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366화
나는 안나 크로프트와 함께 곧장 전장으로 움직였다.
광기에 휩싸인 미카엘은 주변의 성좌와 화신들을 아예 찢어 죽이고 있었다.
오직 악을 멸하기 위해 태어난 악.
타락 천사가 된 미카엘은, 순수한 전투 능력만 따지면 포세이돈이나 하데스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3번 중섬’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이미 본섬에 진출했거나, 아직 ‘성마대전’에 참가하지 않은 성좌들이 하나둘 이쪽을 주목했다.
슬슬 미카엘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갔을 무렵, 안나 크로프트가 말했다.
“더이상 다가가면 위험해요. 내 [기도비닉] 스킬로는······.”
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손목을 붙잡았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안나 크로프트’의 존재를 의아해합니다.]
“이 여자도 부탁해.”
[설화, ‘돌멩이와 나’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안나 크로프트’에게 자신의 효과를 공유했습니다.]
우리는 당당히 전장을 활보했다.
미카엘이나 다른 성좌들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의 눈에는 돌멩이 두 개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안나 크로프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설화는 뭐죠?”
“돌멩이가 되는 설화.”
설명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했다.
전장의 길목마다 성좌들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간혹 살아 있는 놈도 보였다.
68번째 마계의 마왕, ‘무가치한 암흑’ 벨리알.
미카엘의 공격에 당한 녀석은 설화를 줄줄 흘리며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나를 노리고 있었지.
푸슉!
나는 태연히 녀석의 몸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찔러 넣었다.
[당신은 68번째 마계의 마왕을 처치했습니다!]
[해당 마왕은 당신보다 서열이 낮아 서열 변동이 없습니다.]
[수식언 목걸이, ‘무가치한 암흑’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다섯 개의 마왕 화신체를 살해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새로운 특성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당신 마왕이잖아요. 그렇게 막 죽여도 돼요?”
“마왕 그만두죠 뭐.”
태연자약하게 지껄이는 나를 보며 안나 크로프트는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미카엘의 격이 폭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2세대의 개연성이 조금만 더 약했어도, 숲 전체가 날아가 버렸을 힘이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이죠. 아스모데우스도 비슷한 상태일 겁니다.”
숲길의 지척으로 마왕의 설화 파편들이 떨어져 있었다. 벨리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위급 마왕의 흔적. 누구의 것인지는 명백했다.
얼마간 풀숲을 헤치자,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에 기대어 있는 신형이 보였다.
[······역시 왔군요.]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아스모데우스는 웃고 있었다.
화신체의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잘려나가고, 흉부가 완전히 으깨어진 녀석은 그야말로 간신히 살아있는 상태였다.
[미카엘이 설마 ‘타락’의 권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아스모데우스는, 이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젠 내 목걸이를 가져갈 거고요.]
“그래.”
아스모데우스의 수식언 목걸이가 뒤집힌 채 반짝이고 있었다. 만약 이 목걸이의 모든 글자를 내가 소유하게 된다면, 아스모데우스는 이번 ‘성마대전’에서 탈락하게 될 것이다.
[그럼 얼른 끝내시죠.]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는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체구의 소녀였다. 이 화신체를 죽이더라도 아스모데우스의 진체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화신체는 확실히 죽는다.
그리고 이 화신체는 한명오 부장의 딸이었다.
“안 죽여. 대신 거래를 하지.”
[거래? 이제 와서 무슨 거래를?]
“내게 신화급 설화 하나를 양도해. 그러면 널 시나리오에서 탈락시키지 않을게.”
아스모데우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졌다.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군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맞아.”
찰나간 아스모데우스와 나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나를 쏘아보던 아스모데우스의 눈빛에 희미한 탄식이 흘렀다.
[그대는 이제 완벽한 ‘마왕’이 되었군요. 72좌의 누구도, 그대가 마왕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겠어.]
“칭찬 고맙군.”
[하지만 당신의 제안엔 문제가 있어요. 당신 표적은 나인데, 무슨 수로 나를 탈락시키지 않겠다는 거죠?]
“모든 글자를 빼앗기지만 않으면 시나리오에서 탈락하지 않아. 네게 글자 하나를 남겨 주겠어.”
내가 남겨 주려는 글자는 [의]였다. 마침 내가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글자.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그것참 눈물나게 고맙군요.]
나는 녀석의 수식언 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스모데우스의 목걸이에서, 하나씩 음절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수식언 음절, ‘정’을 습득했습니다.]
[수식언 음절, ‘욕’을 습득했습니다.]
[수식언 음절, ‘과’를 습득했습니다.]
[수식언 음절, ‘격’을 습득했습니다.]
······.
음절이 반쯤 넘어왔을 무렵, 아스모데우스가 내 수식언을 보며 말했다. 정확히는 내 수식언의 [원]을 보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탐나는 수식언이군요.]
나는 수식언 목걸이를 옷 안으로 감추며 말했다.
“미카엘을 죽이려 하지 말고, 녀석에게서 글자 하나만 빼앗아 봐. 당신이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
[글자 하나라······ 혹시 이걸 말하는 건가요?]
순간, 녀석의 멀쩡한 한쪽 손에 쥐어진 목걸이가 보였다.
[원한의 사냥꾼].
모든 글자가 모인 녀석의 ‘표적 목걸이’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시나리오 전송이 시작됩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수식언 목걸이를 살폈다.
[구원의 마왕].
즉, 저건 내가 가진 [원]이 아니었다.
[미카엘이 타락한 순간 알았어요. 이건 함정이라는 걸.]
······설마, 그 짧은 사이에?
시나리오 전송이 시작된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가 흩어지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않았을 것 같나요?]
아스모데우스는, 처음부터 [원]만을 획득할 생각으로 미카엘과 싸웠던 것이다.
뒤늦게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아스모데우스는 이미 내가 간섭 불가능한 상태였다.
[행운을 빌죠, 구원의 마왕. 그대도 이제 ‘한 글자’만 더 모으면 되니까.]
휘황한 빛무리와 함께 아스모데우스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녀석이 남긴 수식언 글자들뿐이었다.
[정욕과 격노의 마□]
빌어먹을, 하필 ‘신’이······.
아스모데우스를 너무 얕봤다.
고개를 돌리자, 안나 크로프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랑 한 약속은―.”
“쉿.”
나는 반사적으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풀숲은 아비규환의 비명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지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마치 주변에 있던 모든 생명이 사멸하기라도 한 것처럼.
인근의 풀잎이 일제히 일어서는 순간, 내 솜털도 함께 일어섰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외쳤다.
“[미래시]를 발동해!”
붉게 빛나는 [대악마의 눈]. 안나 크로프트의 신형이 나를 붙든 채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백여 미터를 달린 안나 크로프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 역시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
우리가 방금 전까지 있던 바로 그 지역에서, 엄청난 대폭발이 발생하고 있었다. 결계처럼 만들어진 보랏빛 반원이, 순식간에 찌그러들며 그 안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저지먼트 필드(Judgement field)].
오직 ‘타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멸마의 공능.
안나 크로프트가 절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이즈가 너무 많아서 미래가 보이질 않아요!”
“다 읽을 필요 없으니까, 미카엘의 공격 패턴만 읽어 봐요.”
“아직도 싸울 생각이에요? 그 돌멩이가 되자인가 뭔가 하는 설화 써서 도망가면―”
“방금 저 녀석이 돌멩이도 공격하는 거 못 봤습니까?”
보랏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분화구 속에서, 나를 죽일 대천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선악과]로 인해 촉발된 미카엘의 설화가, 녀석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타락한 대천사는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구··· 원···의 ···마왕.]
그저 멀리서 들은 것만으로도 오싹한 진언.
“······역시 제정신이 아니네.”
“망할, 당신 때문에 다 틀렸어!”
“두 번째 플랜으로 가죠.”
“두 번째? 그런 건 말해준 적 없잖아요!”
“지금부터 만들어 봅······.”
내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몰아친 광풍이 안나 크로프트의 신형을 저만치 날려버렸다.
멀리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미카엘의 거구가 보였다.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솟아오르는 검은색 날개와 마왕의 뿔.
2세대의 개연성만큼, 내 격도 더 강해져 있었다. 물론, 이 정도 격만으로 부딪쳤다간 개죽음이다.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하지만 녀석과 부딪칠 것은 내가 아니라.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내가 쌓아온 ‘설화’들이었다.
콰아아아아앙!
내 왼손에 실린 「마계의 봄」이 미카엘의 왼손과 충돌했다. 거의 동시에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담긴 성화의 불꽃이 미카엘의 몸체를 노렸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
순간 놀란 미카엘이 몸을 뒤틀며 물러났다.
‘거대 설화’의 힘은 대단했다. 아무리 2세대의 개연성 제약을 받고 있다고 해도, 저 괴물을 맞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니. 유호성에게 받은 수련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설화, ‘악을 멸하는 악’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에덴의 악마’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강력한 설화를 가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미카엘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엄청난 압력에 내 모든 설화들이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녀석을 정면으로 상대하기엔, 내가 가진 격이 조금 모자랐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분한 듯 포효합니다!]
미안하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네가 참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뒤이어 쏟아지는 맹공에,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을 지킵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지킵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당신을 지킵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당신을 지킵니다.]
······.
나를 대신해서 내 설화들이 녀석의 공격을 감당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이 있었다.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쓴다면?
[전인화]와 [바람의 길]을 동시에 발동한다면?
[책갈피]를 활성화해 다른 인물들을 불러온다면?
어느 계책으로도 뾰족한 방도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가.
또 그런 꼴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피를 한 바가지 토하며 물러서는 나에게, 미카엘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마무리를 결심한 모양인지, 녀석의 한쪽 손에서 보랏빛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내 주변으로 보랏빛 결계의 반원이 생성되었다. 한 번 발동하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성흔. 모든 악을 처벌하는 심판장, [저지먼트 필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처형은 압착형(壓搾刑)인 모양이었다.
“······미카엘.”
그런데 미카엘은 알까.
녀석이 저 성흔을 발동하기를, 나는 줄곧 기다렸다는 것을.
“아니, ······타락 천사 ‘루시퍼’.”
[마왕, ‘타락 천사들의 왕’이 그 이름을 싫어합니다!]
본래 루시퍼는 본래의 <성마대전>을 파멸로 이끌 인물 중 하나였다.
「세상의 그 어떤 악도, ‘타락 천사들의 왕’을 꺾을 수는 없다.」
악을 상대할 때 더욱 강해지는 악. 그리하여, 끝내는 모든 악을 집어삼키는 괴물. 설령 서열 10위권의 고위급 마왕이라고 해도 이 녀석을 죽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악을 상대할 때만큼은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강력해지니까.
「하지만, 그 대상이 ‘악’이 아니라면 어떨까.」
모든 강력한 힘에는 대가가 있다.
이제 십여 미터도 채 남지 않은 저지먼트 필드를 보며, 나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꺼낸 것은, 한 알의 사과였다.
<기간토마키아>가 일어나기 직전, ‘하늘의 서기관’으로부터 받은 <에덴>의 성유과.
“이 맛이 그립지 않아?”
미카엘의 눈빛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아마 이 사과를 알아보겠지.
왜냐하면 그 역시, 이 사과를 먹은 적이 있을 테니까.
“천사가 [선악과]를 먹으면 ‘마왕화’가 진행되지. 그런데, ‘마왕’이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당황한 미카엘이 황급히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지먼트 필드]가 내 몸을 우그러뜨리는 바로 그 순간.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이빨이 [선악과]를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