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373화 –4부 시작 Episode 71. 50년 후 ‘환생자들의 성’에 방문한 지 나흘이 지났다.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다른 일행들도 중섬 시나리오를 마치고 다음 시나리오의 돌입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본).TXT 어쩌면 이 파일의 끝에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운이 좋다면 이번 3회차에 대한 정보가 더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수행해야 안전한 결말에 도달할 것인지 알려주는 지침들이. 하지만······. 「그 이야기 의 마지 막 이 비 극이 라 면?」 만약에, ‘최종본’이라는 것의 의미가 ‘더이상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네 가 그걸 바 꿀수 있 을 까?」 내가 이것을 읽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미래가 확정되어버린다면? “김독자.” 고개를 들자 왼손에 붕대를 동여맨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멸살법’을 읽은 존재. 한수영이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녀가 나였다면, 이 파일을 열어보았을까? “뭘 그렇게 봐?” “아냐, 아무것도.”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읽고 싶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읽고 싶은 ‘에필로그’는, 아마도 이 파일 안에는 없을 것이다. 장비 손질을 끝낸 한수영은 걸터앉은 침대에서 풀썩 내려오며 말했다. “슬슬 출발하자. 계속 꾸물대다간 유중혁 그 자식이 앞서 가버릴 거라고.”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할 존재가 있어.” “누구?” “마침 온 것 같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굵은 갈색의 목염주. 회색 승복 사이로 언뜻언뜻 엿보이는 단단한 잔근육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고련을 거듭한 무승(武僧)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시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신들의 왕에게 안내하십시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멸살법’의 최고 권위자인 내 해석에 따르면, 제목에서 뜻하는 ‘세 가지 방법’이란 ‘멸살법’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을 뜻한다. 첫 번째는 회귀자 유중혁. 두 번째는 귀환자 장하영. 그리고 세 번째는······. ―주인공이 또 있다고? 내 이야기를 들은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로 반문해왔다. 그러고 보면 한수영은 이런 정보들까지는 모르겠구나 싶었다. 녀석이 읽은 것은 고작해야 100편 남짓이니까······. ―하긴, 3천편이나 쓰려면 주인공 하나로는 우려먹기 힘들었겠네. ······쓸데없이 날카롭기는. ―그나저나 주인공이 셋이나 되다니, 역시 망하는 소설의 지름길을 가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망한 소설은 이제 우리네 현실까지 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성의 주인이 ‘세 번째’인 거지? ―맞아. ―‘멸살법’에서 비중은 어느 정도야? 유중혁급? ―그렇지는 않아. 어디까지나 메인은 유중혁이니까. 실제로 3천 편이 넘는 이야기 중 대부분은 유중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다른 두 인물을 ‘주인공’이라 칭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작중 서술을 따른 것일 뿐이고. ―하지만 다른 둘도 유중혁 못지 않은 괴물이지. 특히 현시점에서, ‘세 번째 주인공’은 유중혁보다 더 강력한 존재야. ―······그 유중혁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텅 빈 명상실을 둘러보았다. 이 방은 환생자들의 고행장이었다. 수많은 윤회를 반복하며, 지치고 고된 정신을 달래기 위한 방. 곳곳에서 경전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디에도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환생자들의 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왕은 이미 와 계십니다.” “온통 땡중들 뿐인데?” 한수영의 말에 무승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에도 없습니다.” “말장난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그분은 자신을 볼 자격이 없는 존재와는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재밌네. 지금 우리한테 화두 던지는 거야?” 한수영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나는 현묘한 무승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왕이 정말 어디에나 있다면, 누구든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겠죠.” 기이이이잉! 내 손에 쥐어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울어 젖힌 것과, 검극이 무승의 목젖을 향해 쏘아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츠츠츠츠츳! 강맹한 마력을 흩뿌리던 검극이 무승의 코앞에서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무승이 웃고 있었다. [무척 도발적인 해결책이로군요. 맞습니다. 깨달은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죠.] 공간 전체를 울리는 진언. 나는 검을 회수하며 무승을 바라보았다. 무승의 전신에서 영묘한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하얗게 물든 동공 속에 역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만다라의 그림자. 아마 이 무승은 환생자들의 왕이 가진 무수한 화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이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구원의 무게를 짊어진 ■■의 사도여.] “내 방식을 모두 아는 듯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제 ‘멸살법’을 그저 소설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내 일행들을 단순한 ‘등장인물’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결심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활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은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만다라의 수호자.” [제4의 벽]을 발동 중인데도 상당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온화한 격의 준동. 무승의 배후에 드리워진 위대한 정신의 실체가 눈앞에 낱낱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암흑 단층을 지배하는 자. <에덴>의 메타트론이나 마계의 최고위급 마왕들이라 해도, 이 섬 안에서는 이 자에게 대적할 수 없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제4의 벽’이 존재하지 않는 눈썹을 꿈틀거립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보입니다.] 츠츠츠츠츳! 장하영의 [정체불명의 벽], 메타트론의 [선악을 가르는 벽]에 이은 세 번째 벽. 만다라의 수호자는 [윤회를 결정하는 벽]의 소유자였다. [‘최후의 벽의 파편’이로군요. 니르바나도 그 안에 갇혀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좋은 보살이 될 수 있는 아이였는데, 하필 그대를 만나 자신의 불도를 벗어나고 말았죠.] “뭐, 본인은 만족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한수영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잠깐만. ······그쪽 설마 부처님이야?”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부처가 있고, 저도 그중 하나입니다.] 한수영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하긴, 자기가 부처님이라 주장하는 성좌가 등장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온화한 미소를 띤 부처님께서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아주 오래전부터 보살들의 이야기를 지켜보아 왔습니다.] “당신에게 후원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굳이 자신의 시선을 드러내 권력을 휘두르는 성좌가 있는가 하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성좌도 있습니다. 모름지기 진정한 보시란 후원이 아니라 우직한 관조에서 오는 법입니다.] “공짜 방송 본다는 얘길 길게도 하시는군요.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것? 이 몸이 보살에게 원하는 게 있다 생각합니까?] 나는 명상실의 중심에 놓인 거대한 종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진 종 안에는 눈부신 빛으로 감싸인 작은 영혼이 있었다. 나는 그 영혼이 누구의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유상아 씨를 환생시켜 주기로 하셨지요. 제가 부탁드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 “당신은 우리를 이곳에 초대해 묵게 해 주었습니다. 역시나, 제가 부탁드린 적도 없는데 말이지요.” [불과(佛果)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성좌들을 상대하며 얻은 교훈이 있죠. 대가 없이 호의를 베푸는 성좌는 없다.” [보살의 판단은 섣부르군요. 모든 것의 예외를 믿을 수 있는 존재만이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는 무승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명상실 중앙의 종을 일별하며 말했다. “화신 유상아를 이 섬에 귀속시키지 마십시오. 그녀는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이 섬에서 환생한 모든 존재는 이 섬에 귀속됩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말씀처럼, 모든 것엔 예외가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니르바나의 뒤를 이을 수 있습니다. 화신 유상아를 당신의 [아라한]으로 삼으십시오.” 아라한(阿羅漢). ‘환생자들의 섬’에 종속되지 않고, 시나리오의 세계를 누비며 환생을 거듭하는 구도자들. “그렇게 해준다면 당신과 거래하겠습니다.” [거래라. 이 몸이 원하는 것이 무어라 생각하는지요?] “성마대전을 막고 싶은 것 아닙니까?” [헛되도다. 이 몸은 선과 악 같은 모순투성이 설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모순투성이 설화가 당신의 섬을 엉망으로 만들 텐데도 말입니까?” 흥미롭다는 듯, 무승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만다라의 수호자는 선도 악도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공(空)에 더 가까운 존재. 그런 그의 영토에서 선악의 위세가 커지는 것은 ‘만다라의 수호자’도 달가울 리 없었다. “제가 ‘성마대전’을 막아 보겠습니다.” [그대의 힘으로 가능하다 생각합니까?] 나를 대신해 대답한 것은 설화들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포효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두 개의 거대 설화가 발동하자 일대의 대기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내 짐작이 맞다면, 만다라의 수호자는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 만다라의 수호자는 이번 ‘성마대전’에 직접 뛰어들 수 없기 때문이다. 선도 악도 아닌 그가 이 싸움에 뛰어들 명분은 없으니까. [······‘유상아’라는 화신을 이 몸의 ‘아라한’으로 거두어주는 것. 그것이 보살이 원하는 전부입니까?] “하나 더.” [욕심이 많은 보살이군요.] “제 성운이 원하는 지역에서 ‘성마대전’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섬의 주인인 당신이라면 그 정도 간섭은 가능하겠지요.” 순간 사원 전체에서 희미한 마력의 태동이 느껴졌다. 마치 내게 경고라도 하는 듯한 격의 향연. 위협적이거나 살벌한 기세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깃든 격이었다.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입맛을 다십니다.] 이윽고 만다라의 수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살의 조건을 승낙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성운 전체가 원하는 본섬 지역에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화신 이길영과 화신 신유승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흐음······ 그들을 어디로 보내주길 원합니까?] “넥스트 시티.” [넥스트 시티라······ 이런, 보살이여, 설마······.] 만다라의 수호자라면 내 의도를 눈치챘을 것이다. ‘환생자들의 섬’의 본섬은 잊힌 3세대의 설화들이 박제된 장소. 3세대의 설화들은 1, 2세대보다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만큼, 출발 장소에 따라 생각지도 못한 설화를 얻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두아이들은 반드시 ‘넥스트 시티’에서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신 보살의 나머지 일행들은 이 몸이 원하는 장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수영이 눈짓을 보냈다. ―야, 저 땡중이 이상한 곳으로 보내면 어쩌려고? 투닥거리는 우리를 보며, 무승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걸렸다. [보살이여, 이 몸은 그대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지만······ 아직 그대가 쌓은 설화는, 성마대전에 참가한 다른 성운들과 맞서기엔 역부족입니다.] 역부족이란 말이 심기를 거스른 걸까. 한수영이 이죽거렸다. “······우리가 <올림포스> 깨부순 얘긴 못 들으셨나봐?” [보살들이 쌓은 설화는 독보적이지만, 아직 시간의 풍파를 겪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와 한수영의 몸이 갑작스런 빛에 휩싸였다.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시나리오 전송에 동의하였습니다.] [시나리오 전송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갑자기? 나는 조금 놀랐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전(轉)을 완성할 세 번째 거대 설화 지역으로 가는 것이다. 아마 중섬의 다른 일행들도, 나와 함께 전송되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김독자.” 나는 반사적으로 한수영을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잘 하고 있어. 내가 금방 찾아갈게.” “······퍽이나.” 한수영의 주먹이 내 손을 치는 순간, 그녀의 몸이 빛살로 화했다. 사라지는 한수영의 잔상을 보며, 새삼 녀석과 동료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유중혁이 그랬던 것처럼, 한수영 또한 이제 내 결말에 필요한 존재가 된 것이다. 지금껏 녀석에겐 신세를 많이 졌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갚아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때의 김독자는 알지 못했다.」 스마트폰의 액정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내가 모르는 페이지의 문장들이, 불길한 복선이 깔리듯 한 줄씩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김독자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아니, 잠깐만. 「이미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라는 사실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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