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375화
알현실로 이동하는 내내, 나는 빌스턴에게 말을 걸었다.
“빌스턴 경. 혹시 뭔갈 자주 잃어버리시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탄피······.”
“예?”
[세계관에 맞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여······.]
“그러니까, 휴대용 마법 폭탄을 잃어버렸다든가······.”
“제가 그런 한심한 얼간이로 보이십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 경직된 걸음걸이나 탄탄한 흉근, 얼빵한 표정을 보면 이현성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등장인물 일람’에 따르면 이 자는 이현성이 아니라 이 세계관의 인물인 ‘빌스턴 프레이머’였다.
나는 등장인물 일람의 ‘종합 평가’ 항목을 다시 읽어 보았다.
―한때 이 육신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았습니다. 그는 왕국의 기사였고, 동시에 누군가의 방패였습니다.
‘왕국의 기사’는 본래 몸의 주인인 ‘빌스턴 프레이머’를 말하는 것일 테고, ‘방패’는 분명 이현성을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방패는 자신의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그 방패의 주인이 나타났으나, 이제 방패는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목이다. 이현성이 다른 일행들을 기다렸다는 것은 알겠다.
문제는 숫자다. 종합 평가의 ‘오랜 시간’이라는 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말하는 것일까.
“왕자님?”
둔한 눈으로 나를 보는 사내를 보며, 나는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현재 상황에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둘뿐이었다.
하나, 이현성은 나보다 먼저 시나리오에 투입되었다.
둘, 이현성은 이 세계의 거대 설화에 먹혀 자아가 사라졌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향해 입맛을 다십니다.]
[‘제4의 벽’이 ‘카이제닉스 제도’를 노려봅니다.]
그렇다면, [제4의 벽]을 가지지 않은 다른 인물들은 모두 이현성처럼 되어버린 것인가?
“왕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는 빌스턴의 큼지막한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인물은 분명 이현성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미안합니다, 빌스턴 경.”
“예? 갑자기 무슨······.”
“그간 너무 고생만 시킨 것 같습니다. 절 지키시느라 힘드셨던 것 알고 있습니다.”
이건 빌스턴 프레이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챙겨드리지 못했지요. 몇 번이나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이번 시나리오까지 오는 내내, 이현성에겐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다.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시나리오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순번이 늘 밀려났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함께 싸운 설화들이 우리를 대신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빌스턴은 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코를 훔치며 회랑 바깥의 정경을 내다보았다.
“왕자님은 정말 마음이 따뜻하시군요.”
[등장인물 ‘빌스턴 프레이머’가 당신에게 감동합니다.]
······내가 감동시키고 싶은 건 그쪽이 아닌데 말이지.
우리는 말없이 회랑을 거닐었다.
회랑의 통로에는 역대 왕의 초상들이 차례로 걸려 있었다. 개중에서도 눈에 띈 것은, 폭풍 속에서 부러진 검을 치켜든 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초대 가주, 폭풍왕 율리시즈 카이제닉스 1세.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저도, 평생 왕자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빌스턴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멀찍이 보이는 성채의 흉벽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기억하십니까? 왕자님이 아직 7살이시던 무렵, 저는 왕자님을 잃을 뻔했습니다.”
“······음?”
“성채 흉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계셨던 왕자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합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왕자님이 13살이 되셨을 때 뒷간에 가셨다가······.”
아니 이 양반······ 이현성이랑 너무 비슷하잖아.
“그런데 왕자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미천한 이몸을 걱정하시니······.”
“마지막 순간이라뇨?”
빌스턴은 슬픈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내 시선을 피했다.
“······도착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어느새 알현실의 문이 눈앞에 있었다. 문이 열리자, 로드 카펫을 중심으로 도열한 근위대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근위대의 중심에, 은빛의 크레스트를 쓴 근위대장이 서 있었다.
“빌스턴 경, 왜 이렇게 늦었나?”
“왕자님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소이다.”
대화에 태클을 걸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분위기 때문에 좀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눈시울을 붉히던 빌스턴이 근엄한 기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근위대장이 말했다.
“작별 인사라. 대역죄인 주제에 사치를 누리는구나.”
“말조심하시오.”
두 사람이 동시에 전투태세를 취했다.
빌스턴은 바스타드 소드를 꺼냈고, 근위대장은······ 어?
······왜 저 사람이 저 칼을 가지고 있지?
근위대장이 쥔 검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검이었다.
왜냐하면 그 검은, 내가 손수 재료를 모아 누군가에게 만들어 준 검이었으니까.
[심판자의 검].
“빌스턴 경. 왕자와 함께 형장의 이슬이 되고 싶은 건가?”
투구 너머로 일렁이는 근위대장의 붉은 눈동자.
「“왕이시여······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소서······.”」
「“독자 씨, 또 혼자 하려고 하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는 저 사람을 알고 있다.
“멈추십시오!”
내 외침에 기세를 끌어 올리던 빌스턴이 물러서자, 살벌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근위대장이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근위대장은 정희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에리히 스트라이커 (???)
나이 : 37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전용 특성 : 충신, 소드마스터
전용 스킬 : [귀살 Lv.10], [제도 왕가 검술 Lv.10]······.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75], [근력Lv.80], [민첩Lv.90], [마력Lv.70]
종합 평가 : 한때 이 육신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았습니다. 그는 왕국의 근위대장이었고, 누군가의 검이었습니다. 검은 방패와 함께 오랜 세월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검은 마침내 자신이 기다리던 이를 만났으나, 이제 검은 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
빌어먹을, 정희원마저 이런 상태인 건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던 근위대장이 말했다.
“왕자가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군. 근위병들은 죄인을 포박해라.”
······포박?
나는 반항할 틈도 없이 근위병들에게 붙잡혔다. 애초에 평균 능력치 10의 몸으로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렬한 근위병들의 너머로 단두대가 보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시나리오는, 나의 사형식으로 시작하는 모양이다.
*
한때 내가 읽은 소설 중에는, 소위 ‘불한당물’이라는 장르가 있었다.
왕가나 귀족가의 불한당 막내로 태어난 주인공이 온갖 기연을 얻게 되며 개과천선하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
보통 그런 이야기는 시작이 비슷하다.
「카이제닉스 왕가는 몰락했다.」
시작부터 가문이 몰락하거나.
「제도의 왕은 자신이 아끼던 각료의 검에 찔려 사망했다.」
부모와 친지가 죽으며 위기에 빠진다.
「검술에 능했던 둘째 왕자와 마법에 능했던 셋째 왕자는, 찬탈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아니, 그런 중요한 기억이 이제야 떠오르면 어쩌자는 건데.
“죄인을 인도하겠다.”
덕분에, 나는 멍청하게 제 발로 사형장까지 찾아온 꼴이 되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
이 망나니가 왜 자살을 했나 했더니. 사형당하기 싫어서 그런 거였나?
근위대에게 붙잡힌 빌스턴이 나를 애타게 불렀다.
“왕자님! 리카르도 왕자님!”
나는 근위대장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 사형대를 향해 질질 끌려갔다.
정희원이 의식이 있었더라면 굉장히 재미있는 광경이었을 텐데.
내 목에 딱 알맞게 설계된 받침대가 보인다.
이제 조금 후면 나는 저 사형대에 올라 목이 잘리겠지.
그리고 내가 죽으면, 이번 시나리오는 실패할 것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나는 근위대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 이럴 겁니까?”
근위대장이 피식 웃었다.
“이제 와 죽는 게 두려워진 모양이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제 검이 되어주기로 하셨잖습니까.”
근위대장의 표정에 희미한 당혹감이 어렸다.
“무슨 헛소리지?”
“벌써 맹세를 잊으신 겁니까? 저와 함께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을 보겠다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등장인물 ‘에리히 스트라이커’가 당신에게 미약한 혼란을 느낍니다.]
“죽을 때가 되니 헛소리를 하는군.”
이현성과 마찬가지로, 정희원의 자아 또한 쉽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차가운 나무 받침의 감촉이 내 목젖을 감쌌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휘장이 갈라지는 소리. 적막이 내려앉은 알현실을 누군가가 걸어 오고 있었다. 고고하고 가볍지만, 묵직한 걸음걸이. 그 걸음을 반주 삼아, 리카르도의 기억이 노래처럼 들려왔다.
「아버지와 형들의 원수.」
「제도 카이제닉스의 검은 마법사.」
「왕 살해자.」
「그리고······.」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내가, 사랑했던 여인.」
“죄인은 고개를 들라.”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곳에 키 작은 왕이 서 있었다. 은색의 자수가 놓인 중세풍의 검정색 클로크에 말끔한 타이츠.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느냐?”
나는 멍하니 왕을 바라보다가 입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해당 인물의 정보가 일부만 출력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
나이 : 50세
종합 평가 : 해당 인물?에 대한? 종합 평가?가 준비 중?입니다.
+
왕의 정보는 제대로 출력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
인물 정보에 표기된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왕의 얼굴을, 나는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이현성이나 정희원은 본래부터 ‘멸살법’의 등장인물이었다.
하지만, 등장인물이 아닌 존재라면 어떨까.
나처럼 소설의 등장인물이 아니었던 존재라면.
나는 그런 기대를 했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느냐 물었다.”
그 녀석이라면,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김독자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라는 사실을.」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직전, 눈앞에 떠올랐던 최종본의 글귀.
그건 이런 의미였던 건가.
“있습니다.”
“죄인은 말하라.”
“내가······.”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수영아.”
츠츠츠츠츳!
세계관의 개연성에 맞지 않는 발언에 강렬한 스파크가 내 전신을 휘감았다.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한수영은 내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미동도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 그 아래로 보이는 눈물점. 늘 장난처럼 나를 놀리던 입술이 이윽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형을 집행하라.”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물론 이유는 있다.
「본섬의 모든 시나리오는 ‘3세대 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내 생각이 맞다면,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는 결코 이런 식으로 죽지 않을 것이다.
콰아아아앙!
궁의 한쪽 벽면이 폭발한 것과 내리꽂히던 단두대가 작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뿌연 먼지 속에서 부서진 길로틴의 칼날이 보였다.
“혁명단이다!”
“모두 폐하를 보호하라!”
소란 속에서 근위대의 고함이 들려왔다. 알현실은 순식간에 신음과 비명이 뒤섞인 아비규환이 되었다.
“망할! 1왕자다!”
“막아! 놈을 막아라!”
제도 카이제닉스의 제 1왕자.
리카르도의 친형이자, 검술과 마법, 지식에 모두 능통한 인물.
“내 동생을 구하러 왔다.”
벅차오르는 고양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검격이 알현실을 수놓자, 달려들던 근위병들이 부러진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세계관이 변하고, 시나리오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인물도 있다.
이 세계선을 모두 뒤져도 아마 하나뿐일 것이다.
나는 반쯤 열리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피 끓는 전투를 좋아합니다.]
내 동료들은 모두 나를 잊었다.
아마 저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어쩌면 그에겐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순간, 1왕자의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네놈, 김독자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