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374화
50년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무승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보였다.
―보살이여, 시간을 견뎌 보십시오.
[본섬으로 전송을 시작합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당신의 설화 정보를 조사합니다!]
[조사가 끝났습니다.]
[당신과 동료들의 시나리오 지역이 결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들은 것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였다.
[서브 시나리오― ‘장르 선택’이 시작됩니다!]
*
투명한 컵 안에 담긴 새카만 액체를 들여다보며, 리카르도는 오래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50년을 수련해도 궁정 마법사가 되기는 무리일 겁니다.”」
처음으로 마법을 배웠을 때.
「“현사가 되기에 적합한 체질은 아니군요.”」
카이제닉스 제도 제일의 현자에게 수업을 들었을 때.
「“검을 잡기에는 불리한 손입니다.”」
그리고 왕정 검술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검을 잡았을 때도.
「“어떤 인생은 그런 법이다. 중요한 것은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거야.”」
리카르도의 아버지, 베르첸 폰 카이제닉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위로가 안 되었다. 재능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듣는다고 무슨 위안을 받겠는가.
재능이 없어도 꿋꿋이 나아가라고? 그렇게 살아서 결국 뭐가 될 수 있는데?
리카르도는 매일 술을 마셨다. 제도의 불한당들과 몰려다니며 마약을 하고, 도박에 빠져 가문의 자산을 탕진했다.
사랑도 했다. 한때는.
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상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이 그의 큰 형과 결혼하면서 사랑도 끝났다.
잔 속의 액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리카르도가 중얼거렸다.
“죽자.”
그것은 생애 처음으로 낸 용기였다.
가볍게 잔을 쥐고, 포도주를 삼키듯 잔을 말끔히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효과가 나타났다.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물들고, 리카르도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네 시간 뒤.
누군가가 리카르도의 몸으로 눈을 떴다.
*
나는 ‘멸살법’ 외에도 제법 많은 이야기들을 읽었다. 어렸을 적엔 어머니가 추천해 준 양서들을 읽었고, 조금 머리가 큰 후에는 내가 직접 책들을 골라 읽었다.
참고로 내가 처음으로 읽은 웹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불행을 조잘거리며 죽었다 깨어나면서 시작한다.
바로 지금처럼.
“웨에에에엑!”
“리카르도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렸고, 나는 한참이나 토사물을 게워냈다.
입을 닦고 고개를 들자 거울이 있었다.
전면에 보이는 창백하고 훤칠한, 잘생긴 얼굴.
······분명 내 얼굴인데, 뭔가 낯설었다.
나는 누구지?
······리카르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냐. 오히려 그런 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지.”」
나는.
「“나는 구원의 마왕도 아니고. 왕이 없는 세계의 왕도 아냐.”」
······나는?
「“스물여덟······ 아니, 스물여덟 살이었고, 게임 회사의 직원이었어. 취미는 웹소설 읽기······.”」
[당신의 설화들이 세계관을 이루는 거대 설화에 저항합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자, 세계가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4의 벽’이 당신의 인물 몰입을 저해합니다.]
[‘제4의 벽’의 효과로 당신의 자아가 온전히 보존됩니다.]
[섬의 개연성이 당신의 특혜를 의심합니다.]
낯선 신체의 감각.
이것은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김독자다.」
정신이 훅 돌아오며, 일련의 기억들이 정리되었다.
나는 ‘성마대전’ 시나리오에 참가했고, 이제 막 본섬에 진입했다.
본섬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3세대의 설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설화들은 모두 다른 장르의 세계관을 이루는데,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는 이 광경은······.
“······빙의물.”
츠츠츠츠츠츳!
[세계관에 맞지 않는 발언이 적발되었습니다!]
[제재가 시작됩니다!]
내가 다시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 후의 일이었다.
*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저, 물 좀 주세요.”
[세계관에 맞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페널티가 부과······.]
“물 좀 주시오.”
“여기 있습니다.”
벌컥벌컥 냉수를 마시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드문드문 밀려오는 타인의 기억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이미 30년이나 살아온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본섬’의 일부 지역에서는 해당 세계관에 맞지 않는 발언이 금지된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멸살법’의 내용들이 있었다. 지나가듯 서술된 회차였지만, 분명 ‘멸살법’에도 이런 시나리오에 대한 언급이 분명 있었다.
소위 ‘빙의 시나리오’.
나는 ‘성마대전’에서 이 인물의 시점으로 시나리오를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해당 지역에서는 도깨비의 호출이 불가능합니다.]
[해당 지역에서는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이상한 제약들까지 걸려 있다.
본래 내가 알고 있는 ‘성마대전’과는 다른 전개였다.
“······일단 정보부터 좀 수집해야겠는데.”
[인물 특성에 알맞은 행위를 하였습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나는 곧바로 ‘멸살법’의 기억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이제닉스 제도. 성마도시대를 이끈 영웅들의 섬.」
별달리 참고할 만한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필이면 ‘멸살법’에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지역.
그렇다고 완전히 낯선 장소도 아닌 것 같은데······.
빙의 인물의 기억이 내게 흘러들어왔기 때문일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하였습니다!]
본래 나는 내 특성창은 볼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빙의한 대상의 특성창이라면······.
+
<인물 정보>
이름 :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김독자)
나이 : 31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현재 1개의 성좌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용 특성 : 천부적 불한당
전용 스킬 : [왕족의 외모 Lv.3], [독백 Lv.6], [역할극 Lv.5]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10], [근력Lv.10], [민첩Lv.10], [마력Lv.10]
종합 평가 : 당신이 빙의한 인물은 카이제닉스 제도의 제4 왕자입니다. 안타깝게도 검술, 마법 및 모든 종류의 전투 재능에 자질이 없습니다.
* 현재 상태 이상 ‘빙의’에 걸려 있습니다.
+
······왜 하필 이런 인물에 빙의를 한 걸까.
분명 시나리오 메시지는 내가 ‘나와 관련이 있는 인물’에 이입을 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와 망나니 왕자 사이에 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자식은 태생 체근민이 10이나 된다.
그나마 비슷한 것은 나이 정도인데······.
“왕자님, 또 역할극에 몰입하신 겁니까?”
“역할극이라니?”
“지난번엔 초대 가주님 흉내를 내시더니······ 이번엔 처음 보는 복장이군요. 꼭 지구 연대기의 인물들처럼 입으셨습니다.”
무심코 거울을 보자 익숙한 복색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나는 빙의와 동시에 내가 가진 장비들을 통째로 전송받은 채였다.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어떤 마왕의 복장일세.”
“······마왕이요?”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다행히 내가 소유 중이던 장비들이 그대로 만져졌다.
먼저 품속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일단 이곳의 정보를 알아내려면, ‘멸살법’의 내용을 다시 확인할 필요성이······.
츠츠츠츳!
[해당 아이템은 세계관과 맞지 않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망할 페널티가.
내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집사가 말했다.
“하긴, 마지막으로 여흥을 즐기시는 것도 좋겠지요. 곧 폐하의 부름이 있을 겁니다. 그럼.”
집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작은 방 안에 휑하니 남겨졌다.
「김독 자 는 외 로워」
그래, 너라도 있으니 다행이네.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됐으려나······.
마지막으로 들은 메시지대로라면, 다른 일행들도 나와 같은 지역으로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일단 시나리오 창을 열었다. 밀렸던 메시지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당신은 ‘본섬’의 ‘카이제닉스 제도’에 진입하였습니다.]
[‘카이제닉스 제도’는 ‘성마대전’의 분쟁 지역과 현재 시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해당 지역의 서브 시나리오를 해결하면, ‘성마대전’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마 이 지역에서 군벌을 일으켜 성마대전에 참가해야 할 것이다.
즉, 이곳은 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토대가 될 지역인 셈이다.
[당신은 아직 시나리오 정보를 열람할 수 없습니다.]
[해당 시나리오는 당신이 선택한 루트에 따라 전개가 달라집니다.]
내가 선택한 루트?
아니, 그래도 시나리오 실패 조건 정도는 알아야······.
[해당 시나리오는 당신이 죽지 않는 한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어쨌든 이번 시나리오는 내가 죽지 않는 한 실패하지는 않는다 이건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세계관에서 내 이름은 리카르도 폰 카이제닉스.
이 시나리오가 ‘빙의’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만큼, 나는 이곳에서 철저히 왕자 행세를 해야 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김독자 컴퍼니>의 다른 멤버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마 나처럼 다른 인물에 빙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먼저 그들을 찾아낸 후에······.
“왕자님, 계십니까? 기사 빌스턴입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기사 빌스턴 프레이머.
리카르도의 기억이 맞다면, 그는 나의 호위 기사였다.
“왕께서 찾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나는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얀 콧수염을 단 40대 초로의 기사. 분명 눈앞의 사내는 내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당신의 설화들이 해당 인물에게 반응합니다!]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내의 얼굴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자씨.”」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오래된 듯 그리운 목소리였다.
「“예전에 군대에서 탄피를 분실한 적이 있습니다.”」
사내에게 깃든 설화들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기력을 잃은 문장들이, 필사적으로 나를 향해 뭔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설화의 주인을 안다.
“······현성 씨?”
그러자 이현성이 나를 보았다.
[해당 인물이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현성 씨 맞죠?”
[해당 인물이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해당 세계관이 당신에게 정확한 배역을 연기할 것을 권고합니다.]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이현성이 이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성? 하하, 또 역할극 중이신 겁니까? 뭘 흉내내신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현성은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마치, 나 같은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빌스턴 경.”
“예.”
“이 옷이 뭔지 모르겠습니까?”
“음······ 악마 사냥꾼들의 복장입니까? 아니면 혁명단원의······.”
비록 얼굴은 다르지만, 내 옷은 내가 줄곧 입던 흰 코트였다.
정말 이 사내가 이현성이라면, 나를 못 알아볼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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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이름 : 빌스턴 프레이머 (???)
나이 : 43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
전용 특성 : 충신, 명예로운 기사
전용 스킬 : [대기조 Lv.8], [제도 왕가 검술 Lv.8]······.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80], [근력Lv.80], [민첩Lv.80], [마력Lv.80]
종합 평가 : 한때 이 육신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았습니다. 그는 왕국의 기사였고, 동시에 누군가의 방패였습니다. 방패는 자신의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마침내 그 방패의 주인이 나타났으나, 이제 방패는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특성창의 설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며, 나는 일권무적 유호성의 경고를 떠올렸다.
―본섬에 가게 되면, ‘거대 설화’를 조심해라.
―거대 설화라면 이제 다룰 수 있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다. 그곳에서 너는 거대 설화 그 자체와 싸우게 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제도 전체를 감싼 거대한 개연성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곳에서 뭔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성좌도, 마왕도 아닌 무언가가.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탐욕스럽게 바라봅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현성이 계속해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흠, 혁명단원도 아니라면 혹시 다른 제국의······.”
내가 알던 이현성은, 이미 이 세계에 먹혀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