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363화
마을에 도착한 지 이주일이 지났다.
설화들이 제자리에 안착한 후, 나는 곧장 다음 시나리오 준비를 시작했다.
「‘환생자들의 섬’은 크게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1세대 설화의 개연성이 작동하는 ‘소섬’. 그리고 2세대 설화의 개연성이 작동하는 ‘중섬’. 마지막으로 3세대 설화의 개연성이 작동하는 ‘본섬’······.」
‘소섬’과는 달리 ‘중섬’에서부턴 본격적으로 성좌들과 부딪쳐야만 한다.
이 현실적인 1세대의 개연성을 뚫고 살아난 존재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합니다.]
여전히 한 녀석이 성깔을 부려댔지만, 이 정도로 고삐를 잡았으면 됐다 싶었다.
유호성은 말했다. 설화는 사용자를 지배하려 들기도 하지만 나아갈 길을 알려주기도 한다고.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이 녀석들은, 앞으로도 나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을 또 다른 설화로 빚어낼 것이다.
“희원 씨,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인사 레퍼토리 좀 바꾸면 안 돼요?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고요.”
일행들이 도착한 것은 내가 설화 통제 수련을 시작한 후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었다고 한다. 섬의 외곽 쪽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도착하는 데에 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일행들은요?”
“전부 훈련받고 있어요.”
얼마간 걷자 제각기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이들과 이현성, 장하영의 모습이 보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수련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설화 통제 훈련은 짧게 잡아도 두 달은 걸린다. 원작의 유중혁도 그 엄청난 재능으로 3주일이나 시간을 허비해야 했으니······.
나는 일행들의 설화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설화, ‘김독자 컴퍼니 행동강령’이 고통스럽게 몸을 꿈틀거립니다.]
[설화, ‘괴수의 목소리를 듣는 자’가 신음합니다.]
[설화, ‘동료의 신의를 갈망하는 자’가 고통스러워합니다.]
내가 얻은 설화들이 있듯, 일행들 또한 쌓아온 설화들이 있다.
같은 시나리오를 겪었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설화를 얻지는 않는다.
모두가 지닌 감수성이 다르기에, 쌓이는 이야기도 다르다.
“이곳은 다른 섬보다 시간 배율이 느리니, 천천히 훈련하셔도 됩니다. 급하게 마음 먹지 마세요. 통제 훈련을 완전히 마쳐야 성마대전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습니다.”
“알겠어요.”
[설화, ‘마왕의 광신도’가 노래를 부릅니다.]
「오오 그때 독자 형은 말했다네에 나는 세상의 신이다 나를 따라오면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리」
“······그리고 길영이 깨면 꼭 말해주세요. 왜곡된 설화를 쌓으면 큰일 난다고.”
정희원이 키득거리며 웃어서, 나는 조금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장난이 아닙니다.”
“저도 장난 아니에요. 독자 씨는 스스로의 위치를 좀 제대로 자각할 필요가 있어요. 저 아이들에게 독자 씨가 어떤 존재인지 말이에요.”
“······.”
“독자 씨가 없었다면 아이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나는 훈련 중에도 서로의 손등을 꼬집고 있는 신유승과 이길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를 믿고, 불완전한 이야기를 함께 이야기하며 여기까지 와준 아이들.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설화가 당신에게 발아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이는 장하영이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맺힌 채로, 그녀는 자신의 설화와 분투하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 사실은, 듣고 싶지 않아.」
「들어야 해. 그래도 들어야 해.」
흘러넘친 설화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도 들려왔다.
장하영이 무슨 설화를 보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이 섬에서, 장하영은 새로운 특성을 개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특성으로 말미암아 ‘초월좌들의 왕’이 될 초석을 닦겠지.
“독자 씨.”
“예.”
“하영 씨한테 유독 무신경한 거 알죠?”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한테 해준 이야기, 하영 씨에겐 해줬어요?”
일행들에겐 해준 이야기.
정희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이 세계는 소설을 기초로 구성되어 있고. 나는 그 소설을 읽은 유일한 독자다.」
나는 그 이야기를, 소수의 일행들에게만 전한 상태였다. 키리오스나 파천검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르고, 장하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허리를 숙여 장하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쌍꺼풀에 곱슬거리는 금발. [습도 보존]이 없어도 새하얗고 뽀송한 피부. 살짝 도톰한 볼과, 웃을 때는 매력적으로 들어가는 보조개. 묘하게 중성적인 분위기 때문에 쉽게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얼굴.」
‘멸살법’의 묘사들이, 과거의 내가 남겼던 댓글들이 이제 나에게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그렸던 상상과 너무도 똑같은 그 모습이,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이 된다.
“어디까지 솔직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네?”
장하영에겐 사실을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너를 만든 것은 나라고.
너는, 내가 단 댓글 때문에 태어난 존재라고······.
“최근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쩌면 제가 읽던 소설이 현실이 된 게 아니라, 그 소설이 그냥 이 세계를 기록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어쩌면 그것은 내 바람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의 김독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희원을 향해, 나는 싱겁게 웃어 주었다.
“저는 희원 씨를 좋아합니다.”
“어, 저도요.”
“그리고 다른 일행들도요. 지금은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기적이라 죄송합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요. 독자 씨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죠. 이해해요.”
“감사합니다. 참, 일행들 일어나면 이걸 전해주세요.”
“이건······?”
“다음 시나리오에 대한 정보입니다.”
정희원에게 건넨 수첩은, 다음 시나리오인 ‘중섬’의 정보를 담은 것이었다.
“잠깐, 독자 씨 또······!”
그리고 눈치 빠른 정희원은, 내가 왜 지금 그것을 건네주는지 이미 깨달은 눈치였다.
*
“오늘쯤 올 줄 알았다.”
소섬을 떠나기 전, 나는 유호성을 찾아갔다. 어쨌든 설화 통제법을 알려준 것은 그였으니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사실은 목적이 있었다.
“왜 우리 일행들을 받아 주신 겁니까?”
대뜸 던진 내 질문에, 유호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늙은이의 변덕이다.”
열 살 남짓한 외형의 아이가 자신을 ‘늙은이’라 칭하는 모습은 무척 기이했지만, 몰개연적인 광경은 아니었다. 일권무적 유호성은 어지간한 마왕이나 대천사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니까.
전설로만 알려진 <제 0무림>.
그 무림의 천하제일고수였던 사람이 바로 유호성이다.
“질문이 끝났다면 썩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
처음과 같은 축객령이었다.
“같이 가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무슨 헛소리냐?”
“소섬 시나리오가 종료되면, 당신도 다음 시나리오에 진출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번 ‘성마대전’은 그런 시나리오니까요.”
유호성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원작에서도, 이곳 환생자들의 섬에서 ‘성마대전’이 일어난 회차가 있었다.
「신新과 구舊의 만남. 1세대와의 퓨전 시나리오!」
아마 지금도 바깥에선 그딴 슬로건을 내걸고 시나리오를 홍보 중일 것이다. 관리국의 의도였다. 말로만 듣던 1세대의 설화들을 시나리오의 홍보 소재로 사용하기 위한 수작.
하지만 관리국의 돈벌이는 때로 시대에 떠밀려 잊힌 망자들에겐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 기회에 섬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환생자들의 섬. <스타 스트림>의 살아있는 박물관. 이곳의 환생자들은 섬 안에서 영겁의 생을 사는 대신, 이 섬의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는 저주를 받는다.
그것이 ‘섬의 주인’과 그들 사이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지나간 시대의 성유물처럼 박제되어 있으실 겁니까?”
유호성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화를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
“우리가 나가서······ 뭘 어쩌란 얘기지? 망자들이 강한 것은 섬 안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1세대는 저물었어. 아무도 그런 이야기는 원하지 않아.”
확실히, 그의 말은 맞다.
대부분의 환생자들은 ‘1세대의 개연성’이 깃든 섬을 벗어나면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니까.
강기와 마법이 난무하고,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바깥 세계에서 1세대의 망자들은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당신에게 사사한 초월좌들은 바깥에서도 활약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든 설화들을 그리워하는 존재들도 분명 있단 말입니다.”
“있겠지. 하지만 대세가 될 수는 없어.”
“꼭 대세가 되어야 합니까?”
“뭐?”
“대세가 되어야만 좋은 설화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런 것을 신경썼습니까?”
눈을 뜬 유호성의 눈에 불길이 일고 있었다.
“이제 와서 다시 성좌들의 노리개가 되라는 뜻이냐?”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나는 다른 마왕들처럼 머리가 터져 나갈 것이다. 그러니 한 발짝을 내딛을 수는 없다.
내가 내딛을 것은, 반 발짝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설화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정확히 반 발짝 만큼, 나는 이 사람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반 발짝을 본인이 내딛을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직접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눈을 크게 뜬 유호성의 동공에 파문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준 후, 그대로 돌아섰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키득거리며 웃습니다.]
돌은 제대로 던졌으니, 이후의 일은 이제 내 몫이 아니다.
저 무시무시한 초월좌를 움직일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
“정말 인사도 없이 갈 거예요?”
“다들 집중하고 있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금방 또 만날 거고요. 먼저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는 일행들에게 따로 작별 인사를 고하지 않고 정희원에게만 인사를 했다. 정희원은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이내 내 선택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꼭 살아남아요.”
“다시 만납시다.”
우리는 가볍게 주먹을 부딪쳤다.
떠나기 직전, 마을 주민들이 나를 마중했다.
“빵 좀 가져가겠나? 아침에 막 구운 건데.”
“돌을 좋아하는 것 같길래, 내가 모은 돌을 좀 가지고 왔네.”
그동안 친해진 몇몇 주민들이 나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멀어지는 마을 사람들 사이로 유호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뭔가가 바뀌길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나와 일행들을 가르치기로 한 것이겠지.
그가 가르친 기술이 섬을 변화시키고, ‘성마대전’을 바꾸고, 마침내는 <스타 스트림>을 바꾸기를 염원하면서.
[설화, ‘만년의 환생자’가 이별을 노래합니다.]
[설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농부’가 당신을 배웅합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먼 것들이 만나고 멀어지는 그 순간을, 설화는 기억한다.
그것이 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돌아서는 순간 유호성의 전음이 들려왔다.
―‘섬의 주인’이 네게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그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눈앞엔 아까부터 같은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섬의 주인’이 당신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화로 쪽으로 다가가자, 척준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가지.”
“좋습니다.”
어차피 중섬으로 전송되는 와중에 헤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입장이라도 같이 한다니 뭔가 든든하다.
“다음 시나리오 말입니다만······.”
중섬의 시나리오는 본섬에서 있을 ‘성마대전’의 예비 시나리오였다.
내 말을 어떻게 오해했는지, 척준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마왕이었지. 좋다. 만약 그대와 싸우게 된다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본좌는 진정한 대결을 할 때 사사로운 연에 얽매이지 않으니, 그대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 제발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여주셨으면.
다음 시나리오에서 척준경의 표적이 내가 아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튜토리얼 시나리오를 종료하였습니다!]
[중섬으로의 전송을 시작합니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갱신 메시지와 함께, 주변의 정경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당신은 3번 중섬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주변에 척준경은 보이지 않았다.
전송이 완료됨과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가 났다. 이미 죽은 성좌 및 화신들의 시체가 깔린 벌판.
주눅이 들 법한 광경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이번 시나리오는 늦게 시작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미리 진출해 있던 강력한 성좌들과 마주칠 확률이 더 낮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에는 ‘2세대 개연성’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스킬들 중 일부가 개방됩니다.]
[당신의 종합 능력치 일부가 복원됩니다.]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미미하게 넓어지고 키가 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정말 답답했는데,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곧바로 시나리오 창을 열었다.
+
<히든 시나리오 ― 수식언 뺏기>
분류 : 메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표적으로 지정된 적의 ‘수식언 목걸이’를 빼앗으시오(해당 참가자의 수식언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 진명으로 대체됩니다).
제한시간 : ―
보상 : 표적의 설화 하나를 랜덤으로 획득, 본섬으로의 진출 티켓 획득.
실패시 : ???
+
이번 시나리오는 ‘본섬’으로 진출하기 전 마지막 관문.
시나리오 내용은 간단했다. 표적으로 지정된 존재의 수식언 표식을 빼앗는 것.
내 목에도 어느새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구원의 마왕]
수식언이 적힌 목걸이였다.
[현재 3번 중섬의 생존자는 262명입니다.]
262명.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강한 성좌들은 죄다 본섬으로 진출했을 테니까.
중요한 것은 내 표적이 누구냐인데, 어차피 강한 놈들은 죄다 사라졌으니 보나마나······.
[당신의 ‘주요 표적’이 결정되었습니다.]
[‘주요 표적’의 수식언은······.]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멀리서 달려오는 성좌들의 떼를 발견했다.
뭔가에 쫓기듯 허겁지겁 달아나는 무리들.
대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파도가 갈라지듯 일군의 무리가 핏덩이가 되어 쪼개졌다. 피어 오르는 먼지 구름 사이로, 달아나는 성좌들을 쫓는 이가 보였다.
······이런 제기랄.
왜 저 자식이 아직도 여기 있어?