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376화
―잡아라! 1왕자부터 잡아!
―놈들이 4왕자를 데려간다!
화면 속, 성이 난 환생자들이 화살과 검격을 퍼붓고 있었다.
뿌연 폭연 속을 달리는 두 사내. 유중혁과 김독자였다.
[바앗, 바아아앗!]
허공에서 비유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찹쌀떡처럼 방방 뛰었다.
김독자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화살들. 몇 개의 화살이 정확히 김독자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으나, 1왕자가 재빨리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냈다.
―후퇴하라!
일제히 물러가는 혁명단원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성좌들이 있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카이제닉스 제도’를 응시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명계의 후계자를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답답함에 포효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메시지는 채널 속의 화신들에게 닿지 않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제발 한마디만 전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간접 메시지 발송 허가를 내줄 것을······.]
[바앗. 바아앗.]
비유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채널의 중계 설정권을 가지는 것은 도깨비들이었지만, 이번 ‘환생자들의 섬’은 경우가 특이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만다라의 수호자’를 노려봅니다.]
이번 ‘성마대전’의 시나리오 무대를 제공한 것은 ‘환생자들의 섬’의 주인인 만다라의 수호자.
만다라의 수호자는 직접 시나리오에 참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성마대전’에 한해서, 다른 고위급 도깨비들과 동일한 수준의 시나리오 간섭권을 가진 상태였다.
[어린 천사여, 그것은 불가합니다. 이참에 불교에 귀의한다면 모를까.]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심통을 부립니다.]
[화를 조심하십시오. 화가 많은 이는 후에 그 화에 먹히게 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분통을 터트립니다!]
성좌들이 분통을 터트리든 말든, 만다라의 수호자는 고적한 눈으로 화면 속의 김독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얼굴에서 어떤 심오한 화두라도 탐색하려는 것처럼.
[인근의 채널이 일시적으로 동결됩니다!]
츠츠츠츠츳······.
급작스런 스파크와 함께 허공에서 누군가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만다라의 수호자가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몸이 관리국 도깨비의 출입 허가를 내줬던가요?]
[이번엔 사안이 사안인지라 직접 나왔습니다, 환생자들의 왕이시여.]
나타난 이는 상급 도깨비 비형이었다.
비형은 예의 바르게 불가의 예를 취한 뒤, 곧장 질문을 시작했다.
[부처에겐 열 가지 이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존, 석존, 석가, 여래, 불타, 붓다······ 그대는 그중 누구입니까?]
비형의 말에 만다라의 수호자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만다라의 수호자.
그는 자신이 가진 이름에 따라 다른 존재로 화한다.
[이 몸은 석존(釋尊)입니다.]
[석존, <김독자 컴퍼니>에 적용된 비정상적인 시나리오의 발동을 취소해주십시오.]
[약속과 다르군요. 이 몸에게 예비 시나리오의 통제권을 넘기지 않았습니까?]
[불가는 이번 성마대전에서 중립이 요구되어 있을 텐데요.]
비형의 예리한 시선이 석존을 향했다. 시선에 가만히 대응하던 무승의 동공 속에서 만다라의 회전 방향이 뒤바뀌었다.
[글쎄, 중립을 어긴 쪽은 이 몸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최근 특정 성운의 화신들을 편애하는 상급 도깨비가 있다더군요.]
석존의 의뭉스런 말투에, 통 튀어 오른 비유가 말랑말랑한 배를 비형의 머리 위에 걸쳤다.
[당신이 이곳에 온 것은 관리국의 의사입니까, 본인의 의사입니까?]
슬그머니 입술을 깨문 비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면 속에서 폭연을 뚫고 달아나는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들에게 내준 시련은 과합니다. 성좌들 기준에서는 찰나이지만, 인간의 기준에서는 생애에 달하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이 몸 역시 한때는 인간이었습니다. 이것은 필요한 시나리오입니다. 저들이 정말로 ■■에 도달하고 싶다면 말이지요.]
[······석존.]
[도깨비여, 곧 최후의 축제가 시작될 겁니다.]
석존의 동공 속에서 만다라가 회전했다. 회전하는 만다라 위로, 김독자와 유중혁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당신은 어떤 ■■에 투표할 겁니까?]
*
나는 유중혁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알현실을 탈출했다. 근위대의 추격은 집요했으나, 혁명단원 몇 명의 희생 끝에 나는 유중혁과 안전한 피난처로 대피할 수 있었다.
유중혁은 기절한 빌스턴― 그러니까 이현성의 빙의체를 바닥에 내던지며 입을 열었다.
“네놈은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지?”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야.”
[세계관이 당신들의 대화를 의심합니다.]
[‘한낮의 밀회’를 발동합니다!]
유중혁은 특유의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2년 전이다.
나는 차분히 유중혁의 이야기를 들었다.
갑자기 제도 카이제닉스의 제1 왕자가 되었고.
역시나 갑작스런 왕위 찬탈이 발생했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 폭동의 한가운데에 갑작스레 내던져져 생존 활동을 시작했다.
왕성을 탈출하고, 혁명단을 꾸렸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을 찾아다녔다.
―내가 왔을 때 이현성과 정희원, 그리고 한수영은 이미 저런 상태였다.
―그 셋이 전부야? 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 이곳으로 소환된 일행은 저들이 전부다.
유중혁은 [현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등장인물 일람]보다 더 상세한 정보를 엿볼 수 있는 스킬. 녀석은 그 스킬로 지금껏 일행들을 찾아왔을 것이다. 나를 발견한 것도 비슷한 이치였겠지. 나는 [현자의 눈]에 탐색되지 않으니까.
나는 쓰러진 이현성을 내려다보았다.
유중혁은 2년 전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현성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세계관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다들 거대 설화에 먹힌 거겠지?
―아마도.
―넌 아무렇지도 않냐?
―겨우 몇 년의 세월로 나를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새삼 유중혁이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깨닫는다.
그 든든한 이현성도, 독한 정희원도, 심지어는 저 한수영까지 무너졌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화신 ‘유중혁’을 못마땅하게 쏘아봅니다.]
그런데 유중혁은 끄떡도 없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관의 ‘거대 설화’가 우리를 무너트리는 방식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유중혁은 이 세계의 누구보다 시간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존재였다. 그는 이미 수백 년의 암흑 단층 속에서 고련을 거듭한 적도 있으니까.
[세계관이 당신들의 오랜 침묵에 의아함을 표합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나리오는 세계관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아마 유중혁도,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눈치챈 듯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입을 열었다.
“형.”
유중혁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딴 표정 짓지 마. 이번 시나리오 한정이니까. 나라고 뭐 좋은 줄 아냐?
용암처럼 이글거리던 유중혁의 동공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자식, 고생 좀 할거다.
리카르도의 기억이 맞다면 본래 1왕자의 설정은 ‘다정하고 온화한 큰형’이니까.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말해라. 리카르도.”
“이제 어떡할 거야? 보아하니 혁명도 실패한 거 같은데. 아니, 애초에 사형장엔 왜 나타난 거야?”
“왕을 죽일 생각이었다.”
[등장인물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가 동요합니다.]
아마 저건 진심일 것이다.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시도할 법도 하니까.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방식이 아니다.
“그런 짓 해도 돼? 원래 형의 아내였잖아.”
“정확히는 그럴 예정이었던 여자지. 왕위 찬탈이 발생한 것은 결혼식 첫날이었으니까.”
그렇군. 그런 식의 전개였나.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한수영과 유중혁이 커플이라니, <김독자 컴퍼니>는 아직 사내 연애를 허용한 적 없다고.
뜻밖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세계관이 당신들의 발언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로맨스’ 쪽으로 약간 기울었습니다.]
······장르가 기울어?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어차피 구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녀석은 타락한 마법에 물들어 본래 자신의 인격을 잃었다.”
어쭈?
[세계관이 화신 유중혁의 발언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판타지’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었습니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눈짓을 주었다.
―너도 들리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네놈도 나도 너무 늦었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아직 늦지 않았어. 어쨌든 우리 편이 둘은 있잖아.”
나는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는 빌스턴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셋.”
“그 셋이 전부다.”
“혹시 알아? 더 있을지도.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가 우리를 도와줄지도 모르잖아.”
[세계관이 당신의 발언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장르가 ‘퓨전 판타지’의 가능성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 시나리오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브 시나리오― ‘장르 선택’의 선택 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시나리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시나리오를 확인했다.
+
<서브 시나리오 ―장르 선택>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당신이 소환된 세계관은 ‘성마대전’에 참가할 수 있는 세계관입니다. 당신이 속한 세계관의 ‘장르’를 선택하여 세계관의 결말을 유도하십시오. 결말을 본 세계관은 ‘성마대전’의 참전권을 획득합니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성마대전 참전, 300,000코인, ???
실패시 : ‘환생자들의 섬’에 존재 귀속.
+
<현재 선택 가능한 장르 목록>
1. 로맨스
2. 판타지
3. 퓨전 판타지
* 해당 장르에 어울리는 행동을 지속할수록 장르의 속성이 강해집니다.
+
“······이런 식이었군.”
고개를 들자 유중혁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충 어떤 식으로 시나리오를 전개해야 할지 감이 온다.
문제는, 어떤 ‘장르’가 옳은 방향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정보가 너무 없어. 이 세계의 본래 전개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떤 세계관을 택했을 때 어떤 결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모든 일행을 살려서 다음 시나리오로 떠나는 것.
만약, 내가 어떤 장르를 택한 대가로 누군가가 죽어버린다면?
유중혁이 물었다.
―네놈의 잘난 책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지?
나는 움찔했다가 대답했다.
―회귀자인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알겠냐.
―나는 안다.
―뭐? 알긴 뭘 알아?
―이 시나리오의 전개.
나는 깜짝 놀라 녀석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이 이 시나리오의 전개를 알고 있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3회차의 유중혁은 이 시나리오를 겪은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책을 읽었다.
―무슨 책?
순간 ‘멸살법’을 얘기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멸살법’에도, 이 시나리오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쓴 일기를 읽었다. 그 회차의 한수영도 이 시나리오를 거친 적이 있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네가 그 일기를 왜 가지고 있는데?
―특수한 방법을 통해 손에 넣었다.
나는 유중혁을 잠시 노려보았다.
이거, 뭔가 좀 복잡한 배신감이 느껴지는데.
1863회차의 한수영은, 이 시나리오에 대한 정보를 내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왜일까. 내가 이 시나리오에 대해 알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 엿 먹어보라고?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그런 정보를 갖고 있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인마. 그래서, 1863회차의 한수영은 여길 어떻게 클리어했대?
어쨌거나 이 시나리오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정보가 있다는 것은, 정해진 공략 루트가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유중혁의 표정은 어두웠다.
―이미 이 세계는 본래의 공략 루트에서 벗어났다.
―무슨 소리야?
―본래 이 세계에 ‘왕위 찬탈’ 같은 사건은 없었다. 지금의 왕이 ‘왕’이 되는 사건 같은 건, 일어난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럼······.
―우리가 이 세계에 오기도 전에, 누군가가 이야기의 전개를 바꿨다.
당혹스러웠다.
회귀자인 유중혁도, ‘멸살법’의 독자인 나도 앞의 전개를 알 수 없는 상황. 지금까지도 ‘멸살법’의 전개와 어긋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앞이 짐작되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멸살법’에는 이런 시나리오에 대한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역 시 최종 본을 읽 어야 했 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 것은 그때였다.
“들어오라.”
유중혁의 말과 동시에 벌컥 열린 문으로 혁명단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늙수그레한 한 사내를 포박하고 있었다.
“왕의 밀사입니다. 단장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사내는 내가 처음으로 빙의했을 때 물을 건넸던 집사였다.
바들바들 콧수염을 떨던 집사가 우리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1왕자님, 그리고 4왕자님······. 폐, 폐하께서 전하시라 한 물건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40년 전의 폐하께서······.”
······40년 전?
유중혁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집사는 품속을 뒤져 우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폭망한 시나리오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 한수영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