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364화 빌어먹을, 저 자식이랑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력의 파랑을 보며 재빨리 시체의 산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허겁지겁 달아나는 무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미친 괴물이······!] [으아아아악!] 처참하게 짓밟힌 성좌들이 단말마와 함께 사망했다. 너부러진 사체 조각 사이로 설화들이 마구 쏟아졌고, 화신들이 흘린 피가 대지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튀어! 빨리!] 그 뒤로 이 끔찍한 정경을 만들어 낸 학살자가 도착했다. 높게 쌓인 시체의 산 너머로도 보일 정도의 보랏빛 아우라.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으르렁거립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몸을 움츠립니다.] 내 설화들도 영향을 받을 만큼 엄청난 격의 소유자. [설화, ‘멸마의 불꽃’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멸마의 불꽃. 악성향의 성좌들을 상대할 때 최강의 위력을 발휘하는 설화 중 하나. 나는 그 설화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백금발에 보랏빛 눈동자. 등 뒤로 펼쳐진 환한 대천사의 날개.」 <에덴>의 대천사들 중, 유일하게 내게 적대감을 보이는 존재.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구원의 심판을 행합니다.] 타락의 구원자, 대천사 미카엘. 나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수식언을 가진 존재. 쿠구구구구구! 대천사 미카엘이 든 [구원자의 검]이 세계를 갈랐다. 칼날에 깃든 보랏빛 안개가 산란했고, 퍼진 안개는 이내 불꽃으로 화해 대기를 통째로 태우기 시작했다. 불꽃은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러 달아난 성좌들에게 도달했다. [아아아아아악!] 달아나던 대여섯 명의 성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보랏빛 화염 속에 재가 되어 흩어지는 설화들. 죽은 성좌들의 자리에 남은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수식언 목걸이뿐이었다. 미카엘이 허공을 날아 떨어진 목걸이들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없군.] 뭔가를 찾는 모습이었다. 미카엘은 기이한 안광을 발하며 주변을 살폈다. [쥐새끼 한 마리가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여기서 미카엘과 싸운다면, 내게 승산이 있을까? 설화 통제법을 익혀 꽤 강해졌지만, 아직 미카엘과 싸울 자신은 없었다. 미카엘은 <에덴> 최강의 전투 천사이자 신화급 성좌에 육박하는 존재. 본신의 힘을 전부 드러낸다면 <기간토마키아>에서 싸웠던 포세이돈에게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내가 ‘멸살법’을 통해 녀석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도······. 고오오오! 미카엘의 두 눈에 은빛 안광이 떠올랐다. [대천사의 눈]. 마(魔)를 탐색하는, 대천사 고유의 스킬 중 하나. 2세대의 개연성이 풀리면서 해당 스킬의 사용이 가능해진 모양이었다. 도깨비불처럼 타오르는 녀석의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천천히 돌아간 녀석의 시야각이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달아나야 하나? 그 순간, 주민들이 건넨 돌멩이가 품속에서 꿈틀거렸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설화의 효과로 당신의 존재감이 ‘돌멩이’와 흡사해집니다.] [당신이 발산하는 마기가 주변의 자연에 동화됩니다.] 미카엘은 내가 숨어 있는 시체의 산을 아무렇지 않게 훑어보더니, 이내 눈길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착각이었나?] 미카엘은 거친 음색으로 불평하며 신형을 띄웠다. [서기관은 괜히 쓸데없는 명령을 내려서······.] 활짝 펼쳐진 녀석의 날개. 미카엘의 신형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녀석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나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칭찬해달라고 조릅니다.] “잘했어, 고마워.” [설화, ‘돌멩이와 나’가 가륵가륵 웃습니다.] 이 설화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나 자신을 ‘돌멩이’ 같은 존재감으로 만드는 설화라니······. 기분은 좀 그렇지만 앞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폐허가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재 3번 중섬의 생존자는 224명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38명이 학살을 당했다. 대부분은 위인급 성좌들이나 화신들이었지만, 희생자들 중에는 설화급 성좌도 섞여 있었다. 마치 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풍경. 이것이 ‘대천사’들의 진짜 힘이다. 고위급의 마왕들도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겠지. 「(큰일 날 뻔했네요. 여차하면 제가 ‘계시’라도 풀어볼까 했는데.)」 ‘보고 계셨습니까?’ 「(네, 쉬는 시간이라서요.)」 맑은 유상아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 기운이 났다. 싸워야 할 적들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나 역시 여러 장의 히든 카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시체들 상태가 조금 이상하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늘어진 시체들을 내려다 보았다. 정확히는 시체들이 아니라, 시체들의 ‘수식언 목걸이’가 이상했다. 시체들의 수식언 목걸이는 대개 사라진 상태거나, 아니면 수식언의 일부가 훼손되어 있었다. 유상아가 물었다. 「(목걸이가 사라진 경우는 표적 사냥을 당한 거라 쳐도······ 수식언 일부만 사라진 건 뭘까요?)」 [오래된 □□□] [늙은 □□□] [□과 □□□의 □□] 몇몇 수식언들은 군데군데 글씨가 빠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그 글자만을 훔쳐 가기라도 한 것처럼. ‘편법을 쓰는 녀석들이 있는 겁니다.’ 「(편법이요?)」 ‘이번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기억하십니까?’ 「(표적으로 지정된 상대방의 [수식언 목걸이]를 빼앗으시오,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꼭 표적을 사냥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식언 목걸이]를 손에 넣는 거니까요.’ 유상아가 깜짝 목소리로 말했다. 「(아, 설마······.)」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허공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해당 지역에서는 ‘수식언 음절’의 수집이 가능합니다.] [당신은 수집한 음절들로 새로운 목걸이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성좌들의 수식언을 훔쳐, 표적의 [수식언 목걸이]를 만들어 내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수식언’이란 글자들의 조합이다. 가령 내 [구원의 마왕]이라는 수식언만 해도, [구] [원] [의] [마] [왕] 이라는 다섯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말인 즉, 꼭 내 목걸이를 빼앗지 않아도 이 다섯 글자만 어떻게든 손에 넣는다면 같은 목걸이를 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왜 이런 편법을 관리국에서 허락했을까요?)」 ‘정해진 표적에게서 목걸이를 빼앗으라는 조건은 시나리오 전개를 느리게 만드니까요. 벌써 표적이 시나리오에서 이탈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러면 일이 복잡해지겠죠.’ 성좌들은 느린 것을 질색하고, 빠른 전개와 몰아치는 사이다를 선호한다. 「(그럼 이 자들은 전부 글자 하나 때문에 희생당한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강력한 성좌들은, 하위격의 성좌들을 학살해 표적의 수식언을 조합했을 것이다. 달아나는 표적을 찾는 것보다 그게 더 빠를 테니까. 나는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대신, 이가 빠진 옥수수처럼 굴러다니는 수식언 목걸이들을 뒤졌다. 유상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식언 음절, ‘의’를 습득했습니다.] 쓸만한 글자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흔한 조사들뿐. 아마 필요한 글자들은 다른 성좌들이 벌써 조합 재료로 수집해 갔을 것이다. 나는 미카엘이 휩쓸고 간 시체 더미를 뒤져 쓸만한 아이템 몇 개를 구했다. 역시 미카엘쯤 되는 성좌라면, 성유물이 아닌 아이템들은 버리는 모양이군. 과연 씀씀이가 다른 녀석이다. 그나저나······. “······슬슬 밖으로 나오지 그래? 미카엘은 이미 멀어졌다고.” 텅 빈 폐허에 내 목소리가 조용히 퍼져 나갔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좋게 말할 때 그만 나오지?” 시체들 사이에, 나 말고도 숨어 있는 녀석이 하나 더 있었다. 완벽하게 기척을 감추고 있었지만, 나는 확신했다. 왜냐하면 아까 녀석이 숨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부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 더미의 한쪽이 무너지며 누군가가 일어났다. 용케도 [대천사의 눈]에 걸리지 않은 화신이 그곳에 있었다. “······구원의 마왕.” 상처투성이가 된 금발의 여인이 나를 노려보았다. 찢어진 팔뚝과 복부에 난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겉보기에도 위중한 상처였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네, 안나 크로프트.” * 안나 크로프트가 처음 ‘멸살법’에 등장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스가르드의 예언자. [미래시]와 [과거시]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그녀는, 회귀자인 유중혁의 카운터 스킬을 갖춘 등장인물이었다. 때문에 ‘멸살법’의 후반부에 그녀는 유중혁의 주요한 라이벌로 등장한다. ······본래의 전개대로라면, 그렇다. 대의를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여자. 최강의 화신 중 하나이자, 훗날 성좌들조차 두려워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주인이 되는 인물. 그런 인물이, 지금 무력한 상태로 내 눈앞에 축 늘어져 있었다. 나는 미리 구매해뒀던 [대환단] 하나를 으깨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안나 크로프트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약 30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나를 발견한 안나 크로프트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아직 상세가 위중하니까.” 안나 크로프트는 자신의 손발이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왜 나를 구했죠?”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내가 왜 당신 질문에 답할 거라 생각하죠?”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내가 아는 침착한 ‘예언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왜 ‘성마대전’에 참가한 거지?” “당연히 거대 설화를 얻기 위해서죠. 다른 이유가 있나요?” “너는 본래 다른 ‘거대 설화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할 텐데. 아닌가?” 내 물음에, 안나 크로프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작대로라면 안나 크로프트는 성마대전에 참가하지 않아야 했다. 왜냐하면 또 다른 거대 설화 시나리오인 ‘라그나로크’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안나 크로프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이미 안나 크로프트의 대답을 들은 셈이었다. “성운에서 버려졌군.”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으드득 이를 가는 목소리. 그 말에 담긴 분노를 나는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그동안 나는 몇 번인가 안나 크로프트와 충돌한 적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녀가 살아갈 원작의 미래는 바뀌었다. ‘미식협’에서도, <기간토마키아>에서도, 그녀는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반복된 실패가 누적되며, 성운 <아스가르드>는 쓸모를 잃은 그녀를 홀로 <성마대전>에 내던진 것이다. ······나 때문인가. 내가 바꾼 미래는, 유중혁과 일행들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경멸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안나 크로프트를 향해 말했다. “네가 여기서 ‘신화급 설화’를 얻어간다면 어때?” “······뭐라고요?” “그러면 아스가르드도 너를 재평가하지 않을까?” 신화급 설화. 그 말에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죠?”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무슨 속셈이냐고 물었어요.” “속셈 같은 건 없어. 나는 너랑 ‘차라투스트라’가 잘 성장하길 바라거든. 그뿐이야.”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가 ‘거짓 간파 Lv.8’를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안나 크로프트’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경악으로 물들었던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침착한 예언자의 눈빛이었다. “······조건이 뭐죠?” 역시, 예언자는 얘기가 빨라서 좋다. “나한테 능력을 좀 빌려줘.” 아마 안나 크로프트는 모를 것이다. 중섬에서 처음으로 만난 존재가 그녀라는 것을, 내가 얼마나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 섬의 고지대. 드높은 고목 나무 위에서, 아스모데우스는 턱을 매만지며 자신이 얻은 수식언 목걸이를 보고 있었다. [□한의 사냥꾼] 본래 아스모데우스의 표적 수식언은 [원한의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다른 경쟁자들이 그의 표적을 먼저 사냥했고, 덕분에 아스모데우스는 [□□의 사냥□]이라는 누더기 목걸이를 얻게 되었다. ‘[한]이랑 [꾼]은 구했고······ 이제 [원]만 구하면 되는데······.’ 문제는 이제 [원]의 음절을 수식언으로 가진 성좌가, 이 섬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권속들을 챙기느라 너무 늦게 참가한 영향이 크군.’ 아스모데우스는 나무 꼭대기에서 섬의 곳곳을 조망하며 남은 성좌들을 탐색했다. 북쪽 숲에서 들려오는 폭발음. 아마 이 정도 규모라면 범인이 누구일지는 뻔했다. 또 ‘청소’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저쪽에 끼어드는 것도 재미있긴 하겠지만······. 그때, 아스모데우스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래시]에 따르면, 그자는 이 근처에 있어요.” “그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나무에서 펄쩍 뛰어내린 아스모데우스는 엄청난 가속으로 목소리의 주인공 앞에 내려섰다. 흰 코트의 사내와 백금발의 여인. 아스모데우스가 웃었다. [구원의 마왕, 우린 결국 이렇게 만날 운명이었나 보군요.] 구[원]의 마왕. 그가 찾던 [원]의 주인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사내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난 싸우러 온 게 아냐, 아스모데우스.” [그건 그대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음절 [원]이 필요하지?” [······!] “나를 죽이고 [원]을 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하지만 그보다 훨씬 흥미로운 제안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겠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내게 제안을 한다는 것도 재미있는데, 흥미롭기까지 하다니. 얼른 들어보고 싶군요.] 아스모데우스의 목소리가 흥분와 광기로 얼룩져 있었다. 눈앞의 맛있는 먹이와, 더 맛있을지도 모르는 가상의 먹이를 놓고 경중을 가늠하는 표정. 아스모데우스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제안이 흥미롭지 않다면 당신은─] “지금 이 섬에 음절 [원]을 가지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야.” 또 다른 [원]의 주인.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변했다. [설마······.] “‘성마대전’에 참가했다면, 좀 더 진지하게 임해야지. 안 그래?” 그 순간 아스모데우스의 눈에 비친 김독자는, 정말로 마왕처럼 웃고 있었다. “‘대천사 사냥’, 혹시 관심 없어?”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