살이 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니까 상황이 좀 나아지더라. 빌어먹게도, 나도 글쟁이라고 이런 순간까지 글을 쓰며 구원을 받고 싶었나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채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묵묵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늦어도 3년쯤 지나면 올 줄 알았어. 전에도 3년 만에 돌아왔었잖아. 그런데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니까······(이렇게 서술한다고 해서 시간이 금방 간 거라고 착각하진 마라) 생각이 달라지더라. 그리고 어느 순간 납득하게 됐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조금씩 힘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김독자는 당분간 오지 않는구나.」
한수영의 필체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기다리라 해놓고 오질 않는구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게, 김독자의 잘못은 아니겠구나.」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이 글을 쓰던 순간의 한수영에게 닿기나 할까.
「미안, 너도 이런 거 읽기는 싫을 텐데. 근데 말야, 여기선 징징대지 않는 게 쉽지가 않아.」
한수영의 문장은 계속되었다.
「내가 소설로 쓸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 살다 보면 진짜 생각지도 못한 불편한 디테일들이 많아. 샤워 시설도 불편하고, 침실에서는 주먹만한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음식은······ 말을 말자.」
6년째도.
「요즘 나도 말투가 이상해지는 거 알아? 무슨 중세시대 귀부인처럼 말한다니까.」
7년째도.
「김독자 경. 대체 언제쯤 오시렵니까?」
8년째도.
「우웩.」
9년째도.
「장난 같아. 인간의 삶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수 있다는 게.」
그때부터, 기록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시간 순서가 일정하지 않았고, 나중에 추가한 듯한 기록들도 군데군데 발견되었다.
「시발」
「김독자 개새끼야」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거지 같은 도깨비 새끼들아」
.
.
「슬슬 내가 이곳에서 살아온 시간이, 지구에서 살았던 시간이랑 맞먹어 가.」
「······그러니까 다음에 보면 누나라고 불러라 알겠냐?」
한수영의 필체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한수영의 것에서, 마치 한수영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가는 느낌으로.
「사실 이 글을 쓰는 건, 내 미래가 어떨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야. 그리고 어쩌면, 이 세계관의 미래도 말이지.」
수십 년은, 성좌들의 입장에서는 짧은 세월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한수영은, 이곳에서 하나의 생을 견뎌내야 했다.
「아마 이 시나리오는 ‘멸살법’에는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도 그럴 게, 우리가 바꾼 이야기가 너무 많잖아.」
우리.
그 오랜 세월을 홀로 겪고도, 너는 아직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건가.
「나마저 손 놓고 있으면 한심한 너랑 유중혁이 이것저것 삽질만 하다가 시나리오 망칠 게 뻔하니까······ 그러니까」
순간 눈앞에 한수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평소처럼 당당하고 야무진 그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거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내 유일한 독자여. 이 이야기는, 망한 시나리오 속에서 살아남은 한 여자의 이야기다.」
목덜미 끝에서부터 서서히 소름이 올라온다.
한수영이 살았던 세월과.
그 분노와, 원한과, 기다림이 맺혀 만들어진 문장.
「네가 이 ‘세 가지 방법’에 알맞은 인물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할 거야.」
그 문장은, 내가 아는 어떤 문장과 몹시도 닮아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읽은 너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
한수영의 후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나는 한참이나 마침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카르도.”
돌아보자,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여자에게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 있었나?”
“······아마도.”
본래 [예상표절]은 1863회차 한수영의 힘이었다.
이 책을 쓴 이번 회차의 한수영 또한, 그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었다.
멸살법을 잃은 내게 주어진 새로운 이정표.
[세계관이 당신들의 대화에 주목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퓨전 판타지’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습니다.]
나는 책의 페이지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지금부터는 필요한 정보를 꼼꼼하게 정독해야 할 시간.
문득, 아까는 대충 넘겨 읽었던 문장이 눈에 띄었다.
「추신. 이 소설은 ‘멸살법’의 2차 창작으로, 어떤 종류의 영리적 목적도 추구하지 않았음.」
피식 웃음이 나온다.
「Episode 1. SSS급 환생자의 탄생」
나는 한수영이 정성껏 쓴 그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취기에 홀려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가듯, 그 문장들을 게걸스럽게 탐미했다. 오직 그것만이, 독자인 내가 이 이야기의 작가에 대해 갖출 수 있는 유일한 예우였으니까.
재밌다, 빌어먹게도.
어떤 대목에서는 ‘멸살법’보다도 더.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가 고개를 들었다.
*
한수영은 말했다.
이 시나리오에는 세 가지 공략법이 있다고.
「세 가지 공략법은, 각자의 장르를 표방한다.」
판타지, 로맨스, 그리고 퓨전 판타지.
「‘역성혁명’ 루트는 ‘판타지’ 장르의 주요 전개다. 만약 이 루트를 택하게 된다면······.」
모든 루트에는 장단점이 있고, 뭔가를 얻으면 반대로 잃는 것들도 있다.
그리고 어떤 루트를 택하든 공통적으로 잃게 되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가장 먼저 잃어버리게 될 것은.
“사, 살려주십시오! 왕자님! 살려주십시오!”
이현성의 인권이다.
“좌로 굴러.”
“으윽, 크으윽!”
“우로 굴러.”
“왕자님······!”
“내가 언제 말대꾸를 명했지?”
유중혁은 군대의 교관처럼 이현성에게 얼차려를 시키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대, 대체 왜 제게 이런 걸 시키시는 겁니까! 4왕자님, 좀 말려주십시오!”
“혹시 뭔가 기억나는 거 없으십니까?”
“으, 으으······ 허리가 너무 아픕니다. 저는 노병이란 말입니다.”
한수영이 [예상표절]로 예상한 루트들을 밟기 위해서는, 이현성의 기억을 되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더 잘 기억하는 법이다.
「아마 이현성에게는 잔혹한 일이 되겠지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한수영의 책에도, 이현성의 시점에서 빌스턴이 살았던 시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현성이 어떤 삶을 살다가 세계에 먹혔는지를 알지 못하는 만큼, 우리가 이현성을 깨우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 또한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 기분이 이상합니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있던 이현성이, 갑자기 헛소리를 시작했다.
“기분이 점점 편안해집니다.”
[등장인물 ‘빌스턴’이 심각한 혼란을 느낍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의 자아가 꿈틀거립니다.]
나와 유중혁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본래라면, 이 정도의 자극으로 이현성의 자아를 깨우는 것은 무리였을 터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내가 있고, 유중혁이 있다.
[당신과 같은 설화를 공유하는 존재들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설화 간의 결속력이 강해집니다!]
지금 이 자리에, <김독자 컴퍼니>는 셋이나 모여 있는 것이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
사람 셋이 모이면 호랑이도 만든다.
우리는 호랑이는 만들지 못하겠지만, 다른 일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성운이 가진 설화들이 ‘세계관’에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이 세계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불러온다든가.
[등장인물 ‘이현성’의 자아가 서서히 눈을 뜹니다.]
이현성의 몸에서 희미한 빛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들을 노려봅니다!]
한수영은 말했다. 결국 이 시나리오는 저 ‘거대 설화’의 통제하에 놓인 세계라고. 그러니 설화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자아를 되찾는 일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으, 으어, 어······.”
천천히 눈을 깜빡인 이현성이, 옹알이를 하듯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도, 독자 씨?”
[세계관이 개연성이 맞지 않는 발언을 제재합니다!]
츠츠츠츠츳!
“우와아아아악!”
스파크에 감전된 이현성이 몸부림을 쳤다.
고개를 돌리자 전투태세를 마친 유중혁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준비는 모두 끝난 것이다.
[흑천마도]를 꺼내든 유중혁이 물었다.
―어떤 루트로 갈 거지?
―늘 우리가 하던 루트.
이번 시나리오의 작가는 한수영이다.
하지만 작가가 훌륭하다고, 작품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공략을 시작하자, 유중혁.
결국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등장인물’이니까.
[당신의 성운에 새로운 ‘거대 설화’가 발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