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367화 그것은 오래된 기억이다. ―서기관, 난 언제까지 이 전쟁을 반복해야 하지? 결국 승자도 없는 전쟁을······. 그 질문을 던진 것이 언제였는지, 몇 번째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미카엘.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억 속에서 메타트론은 늘 그렇게 미소할 뿐이었다. 몇백 년을, 어쩌면 몇천 년을.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시간의 저편에서부터, 메타트론은 줄곧 그런 미소로 존재했다. ―눈앞의 악을 증오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그게 당신의 ‘시나리오’입니다. ······내 시나리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악마를 사냥해왔더라. 미카엘은 오래전, 자신의 탄생을 잊었다. [‘선악과’의 힘이 폭주합니다.] 기억은 늘 부정확하다. 떠오르는 것은, 그가 죽인 마왕들의 마지막 말들. ―통탄스럽구나, 가엾은 <에덴>의 사도여. 정녕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21번째 마계의 주인이었던 이. ―으하하하핫! 너는 우리와 같다! 드디어 메타트론이 미쳤구나! 9번째 마계의 주인이었던 이. ―너는 ‘몇 번째’ 미카엘이냐? 4번째 마계의 주인이었던 이. 이름을 잊은 마왕들의 얼굴 너머로, 자신의 곁에서 죽어간 동료 대천사들이 보인다. ―미카엘, 정신 차려. 제발······. 이건 아니야. 천사와 마왕. 파편처럼 조각난 얼굴들은 이내 수만 피스의 퍼즐들로 흩어져, 다시 하나의 거대한 상(狀)을 이룬다. 억겁의 세월 동안 대적해온 선과 악. 그 세월을 고스란히 견뎌낸 메타트론의 얼굴이, 수천 년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한 가지만 주의하십시오. 이 힘을 쓸 때는, 절대로······. [‘선악과’의 힘이 폭주합니다!] 기억이 한꺼번에 쓸려나가며, 미카엘은 머리가 잘근잘근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휩싸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세상의 모든 선이 절규하고 있었다. 들풀도, 나무도, 벌레들도, 만물에 깃든 모든 종류의 선(善)이 슬픔에 젖어 비탄의 울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절대 선에 속한 대상에게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설화, ‘악을 멸하는 악’이 비통하게 울부짖습니다!] [당신은 금기를 범했습니다!] [당신에게 끔찍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피투성이가 된 잿빛의 천사가, 미카엘을 향해 웃고 있었다. * [선악과]를 깨문 순간, 세상의 정경이 변했다. [당신은 금단의 성유과를 섭취하였습니다.] [당신은 ‘마왕’입니다.] [‘선악과’의 힘이 당신에게 ‘절대 선’의 비밀을 속삭입니다.] 엄청난 마력의 폭풍과 함께, 귓가에 들려오는 메시지. [당신은 선악(善惡)의 모든 국면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신은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새로운 설화의 가능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업적에 놀랍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두 번째 수식언을 고민합니다.] 마왕이 된 이후,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성좌의 감각. [‘마왕화’를 해제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별자리를 온전히 복원합니다.] 새카만 하늘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별이 보였다. 나의 별이었다. [‘천사화’를 발동합니다.] 별빛을 받은 내 몸이 환하게 빛났다. 검게 물들어 있던 깃털 날개가 새하얗게 탈색되고, 머리 위로 자랐던 악마의 뿔이 사그라들었다. 온화하고 청명한 에너지가 내 화신체 전체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내게 ‘천사의 격’을 향유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내 몸집만큼 쪼그라든 [저지먼트 필드]가, 내 전신을 우그러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꽈드드드드득! 끔찍한 통증과 함께, 막 돋아난 날개가 구겨진다. 공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팔이, 다리가 형편없이 우그러든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을 보호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당장이라도 찌그러들 것 같은 그 거력을, 나는 거대 설화의 힘으로 겨우 버텨냈다.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을 보호합니다!] [2세대의 개연성이 ‘제4의 벽’의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머릿속에 몇 번이나 번개가 쳤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았고, 시야가 어둑해졌다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견뎠다. 견뎌야만 했다. 그래야, 곧 찾아올 단 한 번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으니까. 「‘타락한 천사들의 왕’은 악에게 강한 대신, 하나의 약점을 지닌다.」 내 몸을 쥐어짜는 [저지먼트 필드]의 힘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절대 악을 멸하는 저 무시무시한 괴물의 유일한 약점. 「‘타락한 천사들의 왕’은, 선 성향의 대상을 공격할 수 없다.」 만약, 녀석이 이 규칙을 깨고 선을 공격한다면······. 쩌저저저저적! 마왕조차 짜부라트리는 절대의 성흔, [저지먼트 필드]가 깨지고 있었다. 나는 번데기에서 탈출하는 나방처럼 결계를 부수며 날개를 펼쳤다. 바닥에 주저앉은 미카엘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왕, ‘타락한 천사들의 왕’이 고통 속에 몸부림칩니다!] 기회는 지금뿐. “안나 크로프트!” 내 말과 함께, 미카엘의 배후로 금발의 여인이 달려갔다.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 [미래시]를 통해 뭔가를 읽어낸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격을 방출하며 돌진하고 있었다. 나는 남은 모든 힘을 두 다리에 모아 앞으로 넘어지듯 쏘아져 나갔다. 평소였다면 미카엘이 아무리 무력해졌다 해도 이 전력으로 녀석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섬이라면 다르다.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가 ‘검강 Lv.9’을 발동합니다!] 약속이나 한 듯 단검의 끝으로 줄기차게 강기 다발을 뽑아내는 안나 크로프트. 나는 넝마가 된 오른팔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설화 파편, ‘불쌍한 소드 마스터의 오른팔’이 발동합니다!] 언젠가 [라마르크의 기린] 특성을 통해 획득해둔 설화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2세대의 개연성이 당신의 재능을 강화시킵니다!] 폭발하는 [백청강기]의 마력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끄트머리에서 십여 미터나 솟아났다. 간신히 수평으로 쥔 검이, 미카엘의 왼쪽 목으로 반쯤 파고든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안나 크로프트의 단검이 미카엘의 오른쪽 목덜미를 갈랐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선혈. 미카엘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당신은 ‘타락한 천사들의 왕’의 176번째 화신체를 처치하였습니다.] [당신은 신화급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업적에 놀랐습니다!] [당신은 ‘가짜 계시’를 실현하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등급 표기가 불가능한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계시의 설계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의식이 흩어졌다. * 눈을 뜨자, 나는 새하얀 공간 속에 내던져져 있었다. 허공에서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선악과를 먹은 존재는, 자신이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보게 된다.」 ······여긴 어디지? 물을 틈도 없이, 왼쪽의 벽면 위로 영상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멸살법’의 장면들이었다. 유중혁과 일행들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모습. 아직은 내가 없던 ‘멸살법’의 세계.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적을 도륙하는 일행들이 그곳에 있었다. [‘선악과’가 말합니다. ‘저 이야기는 네 삶이었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야기는 나의 삶이었다. 나는 저것을 읽으며 자랐다. [‘선악과’가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분명 너의 삶이었지.’] 오른쪽 벽면이 물결치며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년. 소년은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로 뭔가를 입력하고 있었다. ―중혁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설마 또 죽는 거 아니죠? 유중혁의 164회차. 중학교 3학년. 이지혜를 동경하던 내가 댓글을 쓰고 있었다. ―아... 진짜... 고구마 그만 먹고 싶어요. 유중혁의 488회차. 고등학교 2학년. 김남운의 나이가 된 내가 댓글을 쓰고 있었다. . . . 유중혁의 회차가 넘어갈 때마다, 나도 자라났다. 녀석의 죽음을 보며 수염이 자랐고, 녀석의 희생을 보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다시, 녀석의 이야기를 보며······. ―이번 회차에서는 그냥 쟤 죽이면 안 될까요? ······내가 저런 댓글도 썼다고?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데, 이쯤에서 회귀 ㄱㄱ 유중혁의 862회차. 대학생이 된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중혁이는 죽겠죠? 내가 저지른 말들이 그곳에 전시되고 있었다. 삶에 치이고, 생활에 지쳤다는 핑계로, 내가 내뱉었던 말들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초반 시나리오는 이제 스킵해 주세요. 지겨워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악과’가 말합니다. ‘저것이, 네 삶의 전부인 것처럼 말했던 이야기의 가치야.’] 손끝이 떨려온다. 왼쪽 벽면에서는 유중혁의 싸움이, 오른쪽 벽면에서는 그런 유중혁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중앙의 벽면에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구경할 테면 얼마든지 구경해보라지. 네놈들이 낼 관람료는 결국 네놈들의 목숨이 될 테니까.”」 [‘선악과’가 말합니다. ‘정말로 네가 ■■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을까?’] 화면 위로, 내 말들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유중혁, 나는 ‘네가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다.”」 「“중혁아, 우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 줄게.”」 뻔뻔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 [‘선악과’가 말합니다. ‘혼자만 알고 있는 이야기로 그 모든 세계를 철저하게 기만하며 살아온 네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을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제4의 벽’이 ‘선악과’를 노려봅니다!] [‘선악과’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립니다.] 츠츠츠츠츳! 주변을 뒤덮는 개연성의 폭풍. 비틀거리는 나를 향해, 누군가가 말을 외쳤다. 「(······독자 씨! 어서 움직여야 해요. 아직 미카엘은―)」 * 눈을 떴을 때, 나는 동굴의 벽면에 기대어 있었다. “1분이 지나도 안 깨면 두고 갈 생각이었어요.” 금발의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부와 흉부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관통상을 입은 허벅지는 짓이긴 약초에 감싸여 있었다. 입안으로 따뜻한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씁쓸하고 비린 맛.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 액체의 정체를 깨닫고 소스라쳤다.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상처를 낸 안나 크로프트가 내게 자신의 피를 먹이고 있었다. “무슨······!” 한 손으로 나를 진정시킨 안나 크로프트는 조금의 당혹감도 없이 설명했다. “나는 [영약 제조사]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내 피는 지금껏 내가 먹은 영약들의 악효를 품고 있죠.” “······이 피를 많이 먹게 되면 당신 권속이 되잖아.” “그건 그쪽이 나보다 격이 낮을 때고요.” 안나 크로프트가 손바닥의 상처를 지혈하며 고개를 돌렸다. 주변은 밤이었다. 느껴지는 기척은 아무것도 없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나는 물었다. “미카엘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어요. 아니, 죽었다고 해야 할지······.” “혹시 녀석의 화신체가 검은 안개로 덮였습니까?” “······어떻게 알았죠?”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머리를 짓누르는 통증 때문에 ‘멸살법’의 내용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아마 미카엘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는 죽었지만, 다시 되살아 날 것이다. 동굴 밖으로, 2세대 설화의 상징인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내게 꽤 많은 피를 먹인 모양인지, 어슴푸레한 달빛에 물든 안나 크로프트의 얼굴이 창백했다. “버려두고 그냥 가지 그랬습니까.” “혹시 살려 놓으면 「은혜 갚은 예언자」따위의 설화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 종류의 설화가 그리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건, 안나 크로프트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불쑥 반발감이 일었다. 내가 아는 안나 크로프트는 이렇지 않았다. 그녀는 대의를 위해 소중한 동료를 희생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철저한 냉혈한이다. 분명 그래야 할진대······.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아는 정보가, 안나 크로프트의 전부였을까? 「안나 크로프트는 ‘절대 선’의 화신이다.」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선악과]를 먹어서 생각이 많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처럼 말했다. “이쯤에서 헤어지죠. 당신도 수식언 글자는 다 모았을 테니까.” “나야 상관없지만, 괜찮겠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군요. 딱히 돌봐주지 않았어도, 저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어요.” “아뇨, 당신은 그대로 두면 죽었어요.” ‘죽었을 거예요’가 아니라 ‘죽었어요’였다. 안나 크로프트가 저런 식으로 말할 때가 언제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내 미래를 읽을 수 없을 텐데.” “······얼마 전까진 그랬죠.”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7’을 발동합니다!] [당신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어제부터, 갑자기 당신 미래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희미한 벽 너머로 뭔가가······.” ······내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무슨 미래를 본 겁니까?” “······모르는 편이 좋을 텐데요.” “말해.” 안나의 [대악마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안나 크로프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12시간 뒤 패왕 유중혁에게 죽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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