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372화
3부 마지막 화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는 동안,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그러니까, 4번 중섬의 공략법은······.」
마침내 ‘설화 통제법’을 얻은 정희원이, 중섬 시나리오에 참가해 다른 참가자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덤비면 다 죽여버리지 뭐.」
「우리 장군님도 설화급이거든? 얕보지 말라고!」
[심판의 시간]을 발동한 정희원과 [귀살]을 발동한 이지혜가 날뛰는 사이,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중섬 시나리오를 공략해나가고 있었다.
「‘투명 위습’을 테이밍해뒀어. 이 녀석으로 쟤 수식언만 훔치자.」
「그냥 벌레들 보내면 되잖아?」
내가 딱히 도움을 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영리한 공략법이었다.
「크윽, 크윽, 우으으윽.」
홀로 외딴 중섬에 떨어진 이현성은 성좌들과 화신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웅크린 이현성은 서러운 눈길로 적들을 바라보더니 커다란 곰처럼 울었다.
「혼자 다른 곳에 떨어진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혼자 두들겨 맞는 겁니다!」
이현성의 화신체에서 엄청난 빛살이 터지며 주변의 참가자들이 우수수 터져 나갔다.
나는 그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강철의 주인]이 가진 특기 중 하나. 쌓인 대미지를 한꺼번에 해방시키는 성흔인 [충격 해방]이었다.
역시 원작의 등장인물들이 사기는 사기다.
아무튼 이현성도 강해진 건 확실해 보였다.
「[등장인물 ‘장하영’이 ‘파천붕권’을 발동합니다!]」
그리고 장하영은, 누구보다 압도적인 힘을 선보이며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재능이 있었고 타인의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는 그녀는, 이제 자신이 가진 ‘벽’의 진짜 주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벽’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장하영의 ‘벽’. 벽을 통해 다른 초월좌와 소통하고, 그 재능을 배우고 이해하는 장하영. 어떤 의미에서 그런 장하영의 방식은 내가 책을 읽는 것과 닮은 부분이 있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순간 화면에 노이즈가 일었다.
[‘정체불명의 벽’이 ‘제4의 벽’을 바라봅니다.]
[‘제4의 벽’이 ‘정체불명의 벽’을 바라봅니다.]
두 개의 벽이 서로를 마주 본 순간, 갑자기 화면이 흐릿해졌다.
【······세계선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무너지는 시야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그들이 너를 찾아갈 것이다.】
*
우우웅.
의식을 되찾자마자 스마트폰 진동이 느껴졌다.
무심코 화면 켜자 오늘의 날짜가 떠올랐다.
2월 15일······.
지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날씨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날짜뿐. 그나마 이 날짜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차원선을 제멋대로 이동하면서 시공간의 지표는 무너졌으니까.
<스타 스트림>의 모두는 전부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그런데······.
2월 15일이라.
나는 잠시 그것에 관해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뒤숭숭했고, 화신체 곳곳이 쓰리듯 아파 왔다.
끔뻑거리며 상반신을 내려다보자, 흉부 전체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여긴 어디지?
천천히 주변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말끔한 흰색의 침대보에, 오리엔트풍의 우아한 장식물들로 꾸며진 방.
창가에 기대어 밖을 보던 누군가가 물었다.
“일어났냐?”
“너······!”
녀석의 눈이 장난스러운 곡선을 그렸다.
“아, 이게 죽었다 깨어나는 맛이구만.”
“너, 죽은 거 아니었―”
“내가?”
실실 웃는 한수영을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유중혁의 검에 한수영이 죽고, 내가 유중혁과 싸우고, 유중혁의 검에 기절하고, 도서관에서 만나 유상아와 이야기했던 일련의 과정들······.
어느새 성큼 다가온 한수영이 내 볼을 꼬집었다.
“하여간 김독자, 귀여울 때가 있다니까.”
그제야 녀석이 나를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니 한수영의 팔에도 작은 링거 팩 하나가 꽂혀 있었다.
“······여긴 어디야?”
“본섬 대기실. ‘그 녀석’의 성이 있는 곳이야.”
순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섬의 주인’이 화신 ‘유상아’를 부르고 있습니다.]
녀석이 유상아를 데려가던 그때, 내 눈앞에도 메시지가 떴었다.
[‘섬의 주인’이 당신을 초대합니다.]
환생자들의 왕.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그 책의 세 번째 주인공이, 자신의 영토로 우릴 부른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 시나리오를 클리어 못 했을 텐데? 이곳으로 오려면 중섬 시나리오를 클리어해야······.
“너 클리어했어.”
나는 메시지 로그를 확인했다.
[히든 시나리오― ‘수식언 뺏기’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현재 보상 수령 대기 중입니다.]
정말이었다.
“뭐지? 난 아직 음절 ‘신’을 모으지 못했······.”
한수영은 말없이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켰다.
[정욕과 격노의 마신].
완성된 수식언 목걸이가 빛나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내 목걸이는 마지막 한 글자가 비어 있어야 했으니까.
한수영이 말했다.
“유중혁이 남는 글자라면서 주고 갔어.”
······유중혁이?
대체 왜?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마지막 순간, 녀석이 했던 말이 귓가에 생생히 떠올랐다.
―회귀자였던, 유중혁이다.
회귀자인 유중혁이 아니라, 회귀자였던 유중혁.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유중혁 어딨어?”
“다음 시나리오로 갔어.”
그 말에, 허탈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스쳤다.
녀석은 이번에도 시나리오를 위해 앞서 떠난 것이다.
“······그놈 표적은 누구였대?”
“깨어나자마자 질문 되게 많네, 귀찮게.”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는 내게, 한수영이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내 목에 걸려 있는 수식언 목걸이는 두 개였다. 하나는 아스모데우스의 수식언인 [정욕과 격노의 마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의 □□]
내 수식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설마?”
“그래.”
그래도 ‘의’는 남겨줬네. 개자식.
“이제 나도 질문 좀 하자. 유상아는 아직 네 안에 있어?”
“······환생자들의 왕이 데려갔어.”
“······마지막에 뭐 남긴 말은 없었고?”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한수영과 나란히 선 채, 도시의 경관을 내려다보았다.
중국풍의 도시 속을 거니는 환생자들의 모습.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 그곳에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달라진 채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한 존재들.
“다음 생에서 만나자더라.”
내겐 이번 생이지만, 유상아가 나를 보는 것은 다음 생일 것이다.
그녀는 ‘환생자들의 왕’의 권능으로 새로운 육신을 얻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 이 세계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한수영과 나는 말없이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거리 어딘가에 유상아가 있기라도 할 것처럼.
한수영이 문득 중얼거렸다.
“눈이다.”
조금씩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본래 이 세계는 눈이 오지 않는 땅이었다.
그럼에도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별빛처럼 쏟아지는 눈. 눈이 나리는 까마득한 하늘의 꼭대기에서, 성좌들이 내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간접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조금씩 모은 개연성이 하늘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수식언 목걸이를 쥔 한수영이 웃었다.
“이제 너 [구원]도 [마왕]도 아니네. 수식언 새로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나는 한수영의 말을 들으며 내가 ‘구원의 마왕’이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들.
그럼에도 내 생애 가장 빛났던 시간들.
어룽거리는 시야 속에서 한수영이 키득대고 웃었다.
“이참에 내가 새로 지어 줄까? 음······ 뭐가 좋으려나. ‘툭하면 기절맨’ 어떠냐? 아니면 ‘기적의 주둥아리’······ 어? 야, 너······ 울어?”
놀란 녀석의 눈동자 위에 내 얼굴이 비친다.
작가인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이야기를 쓰는 너라면, 혹시 알겠느냐고.
나는 지금까지 잘해 온 것인지.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지.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에 도달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볼 수 있을지.
“야, 뭘 울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뚝.”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수영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입속에 무언가 달콤하고 시큼한 것이 쏙 들어왔다.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모처럼 눈도 내리는데······. 내가 나중에 더 좋은 수식언 지어줄게.”
그렇게 말하는 한수영은 내 시선을 피한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2월 15일.
스마트폰의 날짜는 그랬다. 이곳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표기는 그저 ‘오류’일 뿐일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우연히 매겨진 날짜.
그럼에도 만약, 어떤 기적이 일어나 저 날짜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오늘은, 나의 생일이었다.
한수영이 눈을 슥슥 부비며 말했다.
“사람들 보고 싶네.”
나는 온 힘을 다해 대답했다.
“······나도.”
그리고 그 말을 신호처럼,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보낸 선물이 도착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본).TXT
*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유중혁은 ‘환생자들의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김독자는 깨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유상아는, 섬의 주인을 만나 환생 절차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 여자.’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며칠 전, 그 정체 모를 벽에 머리를 박았던 순간을 유중혁은 잊을 수 없었다. 끔찍한 개연성의 스파크 속에서 강제로 들여다보았던 ‘벽’의 내부. 그곳에서, 유중혁은 자신이 알지 못하던 이야기의 파편들을 목격했다.
어떤 것은 예상했던 이야기였고.
어떤 것은 알지 못한 이야기였다.
완전히 뜻밖의 이야기도 있었다.
찰나였지만, 유중혁은 그 벽에서 자신이 찾던 정보를 얻었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유중혁은 자신이 그 해답을 실천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은밀한 모략가.”
고개를 들자, 음험한 성좌의 시선이 그에게 쏘아졌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이 회차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성좌.
그리고 1863회차까지의 세계 중 어디에도, 그 정보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존재.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네놈 계략엔 충분히 놀아나 준 것 같은데. 내게도 질문 하나 정도는 할 자격이 있겠지.”
은밀한 모략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의 일부가 새카맣게 물들더니 유중혁을 향해 검은빛이 떨어졌다.
츠츠츠츠츳!
개연성의 스파크와 함께, 주변의 시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곳은 ‘섬의 주인’이 지배하는 공간. 그 어떤 최상위격의 성좌라도 이만한 개연성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은밀한 모략가는 그게 가능한 존재였다.
어둠 속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솟아났다.
【궁금한 게 뭐지?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어째서 내게 그 책을 준 거냐?”
은밀한 모략가의 그림자가 조소하듯 흔들렸다.
유중혁은 계속해서 물었다.
“내가 절망하기를 바랐나? 그래서, 그 책을 읽고 김독자를 죽이기를 원했나?”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왜 그런 짓을 꾸민 거지?”
【네가 듣는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네깟 것이 듣는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확신이 담긴 오만함.
유중혁이 다시 물었다.
“너는 왜 김독자를 1863회차에 보냈던 거냐. 왜, 그곳의 ‘나’를 죽이도록 시켰던 거지?”
【그런 시나리오가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해두지.】
그림자가 실소하듯 흔들렸다. 유중혁은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네 모략은 모두 김독자를 파괴하는 것들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아주 확실한 이유가.”
김독자에게 알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김독자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좌.
유중혁은 오랫동안 이 성좌에 대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유중혁은, 지금 막 그 추적의 해답에 도달했다.
“은밀한 모략가. 너는, 미래에서 온 ‘김독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