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378화 제도 카이제닉스의 근위대장 에리히 스트라이커. 명실공히 제도 최강의 기사이자, 왕의 첫 번째 검. 그런 그녀를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만든 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련이었다. 슈아악! 침묵이 내려앉은 연무장의 밤을, 에리히는 베고 또 베었다. 후두둑 땀방울이 떨어졌다. 떨어진 땀방울을 보며, 에리히는 그것이 누군가의 핏방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놓쳤다. 그것도 폐하가 보는 앞에서.’ 1왕자의 난. 그저께 있었던 알현실 습격 사건을, 호사가들은 벌써 멋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노래를 지어 부르는 음유시인도 있었다. 대부분은 1왕자를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오오 위대한 혁명가 슈바이첸 폰 카이제닉스」 「그 드넓은 어깨와 등을 보라」 환한 빛살이 검무장의 어둠을 갈랐다. 1왕자와 함께 달아나던 4왕자의 얄미운 얼굴이 떠올랐다. 어둠을 베고 또 베어내도 사라지지 않는 얼굴. 기묘한 것은, 그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무척 미묘한 감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멀어지는 1왕자 슈바이첸과 4왕자 리카르도, 그리고 빌스턴 프레이머의 뒷모습. 그 셋의 뒷모습을 본 순간, 에리히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에리히는 검을 휘둘렀다. 늘 그랬듯,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 상념을 털어버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오늘의 수련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습격인가.’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호리호리한 그림자. 에리히는 허리에 차고 있던 진검을 곧장 뽑아 들었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순간 바로 베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저쪽에서 먼저 인기척을 드러냈다. “검을 넣으시지요, 저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 사이로,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이 제도의 4왕자. 에리히가 외쳤다. “제정신인가? 무슨 배짱으로 여길 찾아온 거지?” “세계가 바뀌어도 여전히 검을 좋아하시는군요.” 살벌한 기세를 풍긴 에리히가 검을 곧추세우자, 4왕자는 자신의 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리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꿍꿍이지?” “어차피 10분만 지나면 근위병들이 달려와서 저를 포위할 테고, 또 경의 실력이라면 저를 제압하는 것쯤 힘든 일도 아니겠지요.” “그래서?” “순순히 항복하겠습니다. 경에게 체포되어, 사형장으로 가겠다는 얘기입니다.” 평소 4왕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1왕자의 도움으로 탈출한 것이 바로 엊그제인데, 제 발로 들어와서 사형을 당하겠다고? 에리히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4왕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4왕자는 정말로 비무장 상태였다. 에리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4왕자를 포박했다. 달빛을 받아 천진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대신, 10분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죽을 사람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으시면 나중에 찜찜하실 겁니다.” 에리히는 복잡한 얼굴로 4왕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면 듣지 않겠다.” 4왕자의 죄가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제 제도의 왕은 바뀌었고, 에리히는 새로운 왕을 모시는 근위대장이었다. 4왕자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솔직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내가 아는 당신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짐작도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런 그 서두에, 당황한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수작인가? 4왕자가 교묘한 말솜씨로 여인들을 꾄다는 것은 제도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오래전,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4왕자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다. “검도를 좋아해서 구 대표로 대회에도 참가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던 여인이었지요.” 희미한 통증과 함께, 알 수 없는 감각이 머릿속을 쿡쿡 찔렀다. “그 검으로, 그녀는 소중한 전우들을 몇 번이나 구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무엇. “시나리오의 불의에 맞서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고, 그 검으로 저를 지켜주기도 했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는 오직 폐하의 검이다.” 4왕자가 애석하다는 듯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리카르도 왕자님. 제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4왕자를 포박하던 에리히가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둠 속에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에리히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역시 함정이었군.” “함정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사내는 빌스턴 프레이머였다. 이 제도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기사. “에리히 경.” 빌스턴이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깜짝 놀란 에리히가 경고했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4왕자의 목을 베겠다.” 이것은 함정이다. 달아나야만 한다. 에리히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무장의 출구를 살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당신과 관계된 설화들이 일제히 날뛰기 시작합니다!] 마치 굳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당신의 설화들이 ‘카이제닉스 제도’의 통제에 반발합니다!] “우리, 잊지 않기로 했잖습니까.” 슬픈 눈으로 그녀를 보는 빌스턴. 아니······ 그의 이름은······. [당신과 관계된 설화들이 오래된 기억들을 반추합니다.] “희원 씨.” [잊힌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순간, 세계가 무너졌다. 흘러내린 설화가 에리히의 기억을 덮었다. 그것은 사라진 10년의 이야기. 아직 에리히가 에리히가 아니고, 빌스턴이 빌스턴이 아닌 시절의 이야기였다. * 이현성과 정희원이 이 세계에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이었다. “현성 씨! 역시 현성 씨 맞죠?” “엇, 희원 씨?” 츠츠츠츠츳······! 비슷한 시기에 이 세계로 빙의한 두 사람은, 운 좋게 일찍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여기서는 [전음]을 써야 할 것 같아요. 둘은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차근차근 모아갔다. 이곳이 ‘성마대전’에 참가하기 위한 마지막 예비 무대라는 것.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시차를 두고 이곳에 소환되는 중이라는 것. 그리고, 정해진 배역이 모두 모이기 전에 시나리오는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나저나, 현성 씨는 비슷한 사람한테 빙의했네요. ―희원 씨도 무척 잘 어울리십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세계는 그들의 자아를 갉아 먹는다는 것.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의 행위를 감시합니다.] [세계의 개연성이 당신의 배역을 강요합니다.] 거대 설화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둘은 설화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배역을 연기해야 했다. ―아무래도 수영 씨는 다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되는 걸까요? ―분명 그 전에 독자 씨가 올 거라 믿습니다.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지혜랑 아이들은 잘 있을까요? ―그 아이들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은 단 둘뿐. [설화, ‘가장 순수한 전우애’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를 모르는 곳에서, 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눠야만 했다. 까가강! “에리히 경! 해치워버리십시오!” “갑시다! 빌스턴 경!” 두 사람이 배역상의 라이벌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발로였다. 서로 붙어 있을 기회를 늘려야, [전음]을 사용할 기회도 늘어나는 까닭이었다. ―검술이 많이 느셨네요. ‘강철검제’라는 이름에 딱인데요? ―돌아가면 독자 씨에게 검을 하나 사달라고 해야겠습니다. 검이 마주칠 때마다 전음이 오간다. ―이러다 독자 씨 올 때쯤이면 소드마스터 되어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른 소속을 갖게 되었다. 이현성은 4왕자 리카르도의 파벌로. 정희원은 ‘검은 마법사’의 휘하로. 소속이 달라지자 겪는 환경도 달라졌다. 둘은 전처럼 자주 검을 나눌 수 없게 되었고, 정희원이나 이현성이 아닌 ‘에리히 스트라이커’나 ‘빌스턴 프레이머’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에리히 스트라이커처럼 밥을 먹고, 빌스턴 프레이머처럼 말했다. 자신과 다른 것들이 쌓여가는 과정에서, 이현성과 정희원은 조금씩 뭔가를 잊어갔다. 둘은, 조금씩 ‘제도 카이제닉스’의 등장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 번은, 술을 마신 정희원이 이현성을 찾아와 말했다. ―난 끔찍한 인간이에요 현성 씨.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그래서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동안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금호역에서 모녀······, 기억해요? 우리랑 같이 철두파에 맞서 싸웠던. ―······기억합니다. 암흑성에서도 만났었지요. 이현성은 금호역의 모녀를 떠올렸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엄마와, 그런 엄마의 손을 잡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 암흑성에서 아이의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고, 홀로 남은 여자아이는 방랑자들의 손에 맡겨졌다. ―둘 다 살 수도 있었어요. 내가 ‘낙원’의 정체를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희원 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보다 더 작은 설화들도 있었잖아요. 어쩌면, 설화조차 되지 못한 설화들이. 취한 정희원이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맺힌 설화의 잔재들이 하얗게 빛났다. 모두, 그녀가 쌓아온 이야기였다. <김독자 컴퍼니>의 일원으로, 위대한 성좌들과 맞서 싸우며 만들어 온 이야기. 정희원은 그 이야기를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의 삶에 떳떳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모아온 설화들은, 전부 그런 작은 설화들을 짓밟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요. ―희원 씨. ―그리고, 이젠 우리 차례가 된 건지도 몰라요. 4년, 그리고 5년이 지났다. 정희원과 이현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근데 유승이랑 길영이 성씨가 뭐였죠? ―이유승, 신길영······ 아닙니까?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기억들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렇게 6년이 지났고. ―독자 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제 생각엔 올해 안에 오실 것 같습니다. 7년이 지났다. ―7년이나 임금을 체불하다니, 완전 악덕 기업 아니에요? ―나중에 꼭 노조를 설립합시다. ―꼭 그렇게 해요. 잊지 말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던 약속은 한 달에 한 번이 되었고, 이내는 두 달에 한 번이 되었다. 만나서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날들도 많아졌다. 그리고 8년이 되던 어느 날, 정희원은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뭔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요? 이현성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있잖아요, 현성 씨. 만약 내가 현성 씨를 잊게 되면.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날 죽여줘요. 그리고 그것이 정희원과 이현성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얼마 후, ‘검은 마법사’가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현성은 옛 왕조의 편에 서서 정희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희원 씨. 허공에서 몇 번이고 둘의 검이 부딪쳤다. 눈부신 검광 속에서 이현성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다. 검술 대련과는 확연히 다른 궤적들. 명백하게 이현성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검격. ―희원 씨. 반복된 [전음]에도, 정희원은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마치 이제까지는 봐주고 있었다는 것처럼, 에리히의 무자비한 검이 이현성을 갈랐다. 까마득해지는 시야. 이현성은 비틀거리면서도 그가 기억하는 정희원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침내 가까워진 정희원의 두 눈을 보며, 이현성은 오랫동안 자신이 하지 못했던 말을, 그리고 앞으로도 할 수 없을 말을 처음으로 건넸다. ―좋아합니다, 희원 씨. * [설화, ‘가장 순수한 전우애’가 이야기를 마칩니다.] 나는 묵묵히 설화를 읽었다. 어떤 문장은 잔잔히 슬펐고, 어떤 부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등장인물 ‘정희원’의 자아가 조금씩 깨어납니다.] 빌스턴과 에리히의 몸 위로 희미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영혼이 설화에 공명하는 것이 느껴졌다. 쓰러진 채 미소를 짓고 있는 이현성.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사내 규정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이걸로 두 번째 목적도 달성했다. 이제 다음은······. “저쪽이다!” “에리히 경이 위험하다!” 유중혁이 쓰러진 정희원과 이현성을 양팔에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채 달아나기도 전에, 검무장의 문이 열리며 근위대가 들이닥쳤다. 그런데 근위대만 온 것이 아니었다. 도열한 근위대를 가르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카이제닉스 제도 최초의 트리플 마스터」 「만 18세의 나이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천재」 「최연소 9서클 대마법사」 「사악한 검은 용을 부리는 제도의 왕」 현시점의 카이제닉스 제도에서, 저 녀석을 당해낼 이는 아무도 없다. 은빛의 크라운을 쓴 왕이 고요히 웃었다. “감히 짐의 기사를 훔쳐 가려 하는가?” 근위대가 일제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표정이 굳어진 유중혁이 메시지를 보냈다. ―계획과는 달라졌군.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우리의 다음 목표는 한수영이다. 이곳의 <김독자 컴퍼니>는 넷. 성운의 설화는, 성운의 구성원들이 많이 모일수록 강해진다. 나는 왕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저희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분명 저 왕의 안에는, 한수영의 자아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저 등장인물로부터 한수영의 자아를 돌려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우리의 설화를 이용해······. “알고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러 온 것이겠지.” 나는 흠칫 놀라 녀석을 바라보았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향해 조소합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짐도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짐은 듣는 것보다는 이야기하는 쪽을 더 좋아하지. 그러니 귀를 열고 잘 듣거라.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활짝 팔을 벌린 왕이, 나를 향해 웃었다. “아니, ‘구원의 마왕’ 김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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